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도서 요약 

우리가 몰랐던 우리 역사

저   자
송성표
출판사
학민사
출판일
2013년 12월
서   재







  • 이 책은 고구려·신라·백제의 삼국시대부터 대한민국까지 국호에 얽힌 사건들을 알아가며, 2천 년 동안 조작되고 숨겨진 진정한 우리 역사 DNA를 찾아 긴 여정을 떠나는 책이다. 저자는 거침없는 표현으로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단호한 자세를 보이며, 우리나라 역사만 조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친 중국과 일본에 대해서도 상세히 서술하여 독자의 이해를 높이고 있다.



    우리가 몰랐던 우리 역사


    황제의 탄생

    황제와 왕

    고대 동아시아에서 경찰국가를 자칭하고 그 역할을 하는 절대군주에 대해서는 그 칭호에 차이가 있었다. 황제와 왕의 구분이다. 황제가 탄생하기 이전 고대 동아시아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절대군주의 칭호는 갑골문자에서도 보듯 왕(王)이라 불렀다. 한자 王은 (하늘, 상제)의 뜻을 (지상, 인간)에게 │(전달)하는 ─(전달자)로서 곧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중원 땅에서 왕이라는 칭호는 기원전 16세기 상나라 탕왕(湯王)이 최초였다. 상나라에 이어 고대국가의 통치철학체계를 정립한 주나라가 탄생하는데, 주나라 역시 절대군주를 왕이라 하였다. 세월이 흘러 주나라가 차츰 쇠약해지자 중원에는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등장하여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며 세력을 다투는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초기에는 제후들이 주나라 왕을 존중하여 왕을 칭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초(楚), 오(吳), 월(越)나라가 왕이라 부르며 세를 과시하자 이어 각 지역의 제후들도 왕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주나라 중심의 봉건제가 붕괴되기 시작했고, 왕의 가치가 폭락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221년 진(秦), 한(漢), 조(趙), 위(魏), 초(楚), 연(燕), 제(齊) 7개국이 서로 싸운 끝에 진나라 제31대 왕 영정(瀛政)이 통일제국을 만들었다. 이에 정승 왕관이 가치가 폭락된 왕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황제라는 칭호를 건의하자 영정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이 황제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하니 시황제(始皇帝)로 부르라 명했다. 진시황제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하여 진시황제는 황제 칭호를 최초로 사용한 진나라의 절대군주라는 의미에서 진-시-황제 또는 진-시황제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르다.


    진나라 영정에 의한 황제는, 그 이전 천하의 주재자인 왕에서 우주만물의 주재자로 승격하게 되었다. 황제는 지난날의 왕마저 자기 권능에 흡수시켜 버려 2천여 년 중원의 역사에서 그 존재에 버금 갈 대상이 없었던 절대지존이 되었다. 이른바 전제, 독재군주의 모든 기능을 총망라하는 주재자였다. 황제는 우주만물을 주재하는 초월적 존재인 하늘(상제)의 뜻을 받들어 천하를 잘 다스려야 했고, 다분히 종교적인 성향이 농후했지만 이러한 사명을 자랑삼아 천자라고 일컫기도 했다.


    황제라는 칭호는 진나라를 이은 한나라도 사용했고, 청나라 때까지 중원 지역을 장악했던 나라들이 어김없이 썼다. 기원전 221년 처음 등장한 이후 청나라까지 2130여 년간 500여 명의 황제가 등장했다. 한편 왕은 황제 밑에 있는 지위로 제후국의 군주나, 황제의 일족, 공신에게 하사하는 칭호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은 황제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의미가 부가되었다.



    견제와 경쟁, 역동의 삼국시대

    팍스 코리아나 고구려

    고구려라는 국호의 뜻을 살펴보면 구려는 고을과 구릉이라는 땅에서 비롯됐고, 여기에 크다, 높다, 신성하다를 뜻하는 高자를 붙인 것이다. 지리적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은 고대 사신사상에서 북현무라 하여 생명의 시작과 끝을 의미하는 가장 높은 곳이다. 그래서 고구려는 하늘과 가까이 있는 고귀한 나라, 높고 큰 나라라는 뜻을 가진다.


