국내도서 요약 

잡학다식한 경제학자의 프랑스 탐방기

저   자
홍춘욱
출판사
에이지이십일
출판일
2018년 06월
서   재







  • 얼마 전 인기리에 방송된 ‘알쓸신잡’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단순히 보고 먹고 즐기는 유흥이 아닌, 배우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배움을 목적으로 한 여행을 제시한 것이다. 이 책은 현직 경제학자가 쓴 해외편 ‘알쓸신잡’이라 할 수 있다. 저자인 홍춘욱 박사는 아들과 함께 파리에서 모나코까지 그랜드 투어에 나서, 현지에서 아들과 나눈 이야기를 10여 개의 주제로 묶어 책으로 엮었다. 당시에는 속 시원히 답하지 못했던 아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잡학다식한 경제학자의 프랑스 탐방기


    나는 왜 아들과 단둘이 프랑스로 떠났나?

    저는 경력 25년차 이코노미스트입니다. 1993년 금융연구원에서 리서치 보조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죠. 이코노미스트란 경제를 분석한 다음 금리나 환율 같은 핵심적인 금융시장의 지표를 예측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금융연구원을 그만둔 다음에는 여의도 금융회사에서 10년 넘게 일하다 국민연금으로 옮겼습니다. 국민연금에 지원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계적인 연금에서 자금을 배분하고 투자함으로써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었고, 다른 하나는 개인 시간을 가지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저처럼 개인의 능력으로 먹고사는 직업이라는 게 대충 비슷합니다. 연봉은 상위권이지만 시간당 임금은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하루를 놀면 이틀 이상 노력해야 따라잡을 수 있고, 일주일을 놀면 2주는 죽어라 일해야 합니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능률은 올라갑니다만 한계에 부딪히고 늘 지쳐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여행하는 게 늘 큰 소망이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제일 먼저 유럽행 항공권 2장을 예매했습니다. 오래전부터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전역을 돌아보고도 싶었고 그동안 사춘기를 맞이한 큰아들 채훈이와의 사이가 서먹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행지로 프랑스를 결정한 이유는 친구들이 두루 살고 있기도 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또 문화유산으로 가득한 곳에서 ‘그랜드 투어’를 하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랜드 투어란 19세기 유럽에서 청년들이 교육의 일환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던 관행을 일컫는 말입니다. 종료분쟁과 내전이 진정되어 사회가 안정되자 영국의 상류층은 자식을 유럽 대륙,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보내 세련된 취향과 외국어를 배워 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데리고 일정을 짰습니다. 물론 주된 포인트는 박물관과 미술관, 역사 유적지였습니다. 직장을 옮기지 않았다면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정이었죠.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것 같습니다. 특히 파리와 모나코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면서 유럽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깨우친 것은 큰 자산으로 남았습니다.



    파리의 집값은 왜 그렇게 비싼가요?

    파리의 인구는 1801년 55만 명에서 1901년 270만 명으로 급증했다가 2010년 220만 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왜 파리 인구는 계속 늘어나지 않고 줄어들었을까요? 하버드 대학교의 에드워드 글레이처 교수는 그 원인을 ‘주택 공급 부족’에서 찾았습니다. 19세기 나폴레옹 3세 시절에 결정된 고도 제한으로 주택 공급이 늘지 않았고, 이 결과 파리는 점점 일부 사람만 살 수 있는 곳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파리 중심부에 신규 주택이 부족해지면서 소형 아파트의 매매 가격이 100만 달러를 넘어선 지 오래되었고, 파리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는 데 500달러 이상이 드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그런데 런던이나 파리 모두 아름답고 비싼 도시임에 분명합니다. 다만, 왜 파리 집값은 런던 집값의 절반 수준일까요? 이유는 철도망의 차이에 있었습니다.


    지난 1950년대까지만 해도 선진국은 철도 건설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죠. 자동차가 교통의 주역으로 부각되면서 철도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도로는 만드는 일이 일반화된 겁니다. 이 결과 세계 주요국의 철도 총연장은 이후 60년 넘게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형편입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철도망이 건설되어 일할 곳이 많은 대도시로의 통근이 편해지면, 이는 도시 면적이 확대된 것과 같은 효과를 지니지 않겠습니까?


