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도서 요약 

화정, 정명공주

저   자
신명호
출판사
생각정거장
출판일
2015년 06월
서   재







  • 광해군에 의해 8살 동생인 영창대군을 잃고 모친 인목왕후와 함께 강등되어 서궁 유폐를 당하기도 하고 인조반정을 통한 광해군 숙청 후 신분 복권, 6대 조선 국왕과 시대를 함께 하며 83살까지 살았던 조선 최장수 공주. 당대 여성 최고의 서예가로 평가될 만큼 뛰어난 필체로 남자보다 더 기개 있는 작품을 후대에 남긴 정명공주.



    화정, 정명공주


    주요사건 

    1602(선조 35) 선조와 인목왕후 혼인

    1603(선조 36) 정명공주 출생

    1606(선조 39) 영창대군 출생

    1608(선조 41) 선조 승하 후 광해군 즉위

    1611(광해군 3) 광해군 세자가 박자흥의 딸과 혼인

    1613(광해군 5) 3월 영창 추대 세력 축출하는 계축옥사 발발

                   5월 인목대비의 측근 궁녀들이 유릉저주조사차 체포됨

                   6월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 사사, 폐서인된 영창대군 대비전에서 강제 출궁

                   7월 영창대군이 강화도에 위리안치됨

    1614(광해군 6) 2월 영창대군 강화도에서 죽음

                   11월 정명공주, 마마에 걸렸다가 회복됨

    1618(광해군 10) 인목대비 후궁으로 강등, 정명공주 서녀로 강등

    1623(광해군 15) 3월 인조반정, 인조가 정명공주 부마간택 명령, 광해군 강화도에 위리안치

                    9월 삼간택에서 홍주원이 정명공주의 부마로 선발됨

                    12월 정명공주와 홍주원의 혼례 거행

    1628(인조 6) 유효립 역모사건

    1632(인조 10) 6월 인목대비 승하

    1639(인조 17) 정명공주가 저주했다고 인조에게 의심받아 정명공주의 측근 궁녀가 체포됨

    1649(인조 27) 인조 승하

    1685(숙종 11) 정명공주 83세로 세상을 떠남



    1막 갈등의 서막 - 공주와 왕자의 탄생, 광해군의 극심한 견제

    정명공주, 갈등 속에서 공주로 태어나다

    정명공주는 서기 1603년(선조 36)에 태어났다. 정명공주가 태어난 1603년은 임진왜란이 끝난 1598년(선조 31)부터 겨우 5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선조가 인목왕후 김씨와 정릉동 행궁에서 초야를 치른 때는 1602년(선조 35) 7월 13일이었다. 당시 선조는 51세였고 인목왕후 김씨는 19세였다. 선조와 인목왕후의 재혼은 축복과 비극을 다 갖고 있었다. 홀로 된 세조가 왕비를 맞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축복이었다. 하지만 세자 광해군 쪽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비극이었다.


    당시 선조와 광해군은 왕과 세자, 아버지와 아들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큰 갈등을 겪고 있었다. 임진왜란 초반 한양을 포기하고 의주까지 파천했던 선조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왕위에서 물러나라는 압박을 받았다. 이에 비해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 눈부신 활약을 벌였다. 의주까지 파천한 선조가 여차하면 중국으로 망명할 준비를 하는 동안 광해군은 전선을 누비며 의병들을 독려했다. 이런 광해군의 활약으로 임진왜란 초반의 열세를 만회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선조에게서 떠나 광해군에게 몰렸다. 그러면서 선조의 열등감은 커지게 되었고 세자 광해군과의 사이에 갈등이 깊어졌다.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이 끝났을 때 선조는 47살에 지나지 않았다. 왕위를 물려주기에는 너무나 젊었다. 반면 24살의 광해군은 이미 처자식이 달린 어른이었다. 을해년인 1575년(선조 8)에 돼지띠로 태어난 광해군은 13살 되던 1587년(선조 20) 한 살 아래의 부인과 혼인했다. 광해군 부인의 아버지는 유자신이고 어머니는 정유길의 딸이었다. 


    선조가 인목왕후 김씨와 재혼하자 광해군의 처가쪽 사람들은 혹시라도 인목왕후가 아들을 낳을까 두려워했다. 당시 선조와 세자 광해군의 관계가 그렇게 정답지 않은데다, 세자 광해군에게 불만을 품은 선조가 새로 태어난 아들을 세자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불운하게도 정명공주가 태어난 시점이 바로 그런 때였다.