    고구려는 팍스 코리아나 세계를 구축했다

    고구려 제19대 태왕의 시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을 풀이하면 국강상(능을 조성한 지역 이름)+광개토(국토를 광활하게 넓혔다)+경평안(국경을 평안하게 통치했다-주변국을 굴복시켰다)+호태왕(천자국 극존칭)을 뜻한다. 이 시호에서 광개토태왕은 국경 밖으로 강토를 넓힌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장수이자 군주였음을 알 수 있다.


    태왕은 대고구려의 팍스 코리아나(Pax Koreana) 아래 모든 나라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천하관이다. 태왕은 강력한 군사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문화와 정신세계가 어우러졌을 때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서 고구려는 중원 역사가 말하는 동쪽의 오랑캐가 아니라, 오히려 동아시아가 고구려의 태왕국 천하관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1. 2세기 말 후한이 몰락하기 시작하자 조조의 위나라, 유비의 촉나라, 손권의 오나라 삼국시대로 갈라졌다. 이 시기 위·오·촉 삼국은 대고구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먼저 대고구려와 손을 잡느냐에 따라 그들의 국운이 좌우됐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태왕 10년(236년 2월) 기록을 보면 고구려는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낸 일이 있었다. 이것은 위나라가 고구려와 국교를 맺기 위하여 사신을 수차례 파견, 환심을 사려고 했던 것에 대한 고구려의 답신이었다. 그리고 오나라 왕 곤권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말 수천 필을 고구려에 굴복하고 가져가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중원 삼국이 피 터지는 싸움을 벌이는 가운데 고구려가 이들을 놓고 꽃놀이패를 즐겼다는 것을 말해준다.


    2. 491년 12월 장수태왕이 붕어하자 북위 효문제가 흰 위모관과 베 심의(深衣)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식을 거행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제후국이었던 조선은 중원 황제국의 경조사는 반드시 황제국의 행사와 같게 해야 했다. 그것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였다. 하지만 황제국은 오랑캐 나라 일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천하를 발 아래 두었다는 효문제가 장수태왕이 붕어하자 제단을 설치하고 예식을 치렀다는 것은 고구려의 천하관 아래 북위가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효문제는 고구려 태왕족 문소황후 고씨를 비롯하여 이중 삼중의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는 북위가 고구려의 천하관에 들어오기 위하여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단적으로 말해주는 증거이다.


    『삼국사기』는 조작됐다

    일본의 황국사관학자들과 우익세력은 『일본서기』를 정사(正史)로 굳게 믿고 그들의 바이블 최정점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과 세계의 많은 학자들은 『일본서기』를 "고대 일본 왕가는 물론 일본의 뿌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지우기 위해 황당무계하게 조작, 변조된 역사의 표본"이라고 말한다. 또 "역사서가 아니라 삼류 소설을 읽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는 온전한가. 『조선왕조실록』은 반드시 당해 왕의 사후에 편찬되었으며, 임금은 어떠한 경우에도 당대 기록을 열람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록을 편찬하는 사관들은 독립성과 비밀성을 보장받아 사소한 내용까지도 왜곡 없이 그대로 기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은 공정성과 객관성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하지만 『삼국사기』와 『고려사』는 뒤에 들어 선 승자가 그들의 입장과 역사관으로 편찬했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김부식은 후대에 논란이 발생할 수 있음을 예견하고 『삼국사기』를 편찬함에 있어서 "술이부작 이실직서(述而不作) 以實直書)-사실로써 있는 그대로 기록하여 전할 뿐이지, 새롭게 창작하여 만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김부식이 살아온 인생행로와 『삼국사기』 내용을 연관 지어보면 그 스스로 이 원칙을 지키지 않았고, 모화사대사상적 관점과 신라 위주의 조작되고 왜곡된 편찬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부식은 평소 개인사찰을 짓는 등 철저한 불교도였다. 그러나 1116, 17년 연이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면서 유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인생에 반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김부식은 그의 권력을 믿고 불교국 고려 황궁 내에서 신료들을 모아놓고 유교 경전을 강의하는 등 모화사대사상 학풍을 정립하는 데 초석을 놓아 개경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따라서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모화사대사상에 입각하여 기술될 수밖에 없었다.