    프랑스, 특히 파리의 주택 가격이 런던에 비해 상대적으로 싼 이유가 베르사유를 비롯한 주변 도시로 이어진 거미줄 같은 광역철도망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프랑스 사람들도 파리에 집을 지으려는 생각을 아예 안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최근 실린 <르몽드>지의 칼럼은 파리 사람들이 주택 공급을 늘리고 싶지 않은 이유를 잘 설명해 줍니다. “파리는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박물관입니다. 그래서 불평불만이 나오기도 합니다. 반면 파리의 영원한 라이벌인 런던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건립되었습니다. 그들은 천 년 역사의 삼장부에 십여 개의 마천루 건설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파리는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박물관입니다’라는 말 속에 숨어 있는 파리 시민의 자긍심을 감안하면 대대적인 주택 건설은 힘들어 보입니다.


    파리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광역철도망 덕분에 파리의 집값이 런던에 비해 상대적으로 싼 것은 사실이지만, 파리 시내에 새집을 짓기 어렵기에 자산을 모으지 못한 사람은 앞으로도 파리에 집을 구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어떻게 이렇게 화려해졌나요?

    위성 지도를 보면 프랑스는 유럽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축복받은 땅입니다. 물산이 풍부하고 인구도 많았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평야’입니다. 프랑스의 서북부 지역은 산이 없어 매우 평탄합니다. 따라서 큰 강을 따라서 도시가 생기고 상업이 발달하기 쉬운 구조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행운이 따릅니다. 중세 시대 프랑스 동부의 샹파뉴 지방에 매년 큰 시장이 열리는데, 이 시장 덕택에 프랑스는 일찍부터 상업이 크게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샹파뉴 지방은 샴페인의 생산지로 이름 높은 부유한 지역입니다.


    이탈리아 상인이 머나먼 중동에서 가져온 값비싼 상품을 싣고 알프스를 넘어간 이유는 바로 ‘고객’이 플랑드르 지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플랑드르 지역이 부유했던 이유는 북해에서 무진장 쏟아지는 생선인 청어를 소금에 절여 오랫동안 보관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영국 등에서 수입한 질 좋은 양털을 천이나 옷으로 만들어 유럽 전역에 수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거래 비용이었습니다. 게다가 중세 유럽은 지금처럼 공식적인 국경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각각의 영주가 다스리는 작은 장원으로 조각나 있었기 때문에 치안이 아주 불안정했습니다. 결국 두 지역에서 적당히 떨어진, 프랑스 동부의 가장 강력한 영주인 샹파뉴 백작의 영지에서 플랑드르와 베네치아의 상인이 정기적으로 만나 거래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17세기까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유리 제조 국가는 베네치아였습니다. 샹들리에는 물론이고 모래시계와 같은 유리 제품이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죠. 처음에는 베네치아에서 유리 기술자를 스카우트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베네치아가 무라노 섬에 유리 공방을 두고 산업 스파이를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술 습득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유리 제조 기술을 습득하기는 했지만, ‘베네치안 글라스’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는 상황에서 후발주자인 프랑스제 유리 제품을 아무도 사주지 않는다는 것이 루이 14세의 고민이었습니다.


    결국 루이 14세는 유럽의 귀족들이 꿈에서라도 한 번 가보고 싶어 하는 베르사유 궁전에 거울로 가득 찬 방을 만듦으로써 프랑스산 유리 제품의 기술력을 자랑하고, 수출 상담을 진행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수많은 전쟁과 궁궐 건축 등으로 재정을 망가뜨린 것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실책은 말년에 ‘낭트 칙령’을 폐지한 것입니다. 낭트 칙령을 폐지하자 신교도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프랑스를 빠져 나갈 수밖에 없었고, 이 덕에 영국과 스위스 등 인접 국가가 큰 이익을 보았죠. 왜냐하면 신교도의 상당수가 상인과 기술자였기 때문입니다.