    정명공주가 태어났을 때 선조는 52살이었다. 정명공주에 대한 선조의 사랑은 여러 면에서 파격적이었는데 특히 공주 봉작이라는 면에서 두드러졌다. 조선시대 국가 제도를 규정한 최고법전인 『경국대전』에 의하면 대군[왕비가 출산한 아들]의 봉작은 대체로 왕자군[후궁이 낳은 아들]이 봉작되는 7세보다 이른 나이에 이루어졌고, 공주 또는 옹주는 8살 전후로 봉작되는 것이 관행이었다.


    조선시대 공주 또는 대군의 봉작은 왕의 명령으로 거행되었다. 보통 왕은 공주 또는 대군의 작호(爵號, 벼슬의 이름)를 결정해서 통보하고 아울러 봉작에 따른 공상(供上, 왕실의 생필품 등을 공급함)과 전결(田結, 토지의 단위) 등을 거행하라고 명령했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 왕의 자녀가 봉작된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관작을 받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대군, 군, 공주, 옹주는 9품의 품계를 넘는 무품계(無品階)로서 서열상 영의정이나 좌의정, 우의정보다 높았다. 그러므로 공주나 대군에 봉작되는 것은 형식적인 명예만 받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실익을 받는 것이었다. 반면 국가 재정에는 막대한 부담이 되었기에 일반적으로 공주 또는 옹주는 8살 전후에 봉작되었다. 그렇지만 정명공주는 8살이 아니라 2살에 봉작되었다. 조선시대에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힘든 파격적인 일이었다. 선조는 공주가 바르고(貞) 밝게(明) 자라나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정명이라 지었을 듯하다.


    영창대군, 선조의 대군으로 태어나다

    정명공주가 태어나고 3년 후인 1606년(선조 39) 3월 6일에 친동생 영창대군이 태어났다.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광해군 쪽 사람들은 또 불안감에 떨었음이 분명하다. 궁리 끝에 유자신이 한 일들은 이런 것이었다.


    먼저 유자신은 세자 광해군을 위해 굿도 하고 점도 쳤다. 굿 외에도 유자신은 비결(秘結)을 이용하기도 했다. 비결이란 앞날의 길흉화복을 얼른 보아서는 그 내용을 알 수 없도록 적어 놓은 글이나 책을 뜻하는데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런 비결을 많이 믿고 또 이용하기도 했다. 유자신은 선목제 만목제라는 참요를 지어 유행시켰다고 한다. 참요 안에 담긴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기는 어렵지만 『계축일기』에는 유자신이 이런 참요를 유행시킬 때, 동궁의 친형이신 임해군께서 자식이 없음을 빌미로 하여, 인목왕후의 측근들이 임해군을 세자로 삼아 이번에 태어나신 대군께 보위를 전하려 한다고 떠들어댔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영창대군에 대한 선조의 사랑과 세자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불신은 반비례했다. 세자 광해군에 대한 불신이 크고 깊을수록 영창대군에 대한 사랑이 크고 깊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는 영창대군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자 했다.


    그 첫 번째가 영창대군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왕실 관행에 따르면 대군이나 공주는 봉작된 이후에야 자기 소유의 재산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선조는 영창대군을 봉작하기 전에 이미 거대한 재산을 물려주었던 것이다. 2살의 영창대군은 이미 노비 450명, 전답 300여 결을 확보한 재산가였다. 뿐만 아니라 선조는 영창대군을 제안대군의 후계자로 정함으로써 영창대군을 상상 이상의 재산가로 만들었다. 예종의 큰아들로 태어나 성종, 연산군, 중종까지 4대에 걸쳐 60년 인생을 산 제안대군은 역대의 국왕으로부터 수많은 재산을 받음으로써 거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노년의 선조는 자신의 죽음이 멀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광해군이 왕이 된 후 영창대군에게 잘해줄 것이란 확신이 선조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 있을 때 미리 재산이라도 많이 물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세자 광해군 입장에서는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즉 영창대군에게 미리 큰 재산을 주었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대군이 아니라 세자에 봉작하려 한다고 의심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의심은 선조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이 더욱 부채질하였다.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선조는 세자 광해군에게 늘 검소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재산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세자 광해군은 선조의 말과 행동을 의심했을 것이다. 이런 세자 광해군의 의심을 영창대군의 봉작 명칭이 더더욱 부채질하게 되었다.