    『삼국사기』는 1174년 남송에 진상(眞相)되기도 했다. 황제국이라 했던 송나라가 자기들의 체면을 깎아 내리는 내용이 있었다면 『삼국사기』를 진상 받지 않았을 것이다. 송나라로부터 감명을 받았고, 사대를 주장했던 김부식으로서는 이들 나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태왕국 대고구려와 어라하의 나라 대백제를 축소 내지 삭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마지막 김부식의 사론을 보면 "당나라의 천자가 두 번이나 조서를 내려 백제와 신라 사이의 원한을 풀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백제는 겉으로는 순종하는 척 하면서도 안으로는 이를 어겨 대국에 죄를 졌으니, 그들이 패망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대목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모화사대주의와 신라 위주로 편찬하였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삼국사기』라는 국가적으로 엄청나게 중요한 역작을 완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종은 김부식을 황궁으로 불러 들이지 않고 편찬에 참여했다고 기록된 내시를 보내 꽃과 술을 하사한 것 외에는 격려다운 격려를 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대고구려의 정체성을 이어 받은 고려의 입장에서 볼 때 『삼국사기』의 내용이 고려나 고구려의 국격과 떨어져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개인적 역량에 의거, 모화사대사관 관철을 위해 완성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왜와 일본

    왜에서 일본으로

    천황(天皇)은 가짜다

    일본은 절대군주의 칭호를 천황이라고 한다. 천황이라는 뜻은 하늘에 있는 황제 또는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로 해석할 수 있다. 고대 동아시아의 정치질서의 황제와 같은 반열로 볼 수 있으나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황제 그 이상인 것이다.


    천황의 탄생은 6세기 후반 일본열도에 일본이라는 국호가 등장한 시점일 것이다. 천황은 『일본서기』를 조작할 때 중원의 황제를 모방하면서 나온 것이다. 『일본서기』 신공왕후기(神功王后紀, AD 200)에 "동쪽에 신국이 있으니 일본이라 일컫고, 또한 성왕이 있나니 이를 천황이라 일컫는다(東有神國謂日本亦有聖王謂天皇〔동유신국위일본역유성왕위천황〕)"라는 기록이 있고, 기원전 632년 이전부터 일본열도에 천황이 존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황은 일본인들에게 태평양전쟁 패전 이전까지는 구름 위를 존재하는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았다.


    『일본서기』에서 천황을 만세일계로 세계의 유일무이한 황족이라고 조작하고 있지만 천황이라는 칭호는 일본을 제외한 고대 동아시아 어느 나라도 인정하지 않았다.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면 천황이라는 칭호가 조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1.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황제 반열의 나라만이 천문을 연구할 자격이 있었다. 따라서 태왕국인 고구려나 중원국에서는 천문학이 발달하여 문화유산으로 남았지만, 일본열도에서는 그런 증거를 찾기 힘들다. 기토라 고분 천장에서 발견된 천문도는 앞서 이야기 했듯이 평양을 중심으로 그려진 고구려 천문도였다.


    2. 1590년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 온 김성일이 남긴 『해사록』을 보면 "실제로 정치를 담당하고 있는 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며, 천황은 거짓 황제다. …… 천황은 제사만 담당하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임진전쟁 이후 19세기 이전까지 조선통신사의 한결같은 기록은 천황을 본 적이 없으며, 오직 최고 권력자인 쇼군이 이들을 맞이했다고 전한다. 메이지 쿠데타 주도자들은 "막부를 타도하고 왕을 정치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근왕도막(勤王到幕)의 기치를 내세웠다. 이 사실에서도 19세기까지 천황이 정치권력을 장악하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곧 천황은 상징적인 존재, 허수아비였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서기』는 일본이 만세일계라 하면서 조작하고 있지만 정작 고대 동아시아의 정치질서에서 왕가의 최고 권위를 상징했던 태묘와 종묘와 같이 그들의 뿌리를 일관성있게 증명하는 곳이 없다.