    프랑스가 경쟁력을 잃어버린 대표적인 산업은 ‘시계 제조업’이었습니다. 유럽 서양사학계의 거장 치폴라 교수에 따르면, 종교개혁 시기에 많은 시계공이 신교로 개종했다고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시계공은 소득도 많고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도 높았기에, 루터 등이 주도한 종교개혁의 내용을 바로 알아차린 탓이겠죠.



    왜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시작되었나요?

    먼저 지리적 환경의 차이를 들 수 있습니다. 앞에서 유럽이 발전한 이유로 고만고만한 나라들이 끊임없이 갈등하고 경쟁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는데, 중국은 반대로 통일 국가의 출현 가능성이 높은 곳이었습니다. 송나라 때 형성된 중국 해군력의 상징이 정화의 대원정입니다. 1405년 난징에서 스리랑카로 항해한 명나라 정화 제독의 함대는 300척에 달하는 배와 2만 7천 명의 선원이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반면 1492년 콜럼버스의 함대는 3척의 배에 단 90명의 선원을 이끌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영락제의 손자인 선덕제가 정화의 원정을 중지시키는 한편 남경에 있는 조선소를 폐쇄함으로써 대원정의 막이 내립니다. 그럼 왜 선덕제는 해양 원정을 중단했을까요?


    일각에서는 주자학을 믿는 고리타분한 유학자들의 반대 때문이었다고 한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학자 에릭 밀란츠는 끊임없는 북방 민족의 위협 때문에 더 이상 대원정에 쓸 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지리적 환경 이외에 유럽, 특히 영국의 제계 제패를 이끈 두 번째 요인은 바로 제도입니다. 여기서 제도는 주로 ‘재산권’과 관련한 사회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영국이 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금융’시스템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재산권 보호에 기반을 둔 좋은 제도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1341년 영국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에 충당하기 위해 빌린 돈의 금리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지급 불능을 선언했던 것을 돌아보면,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영국의 승리는 ‘저금리의 승리’입니다.


    마지막으로 유럽과 동양의 운명을 가른 요인은 ‘농업’이었습니다. 유럽은 밀이 주로 재배된 반면 아시아는 벼가 일반적이었죠. 벼는 밀에 비해 훨씬 수확량이 많습니다. 이렇게 재배 작물의 생산성에 큰 차이가 발생하다 보니 유럽과 중국이 인구 격차가 끝없이 벌어집니다. 19세기 초반 영국의 인구는 1천 2백만 명 남짓했지만 청나라 인구는 4억을 돌파합니다. 토지가 아무리 넓다 하나 인구가 워낙 많으니 1인당 소득이 낮아집니다. 중국이 아주 적은 생산량 증가를 위해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는 동안 영국에서는 전혀 다른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원래 인구가 적고 1인당 소득도 높으니 저축 수준도 높습니다. 이처럼 높은 소득 수준은 ‘기계’ 투자의 저항감을 낮춥니다.


    중국은 인건비가 싸고 사람도 넘치니까 웬만한 일은 그냥 사람을 쓰는 방향으로 갑니다. 반대로 영국은 기계를 사용하는 데 거침이 없죠. 특히 영국은 발명 특허권이 잘 발달되어 있어 발명가가 큰돈을 벌 수 있었다는 것도 한몫했습니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본격화된 시기는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었던 1800년 전후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어떤 모험적인 기계나 장비도 사용할 자세가 되어 있었죠. 이 밖에도 여러 요인이 있습니다. 신대륙 아메리카의 막대한 자원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었고, 영국에 거대한 석탄 노다지가 묻혀 있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인상파 화가의 그림이 사랑받는 이유가 뭐죠?