    영창(永昌)이란 글자 뜻만 보면 영원히 번창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영창이란 봉작명은 중국에서 황제의 연호(年號)로 사용된 적이 있는 용어였다. 게다가 실제 봉작도 하지 않았는데, 봉작명은 영창으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선조는 왜 공포(公布)했을까? 이와 관련하여 『광해군일기』에는 광해군은 영창(永昌)이라는 두 글자가 황제의 옥새에 새겨진 글자라고 하여 여러 차례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의 봉작명을 고쳐달라고 요청했지만, 대비는 선왕께서 명령하신 것이라고 고집하며 허락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영창이라는 봉작명에 대한 광해군의 열등감은 광해라는 봉작명을 짚어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광해(光海)는 조선시대 강원도 춘천의 별칭이었다. 즉 광해군은 춘천에 봉해진 군이란 뜻이다. 이에 비해 영창대군은 중국황제처럼 영원히 번창할 대군이란 의미였다. 이런 점에서 광해군이 영창대군의 봉작명에 강한 열등감을 가졌음은 물론 그처럼 거창한 봉작명을 결정해준 선조에게 큰 불신을 가졌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인목왕후, 광해군의 왕대비가 되다

    불행히도 영창대군이 태어난 이후부터 선조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선조는 세자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거나 대리청정을 시키려고 했다. 아마도 당시 선조는 일단 건강을 회복한 후 대리청정을 취소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영의정 유영경을 비롯한 대신들이 반대했다. 요양하면서도 충분히 국사를 돌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영의정 유영경은 전위 또는 대리청정 시키겠다는 선조의 명령을 비밀에 부치고 철회를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위급하던 선조의 건강이 며칠 사이에 갑자기 좋아졌다. 그러자 선조는 기왕의 명령을 취소하고 다시 국정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한편 선조가 세자 광해군에게 전위 또는 대리청정 시키려다 취소하자 광해군 쪽 사람들 사이에서는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유영경이 중간에서 선조의 뜻을 받들어 세자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추대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도 팽배했다. 이에 세자 광해군 쪽 사람들은 세자의 왕위 계승을 기정사실화하고 유영경을 축출하고자 했다.


    유영경을 축출하기 위해 광해군 쪽 사람들은 중앙의 삼사 관료들뿐만 아니라 지방의 유림들까지도 이용하고자 했다. 이때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들이 광해군의 처가 쪽 사람들과 함께 이이첨, 이산해 등 대북계(大北系) 인사들이었다. 이 결과 1608년(선조 41) 1월 18일에 [경상남도의 대표적 유학자인] 정인홍은 유영경을 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뒤이어 유영경의 반박 상소가 잇따르면서 선조의 죽음을 앞두고 차기 왕위 경쟁이 본격화되었다.


    이런 상황은 선조를 격분하게 만들었다. 1월 26일 선조는 정인홍과 이이첨, 이경전을 귀양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정인홍은 근거 없이 사람을 모함했다는 죄목이었고, 이이첨과 이경전은 정인홍을 사주했다는 죄목이었다. 이대로 가면 다음에는 광해군의 처가쪽 사람들이 숙청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어쩌면 세자 광해군까지도 숙청될 수 있다는 예상이 가능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2월 1일 오후에 발생했다. 지난밤 선조는 잠도 잘 자고 오전 일정도 아무 문제없이 처리했다. 그런데 점심 때 올라온 찰밥을 들던 선조는 갑자기 기가 막히면서 위중한 상태가 되었다. 워낙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손써볼 틈도 없이 선조는 승하하고 다음날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인목왕후는 선조의 승하가 공포된 직후 봉함된 유교를 빈청에 내렸다고 한다. 유교(遺敎)란 왕의 유언장을 의미하는데, 세자 광해군에게 남긴 것이었다. 문제는 동기들을 내가 살아 있을 때처럼 사랑하고 참소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부디 그 말을 따르지 말라. 이런 내용으로 너에게 부탁하노니, 모쪼록 나의 뜻을 깊이 유념하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광해군 즉위 직전에 인목대비는 빈청의 대신들에게 유교 1봉(封)을 또 내렸다. 그 유교의 겉에는 유영경, 한응인, 박동량, 서성, 신흠, 허성, 한준겸 등 제공에게 유교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내용은 부덕한 내가 왕위에 있으면서 신민(臣民)들에게 죄를 졌으므로 깊은 골짝과 연못에 떨어지는 것 같은 조심스러운 마음이었는데 이제 갑자기 중병을 얻었다.……단지 대군이 어린데 미처 장성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때문에 걱정스러운 것이다. 내가 불행하게 된 뒤에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니, 만일 사설(邪說)이 있게 되면, 원컨대 제공들이 애호하고 부지(扶持)하기 바란다. 감히 이를 부탁한다였다.