    3. 천황은 지금도 허수아비다. 지난 세기 일본은 우리나라와 아시아, 미국과 침략전쟁을 일으켜 인류에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이에 대하여 천황은 한국 대통령을 맞이할 때마다 사죄한다고 했지만, 내각에서 작성한 성명을 읽는 수준에 그쳤다. 천황은 그가 차지하는 무게감으로 인해 자기 생각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비판 받아도 반론할 자유가 없다. 일왕은 국회 소집과 총리 임명이라는 책무가 있지만, 형식상의 권한일 뿐 모든 권한은 내각에 있다.


    따라서 천황이라는 칭호는 백제와 신라, 가야가 왜의 식민지였다는 전제 하에 탄생한 것으로, 주변 어떤 나라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던, 역사 조작의 산무이다. 일본인들이 그들 왕을 천황이라 부른들 그들 입장에서는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얼마 전 우리나라 모 기관에서 일본 국왕을 천황으로 공식화하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상대국의 칭호를 따르는 것이 외교적 예의요, 관행이라는 차원이라고 했다. 하지만 조작된 천황의 깃발 아래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우리로서는 여러 역사적 변수들을 감안하지 않은 결정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들 땅 다케시마라고 주장한다고 그들의 호칭 다케시마를 따르겠다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사대와 조공관계가 아닌 나라 간에는 황이나 제가 아니라 동격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이 외교 관례였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볼 때 우리가 천황이라고 따라 부른다면 백제와 신라, 가야가 왜의 식민지였다는 조작된 역사를 주장하는 일본에 동조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향후 일본의 절대군주는 반드시 일왕이라 불러야 한다.



    대고구려의 후예 고려

    고려는 황제국

    황제국과 제후국의 제도와 사상 등 모든 부문에서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있다. 역사서 기록에도 차이가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황제국에 대한 기록은 본기라 했고, 제후국에 대한 기록은 세가라 했다. 그런데 고려를 창건한 왕건은 태왕국 대고구려를 계승하여 황제국이라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역사를 집대성한 『고려사』는 본기라 하지 않고 세가로 되어있다. 이것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세력들이 쿠데타에 대한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고심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기록들과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고려가 대고구려 태왕국을 이어받은 황제국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1. 『고려사』 악지(樂志)에 실려 조선시대까지 전래된 궁중 연희곡 〈풍입송〉에는 고려의 절대군주를 해동천자라 노래하고 있다. 소위 고려는 천제의 아들 천자가 다스리는 황제국이라는 것이다. 이렇나 사실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고려 태조 왕건의 청동 나신상이다. 이를 보면 왕건은 황제만이 사용했던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있다.


    2. 금나라, 요나라가 수도를 동경, 명나라가 남경, 청나라가 북경이라 했듯이 황제국에서는 수도 이름에 통상 경(京)을 붙인다. 고려도 수도를 개경 또는 황성(皇城)이라 했으며, 황제국에서 채택한 오방위를 도입하여 평양을 서경 혹은 호경, 한양을 남경, 경주를 동경이라 했다. 


    3. 제10대 정종 9년 4월의 기록을 보면 "전국의 남녀가 비단옷에 금실로 용과 봉황 문양 등을 수놓은 의복을 착용하는 것을 금지한다(禁中外男女錦繡銷金龍鳳紋綾羅衣服〔금중외남녀금수소금용봉문능라의복〕)"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고려가 황제국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조차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마음껏 애용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조선이었다면 당장 역모죄로 처단되었을 것이다.