    살롱전은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가 창립 기념으로 개최한 전시회가 시초라 할 수 있는데요. 정기적으로 열리는 일종의 ‘경진대회’를 말합니다. 19세기 파리 살롱전은 그야말로 제도권 미술 세계에 진입하는 최고의 관문이었습니다. 화가가 작품을 제출하면 아카데미의 심사위원들이 작품을 심사합니다. 만장일치로 통과한 경우에는 1등급을 분류되어 가장 좋은 자리에 걸릴 자격을 얻습니다. 그러나 살롱전에 출시되어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은 심사위원의 비위에 맞는 그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살롱전은 ‘판타지 세계’를 그린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이런 주류에 반발하여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에두아르 마네의 문제작 <풀밭 위의 점심 식사>입니다. 이 그림은 살롱전에서 무시무시한 악평을 들어야 했습니다. 티치아노의 <전원의 합주>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구도가 비슷하지만, 그림 속 인물의 ‘시선’이 전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명의 여성이 누드이지만 티치아노의 그림 속 두 남자는 이를 인식하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요. 특히 네 명의 주인공 모두 정면을 보지 않기 때문에 관람객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마네의 그림은 완전히 다르죠. 여성 모델이 당당하게 정면을 쳐다봅니다. 그는 전통을 비틀고 야유하는 중이죠.


    마네가 던진 충격은 이후 기술의 진보와 함께 빠르게 확산됩니다. 철도를 이용해서 지방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었고, 과거에 비할 수 없이 편리한 화구가 보급되어 진정한 의미의 풍경화가 그려집니다. 또한 사진기가 발명되어 이른바 ‘사진 같은 그림’에 대한 수요가 사라지는 환경이 출현한 것도 이들의 변화를 촉발한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렇지만 인상파나 사실주의 화가는 가난했습니다. 샤세리오나 티치아노의 그림은 예쁘고 원근도 잘 나타나 있어서 성공한 기업가가 큰돈을 주고 아낌없이 구입하지만, 마네나 고흐의 그림은 장식용으로 낙제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대신 이들의 그림은 역사에 남았습니다. 



    프로방스 지방의 도시는 왜 산속에 있어요?

    하나는 질병에 대한 공포였고, 다른 하나는 사라센의 해적 때문이었습니다. 지중해를 비롯한 해안가는 사람이 살기는 좋지만 그에 못지않게 질병이 번지기도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특히 말라리아를 비롯한 각종 전염병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요인으로 작용했죠. 세계 2차 대전 이후 치료제가 개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효과적인 치료약은 남미에서 나는 기나나무 껍질을 채취해 가공한 키니네뿐이었습니다. 물론 키니네 이외에도 말라리아를 퇴치하는 방법은 존재합니다. 바로 마른 땅을 만드는 것입니다.


    로마 역시 테베레 강의 하류에 자리 잡은 습한 땅이었지만, 수백 년에 걸친 공사를 통해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물길을 만드는 중에 산과 같은 장애물을 만나면 흔히 ‘수도교’로 알려진 거대한 수로 시설을 설치해 물을 날랐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곳은 교량으로서의 기능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수로의 기능이 강했죠. 물론 이런 시설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말라리아와 같은 전염병을 없앨 수 없죠. 끊임없이 보수하지 않으면 저수지의 둑은 무너지고 수로교에서 물이 샐 테니까요. 안타깝게도 로마 제국이 멸망한 다음에는 이게 불가능했습니다.