    광해군의 즉위에 따라 인목대비는 선조가 남긴 2통의 유언장을 광해군과 빈청 대신들에게 알린 것, 선조와 의인왕후의 지밀 궁녀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대응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대응은 표면적으로 광해군의 효심에 호소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광해군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목대비는 선조의 유언장이 갖는 상징적 위력과 빈청의 대신들이 갖는 현실적 영향력을 방패로 광해군을 통제하고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보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인목대비의 대응방법이 진정 광해군을 감동시키고 심복시켰는지 아니면 불신과 적대감을 증폭시켰는지는 미지수였다.



    2막 눈물의 시작 - 정명공주의 파란만장한 세월들

    정명공주, 대비와 국왕 사이에 갇히다

    선조의 3년상이 끝나고 1611년(광해군 3) 10월에 광해군의 세자가 혼인식을 치렀다. 세자빈 박씨는 박자흥의 딸이자 이이첨의 외손녀였다. 이어서 두 달 후에는 영창대군이 대군에 봉작되었다. 대군 봉작 당시 영창대군은 6살, 정명공주는 9살, 인목대비는 28살이었다. 그리고 광해군은 37살, 왕비 유씨는 36살 그리고 세자는 14살이었다.


    영창대군은 봉작되면서 대군에게 지급되는 850결 내외의 토지를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영창대군은 광해군 3년 12월 당시 겨우 6살에 불과했지만 이미 노비 450명, 전답 500여 결에 더하여 제안대군의 유산 그리고 대군 궁방전까지 장악한 거대한 재산가였다. 이 재산은 대군방의 서제소를 통해 관리되었는데, 그 서제소는 인목대비의 친정 즉 김제남의 집에 마련되었다. 이는 영창대군의 재산을 관리한 사람은 사실상 인목대비였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목대비는 자신의 재산은 물론 정명공주의 재산까지 친정아버지에게 맡김으로써 광해군의 불안과 의혹을 더욱 키웠다.


    영창대군의 재산, 철퇴가 되어 돌아오다

    광해군 5년 3월 어느 날, 거금을 지닌 행상인이 조령에서 은자 수백 냥을 빼앗기고 살해당했다. 살인강도들은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여 증거를 없앴다고 생각했지만 실수였다. 극적으로 살아남은 춘상이라는 사람이 몰래 살인강도들의 뒤를 밟아 은신처를 알아낸 후 포도청에 신고했다. 현장을 기습한 포졸들은 혐의자 몇 명을 체포했다. 그 중에 덕남이라는 노비가 있었다. 고문이 두려웠던 그는 매를 맞기 전 아는 대로 자백했다. 그에 따르면 살인강도는 박응서, 서양갑, 정협 등으로 그들은 모두 서인 명문대가의 서자들이었다. 4월 25일 박응서가 체포되었다. 그는 당일로 저희들은 천한 도적이 아니라 은자를 모아 무사들과 결탁한 다음 반역하려 했습니다는 취지의 고변서를 올렸다.


    그날 저녁 광해군은 박응서를 직접 조사했다. 박응서는 자신을 비롯한 서양갑, 정협 등이 서자 차별에 불만을 품어 역모를 꾸몄다고 했다. 서양갑을 우두머리로 하여 장차 군사 300여 명을 모아 대궐을 습격해 옥새를 탈취 후 곧바로 대비전에 나가 수렴청정을 요청하고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 후 서양갑이 영의정이 되는 등 서자들이 권력을 잡으려 음모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4월 28일 체포된 서양갑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지만 역모를 인정하지 않았다. 5월 6일 아침, 심문을 앞둔 서양갑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이날 몇 차례 고문을 받던 그는 갑자기 자백하겠다며 박응서와의 대질을 요구했다. 서양갑은 박응서가 자금을 얻고자 상인을 죽였다고 했지만 그 일은 그가 계획한 것이 아닙니다. 박응서 등은 김 부원군(김제남)의 집에서 은화를 많이 얻은 후 격문을 붙여 소동을 일으키고자 계획했습니다라고 하면서 역모를 제일 먼저 창도(唱導, 인도)한 사람은 바로 김 부원군이며, 역모에 필요한 자금의 공급원 역시 김제남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당일로 김제남은 부원군의 관작을 박탈당하고 체포되었다. 그의 아들 김내도 체포되었다. 5월 6일 당일부터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는 역적의 추대를 받은 영창대군을 법대로 처벌하라 요구했다. 법대로 처벌하라는 것은 죽이라는 의미였다. 아울러 김제남도 법대로 처벌하라 요구했다.