    찬란한 황제국 문화

    세계 최초 금속활자

    과학자들은 금속활자의 발명이 문명발달사에 있어 일대 혁신을 이끈 사건이라고 말한다. 유럽에서는 독일의 쿠텐베르크가 1450년 무렵 금속활자를 개발해 찍은 42행 성서를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유럽의 1급 도서관의 조건은 셰익스피어 전집 초판이나 쿠텐베르크의 42행 성서를 보유하고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정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재불 역사학자 박병선 박사에 의해 고려의 직지가 발견되고, 직지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직지는 1377년에 펴낸 불교 서적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을 줄여서 말하는 것이다. 고려는 유럽보다 100여 년이나 앞서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인류 역사를 한 차원 높이는 데 공헌했다.


    최고의 하이테크 제품, 고려청자

    오늘날에도 도자기를 만들지 못하는 나라들이 무수히 많다. 도자기는 세계 최초로 8세기경 중원에서 완성됐고, 고려는 9세기에 완성했다. 자기가 가지는 내구성과 상품성은 토기와 비교할 수 없다. 자기의 등장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차(茶)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고, 사회 전반에 걸쳐 비약적인 발전과 생활수준을 높였다. 도자기는 오늘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하이테크 제품이었다.

    고려는 자기 중의 자기라 불리는 비취색 자기를 만들었다. 고려자기의 청색은 중국 청자의 푸른색과 구분 짓기 위하여 비색(翡色)이라 한다. 비색은 신의 경지에 오른 도공만이 빚을 수 있는 것이다. 색의 아름다움에 조형미를 더 해진 상감과 진사기법이 당시로서는 얼마나 하이테크였는지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한다.


    미술사가 최순우는 고려청자 비색(翡色)을 "고려인의 근심과 염원과 애환을 섞은 듯한 푸른색, 뽐낼 줄도 깔볼 줄 도 모르는, 그리고 때로는 미소 짓고 때로는 속삭이듯, 때로는 상념에 묻히듯 고독한 색"이라 극찬했다. 일제의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박물관의 고려청자를 보고 나온 사람이면 그 민족에게 칼날을 들이대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고려청자는 신만이 상상할 수 있는 형태로 빚어져 그 아름다움에 숨을 멈추게 한다.



    명나라가 정한 국호 조선

    조선의 국호를 정한 명나라

    조선을 건국한 사람은 화령(함흥)이라는 변방에서 태어난 시골무사 이성계다. 이성계는 고려에 대한 역성 쿠데타를 완결짓고, 1392년 7월(음) 고려의 수도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면서 대외정책의 기조를 사대교린(事大交隣)으로 세웠다. 사대주의는 작은 나라 조선이 큰 나라인 명나라의 제후국임을 자처, 명나라에 조공을 바쳐가며 섬기겠으니 잘 봐달라는 아부 외교정책을 말한다. 교린주의는 여진과 일본에 대한 것으로 동등하게, 또는 여진과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사대를 해야 한다는 정책을 말한다.


    역성 쿠데타를 완결한 이성계는 나라 이름을 정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요동정벌 4불가론에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명)를 칠 수 없다"하여 명나라의 신하가 되고자 애초부터 마음먹었기 때문에 국호조차 스스로 정하지 못하고, 명나라에서 정해주면 무조건 따르겠다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굴욕적인 상황을 야기시켰다.


    이에 대하여 명나라는 처음에는 공식적으로 승인하지 않고 무엇으로 하든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고 유보적인 답변을 했다. 명나라가 이성계에게 고려권지국사라는 칭호를 서도 좋다는 허가는 이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권지국사라는 칭호는 국왕이 아니라 임시로 국사를 돌보는 임금, 일종의 인턴 국왕을 말한다. 이성계와 역성 쿠데타 세력들에게는 대단히 치욕적인 조처였다.


    결국 명나라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함에 따라 조선이 탄생했다. 이때가 1393년 2월 15일(음)이다. 당시 국제적·외교적 관례를 보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1392년 이성계에 의해 건국되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401년 정식 출범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는 태종 1년(1401년 6월)에야 비로소 명나라부터 조선과 조선국왕으로 인정한다는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고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서 황제국과 제후국간의 책봉관계는 황제국이 이를 인정하는 승인서인 고명과 인신이 있어야 그 정당성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고명이란 국왕임을 인정한다는 통보서이고, 인신은 국가 권력을 상징하는, 국가·외교 문서에 찍는 조선국왕이라고 새긴 금으로 된 임금의 도장을 말한다. 명나라에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승인한 1401년 이전까지 외교문서를 보낼 때 이성계의 공식 직함은 고려권지국사였다.