    로마 멸망 이후 사태를 더욱 심화시킨 것은 ‘이슬람 해적’의 출현이었습니다. 이른바 ‘사라센 해적’이 대대적으로 사람들을 납치해 로마 시대에 남겨져 있던 목욕탕 유적에 몰아넣고, 굶주림에 살아남은 사람들만 노예로 팔았거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슬람 해적이 공격해 오기 힘든 산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지배자는 게르만의 귀족들이었지만, 이들은 이슬람에 맞서 싸울 힘도 의사도 없었습니다. 왜 그들이 이슬람과 적극적으로 싸울 생각이 없었냐 하면, 그들의 전력도 약했거니와 ‘이동형 강도’의 특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강도’란 국가 혹은 전근대 시절 국가에 대한 일종의 비유입니다. 강도도 여러 종류가 있었습니다. 정착형 강도와 이동형 강도가 그것인데요. 최악은 이동형 강도입니다. 이동형 강도는 주민이 키워놓은 재산과 사람을 약탈하는 집단입니다. 대표적인 집단이 몽골 등 중앙아시아의 유목 민족 국가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강도도 있었습니다. 바로 노르만의 바이킹이었습니다.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 지방의 유력자들은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40여 명의 바이킹에게 제의했죠. ‘남부 이탈리아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자신들을 지배하라’고 말입니다. 250명의 동료와 함께 돌아온 바이킹은 풀리아 지역의 유력자와 힘을 합쳐 비잔틴의 영주와 이슬람의 해적을 몰아냈습니다. 그렇지만 운이 좋았던 소수의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중해 연안 주민은 이동형 강도와 전염병을 피해 바닷가를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게다가 산에는 이슬람 해적 대신 산적이 떼를 지어 사람들을 약탈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에 성벽을 만들어서 외부인의 이동을 차단하는 식으로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이야 산속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마을에 놀러 온 세계 각국의 관광객이 감탄하지만, 지중해 연안의 산속 마을은 비극의 무대였던 셈입니다.



    프랑스에 맛난 식당이 왜 몰려 있죠?

    직접적인 이유로는 프랑스가 부유하기 때문입니다. 19세기 후반에서 세계 1차 대전까지 도시에 살던 근로계층은 수입의 절반 이상을 식비로 썼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식’은 매우 비판받을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현상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완전히 달라집니다. 산업혁명 속에서 경제의 생산성이 날로 커지고, 비참했던 도시 근로자 계층의 삶도 조금씩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죠.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여유가 생기면서부터 스스로를 차별화하려는 노력이 생겨났습니다.


    제일 먼저 시작된 차별화 노력은 ‘의복’이었죠. 그러나 근로 계층을 벗어나 부르주아 계층으로 발돋움하는 사람들은 옷을 잘 차려입는 것만으로는 사회의 인정을 받기 힘들었습니다. 명품을 보고 이를 이해하는 능력, 즉 감식안을 가지고 있느냐가 ‘상류 계급’ 편입의 조건이 되었죠.


    이 대목에서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지배했던 메디치 가문이 생각납니다. 메디치 가문이 처음부터 귀족은 아니었습니다. 시작은 부유한 상인이었죠. 그러다 은행업에 눈을 뜨고, 특히 나중에 교황이 되는 추기경을 후원하고 융자까지 해주면서 피렌체의 권력을 잡아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렇지만 피렌체를 지배하는 가문을 우뚝 서기에는 부유함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메디치 가문이 지배하는 내내 끊임없이 다른 귀족 가문의 반란이 있었거든요. 이에 대한 메디치 가문의 대응이 예술가의 후원으로 이어졌습니다.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천재를 어려서부터 후원하고, 그들이 그림이나 조각을 가져올 때마다 후하게 대접함으로써 메디치 가문이 ‘감식안’을 가지고 있음을 주위에 보여준 것입니다.


    15세기 메디치 가문의 예술 후원과 유사한 일이 19세기 미국에서도 나타납니다. 미국에서 ‘상류 계급’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사람들은 다락방을 뒤져 유럽에서 선조가 가져온 유물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선조가 유럽에서 가져온 유물 중에 ‘중국산 도자기’가 있었다면 이건 이 집안이 유럽에서도 매우 부유했고 영향력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중국산 도자기 못지않게 자신의 ‘감식안’을 드러내는 방법은 미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심은 미쉐린 가이드 덕분에 더욱 확대되고 재생산되었습니다. 미쉐린 가이드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세계적인 타이어 회사 미쉐린이 1900년부터 만든 소책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예기치 못한 효과를 발생시켰습니다. 프랑스 사람의 ‘관심’을 끌어내면서 프랑스의 음식이 어마어마한 경쟁력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프랑스 음식이 왜 그렇게 유명할까? 해답은 그만큼 프랑스 사람이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식 붐’속에 비슷한 소득 수준임에도 영국 요리가 처참한 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무조건 소득이 증가한다고 그 나라의 음식이 맛있어진다고 말할 수는 없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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