    5월 21일,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폐서인(廢庶人)했다. 영창대군은 대군의 신분에서 평민의 신분이 되었다. 그에 따라 대군의 신분으로 갖고 있던 모든 재산과 의전을 박탈당했다. 이어서 6월 1일, 광해군은 김제남을 사사했다.


    정명공주, 측근궁녀들의 배신에 울다

    본래 유릉저주사건은 1607년(선조 40) 10월 유릉에서 발생했다고 하는 저주사건이다. 1607년 10월 9일 새벽, 잠자리에서 일어난 선조는 방 밖으로 나가려다 기절해 넘어졌고 그 길로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금방 세상을 떠날 것 같던 선조는 이튿날부터 조금씩 병세가 호전되었다. 그렇다고 병세가 완연하게 좋아지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귀신 때문에 선조가 중병에 든 것이라는 소문이 들기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의인왕후와 공빈 김씨의 원혼이 거론될 수 있었다. 의인왕후는 수십 년을 왕비로 있었지만 선조의 따뜻한 사랑 한 번 받지 못하고 아이도 낳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또한 공빈 김씨는 자신이 저주에 걸려 죽게 되었다고 하소연했는데도 선조가 들어주지 않았다. 당연히 두 원혼이 세자 교체를 저지하기 위해 선조를 죽이려 했다는 의심이 나올 수 있었다. 당시 영창대군이 두 살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그때에 선조가 죽는다면 세자 광해군이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창대군방의 측근궁녀들 사이에서는 그런 의심이 노골적으로 돌았다. 그들은 은밀하게 무당을 불러 점도 쳤다. 영창대군방의 측근궁녀들은 의인왕후와 공빈 김씨의 원혼을 몰아내기 위해 굿을 하기로 했다. 당연히 굿은 원혼이 잠들어 있는 곳 즉 의인왕후의 능인 유릉과 공빈 김씨의 무덤에서 해야 했다. 그런데 영창대군방의 측근궁녀들이 이런 일을 진행하자 여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의인왕후의 측근궁녀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경춘이라는 궁녀였다.


    유릉저주사건에서 경춘은 무당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증언했다. 문제는 무당의 이름은 모르지만 유릉의 북쪽 담장 밖에서 분명 저주가 있었다는 증언이었다. 이 증언으로 유릉저주는 사실로 굳어졌고, 저주조사를 명목으로 인목대비의 측근궁녀 30명이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죽었다. 인목대비는 흉악무도한 역적으로 낙인찍혔다.


    정명공주는 11살 때 외할아버지 김제남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후, 계속해서 모후 인목대비전의 측근궁녀들이 대거 죽고 또 동생 영창대군이 끌려 나가는 일들을 겪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중환이라는 궁녀의 배신으로 자신의 보모상궁이 잡혀 나갔다. 정명공주는 중환이 같은 배신자를 미워하는 마음이 깊어졌고 나아가 자신을 못살게 구는 김개시와 광해군에 대한 적대감도 깊어졌다.



    3막 세월의 축적 - 정명공주의 기나긴 인생여정

    영창대군의 죽음, 그리고 광해군과의 대립

    영창대군이 강화도에서 비명횡사하던 1614년(광해군 6) 2월 10일 즈음에 인목대비가 신임할 수 있는 원로상궁은 단 1명뿐이었다. 변 상궁이 그였다. 광해군의 협박 그리고 혹시라도 자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변 상궁은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그렇게 4월이 된 어느 날 인목대비는 꿈에서 영창대군이 저를 보내고 서러워 하시지만 저는 옥황상제를 뵈었답니다 하는 말을 들었다.


    영창대군이 죽은 사실을 알았을 때, 인목대비는 죽어버리겠다고 했지만 실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우선 어린 정명공주가 살아 있었으며 친정어머니 노씨 역시 살아 있었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는 친정아버지의 3년 상이었다. 만약 인목대비가 죽어버린다면 김제남의 3년 상을 지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1614년 11월, 정명공주는 심각한 병에 걸렸다. 마마였다. 조선시대에 마마는 천연두를 달리 부르던 말이었다. 치사율도 높았고 전염성도 강했다. 그러나 천우신조인지 정명공주는 마마 신을 무사히 보냈다. 꼭 살아서 모후 인목대비를 위로해야겠다는 정명공주의 의지가 완쾌 이유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명공주와 인목대비에게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명공주는 서인(庶人)으로 강등되고, 인목대비는 후궁으로 강등되는 치욕이 그것이었다. 그 치욕스런 사건은 정명공주가 16살 되던 1618년(광해군 10) 1월 28일에 일어났다. 문제는 평민이 된 정명공주는 더 이상 대비전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광해군이 사람을 보내 찾을 때마다 인목대비는 공주는 이미 죽었다고 둘러댔다. 이렇게 해서 16살의 정명공주는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었다. 그런 상태로 21살이 될 때까지 5년을 살았다.


    그 5년 동안 정명공주, 인목대비, 대비전 궁녀들의 생활은 곤궁하기 짝이 없었다. 정명공주는 서예 공부에 몰두했다. 서예라는 측면에서 보면, 선조와 인목대비 그리고 정명공주는 색다른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들 3명이 조선왕실을 대표하는 서예가였다는 점이다. 정명공주의 서예 작품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이 화정(華政) 대자(大字)이다. 서예에 문외한인 사람의 눈에도 화정 대자에서는 힘과 기세를 펄펄 느낀다.


    그 당시 정명공주 역시 사경도 하고 또 붓글씨 연습도 하며 뛰어난 서예가로 성장했다. 그러면서 정명공주는 인목대비의 지극한 모정을 느끼기도 하고 부처님의 자비심을 느끼기도 했다. 부왕 선조의 마음으로 모후 인목대비를 위로하려는 마음 그리고 10년 가까운 역경의 세월에서 정명공주는 강인한 생명력과 뛰어난 붓글씨에 더하여 자비심과 지혜, 용기까지 배웠음이 분명하다.


    정명공주, 뒤늦은 혼인이 성사되다

    인조반정은 1623년(광해군 15) 3월 12일 한밤중에 거사되어 성공했다. 반정 결과 광해군은 폐위되었고, 인목대비는 서궁에서 풀려나 대비로 복귀했다. 평등으로 강등되었던 영창대군과 정명공주 역시 대군과 공주로 복귀했다. 이 결과 관에 몰수되었던 공주의 재산 역시 환급되었다.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인목대비의 친정어머니 노씨 역시 신원되었다.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과 친정 오빠, 친정 동생들 또한 신원되었고 관에 몰수되었던 김제남의 재산과 집 즉 명례 본궁 역시 환급되었다.


    친정 문제가 대략 마무리되자 인목대비는 정명공주의 혼인을 서둘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정명공주는 이미 21살이었다. 당시로서는 노처녀 중의 노처녀였다. 정명공주의 혼인 역시 간택, 궁방 마련, 유교식 혼례 절차 등에 따라 거행되었다. 이중에서 시작은 부마 간택이었다.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사흘 후인 3월 16일에 예조에서는 정명공주의 부마간책을 속히 거행하자는 요청을 하였다. 인조가 허락함으로써 공주의 혼인이 본격화되었다. 9월 26일에 홍주원이 공주의 부마로 최종 선발되었다. 정명공주와 홍주원의 혼례는 12월 11일에 거행되었다. 혼례 당시 홍주원은 18살로 정명공주보다 3살이나 연하였다. 영안위(永安尉)에 책봉된 홍주원은 노론 명문가인 풍산 홍씨 출신이었다.  


    인조는 정명공주의 신혼살림집을 안국동에 마련해주었다. 안국동은 창덕궁과 경복궁 사이에 있으므로 입권하기에 편했다. 인조는 정명공주가 자주자주 인목대비를 찾아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정명공주의 안국동 살림집은 궁궐처럼 거대하고 으리으리했다. 본래 조선시대 공주의 살림집은 50칸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되었는데, 인조는 100칸 이상으로 확장했다. 인조는 정명공주의 출합을 맞이해 살림집 이외에도 수많은 살림살이와 재산을 주었다. 10년간 고난을 겪었다는 사실, 그리고 21살이나 되었다는 사실에 더하여 인목대비의 유일한 공주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인조는 자신의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도 또 자신의 효심을 선전하기 위해서라도 규정 이상의 살림살이와 재산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정명공주는 비록 안국동의 신혼집으로 나갔지만 인목대비를 만나기 위해 수시로 입궁했다. 정명공주와 인목대비는 비록 떨어져 살았지만 그 유대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 유대감은 단순한 모녀의 관계를 넘었다. 지난 10년간의 혹독한 고난이 둘 사이를 그렇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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