    망국 조선의 몸부림, 대한국

    대한국의 탄생

    19세기 말은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미국, 러시아,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 국가들은 약소국들을 힘의 논리로 제압하고 제국주의로 나아가고 있었다. 일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의 만행으로 명성황후를 잃었던 조선 제26대 고종은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를 구하고자 몸부림쳤다. 독립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염원으로 독립신문과 독립문을 건립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정치·군사·문화 등 총체적 독립을 위하여,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었던 조선에서 독립국 대한(大韓)으로 1897년 10월 12일 옮겨갔다. 그리고 모든 제도를 황제국의 격에 맞게 고쳐 나갔다.


    고종황제가 국호로 한을 선택한 것은 고대 이 땅의 주인이었던 마한, 진한, 변한 한족(韓族)의 나라 얼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또한 삼한을 통합한 고려, 조선을 중원에서는 한족(韓族)의 후예라는 뜻으로 한이라 했던 것도 영향이 있었다. 조선이 고조선의 얼을 이어받았다고 하여 이성계가 조선이라 했고, 왕건이 고구려의 혼을 이어 받았다고 하여 고려라 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한(韓)을 파자해보면 면十+日+十+韋(잘 다듬은 가죽 위)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곧 항상 잘 다듬은 가죽을 옷으로 만들어 입었다는 뜻이다. 이는 유목기마민족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국호를 한으로 정한 것은 중원 역사에서 보듯이 외자는 황제국을 뜻하는 것이며, 여기에 대를 붙인 것은 황제국이자 자주독립국의 격을 더 높이기 위한 일종의 접두사인 것이다.


    따라서 대한이라는 국호의 뜻은 "자주독립국 황제국으로서, 유구한 역사에 널리 평화를 사랑하고 백성들을 이롭게 한 삼한의 혼과 큰 뜻을 이어받은 나라"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민국을 더하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다. 이 국호는 1919년 4월 10일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회의가 열렸을 때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 그리고 공화제를 뜻하는 민국을 덧붙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제안하여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8년 제헌국회에서 이 국호를 계승하여 헌법에 명시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대한제국은 없다

    고종황제가 선포한 국호는 대한(大韓)이며, 이를 줄여 한국이라 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대한제국이라 하고 있다. 고종황제가 선포한 나라는 대한제국이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제국주의가 가지고 있는 뜻은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약소국을 침략하여 지배하려는 정책, 또는 정치·경제·문화·군사적으로 그러한 목적으로 행동하는 사상을 말한다. 그래서 당시 일본을 일본제국주의, 미국을 미제국주의, 영국을 대영제국이라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고종황제가 제국주의로 나아가겠다고 한 기록이 어디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럴 군사적·경제적 힘도 없었다.


    고종황제가 대한을 선포한 것은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로 한반도 침략야욕을 보이자, 조선이 청나라의 제후국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임을 만천하에 선포하여 일본의 야욕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물론 제국이라는 뜻은 대(大)와 같이 자주국이자 황제국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지만, 당시 상황으로는 침략주의의 의미가 더 강하게 작용하는 용어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종황제가 선포한 나라는 침략주의적 의미를 가진 대한제국이 아니라, 오늘날 대한민국과 구분하기 위하여 구한국 또는 대한국으로 해야 옳은 것이다.


    한일합방은 없다

    고종은 일찍부터 일본이 한반도를 침탈할 것이라는 야욕을 알아차리고 독립국임을 내세우기 위하여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이라 고쳐가면서 일제에 맞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22일 국권은 일본으로 넘어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우리역사에서 이를 한일합방이라고 한다.


    을사늑약이 발표되자 1899년 국제법학자 구라치 데쓰키치(倉地鐵吉)는 『만국공법』에서 조약이 유효성을 가지려면 합의가 완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조약 체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폭력, 위협 등이 가해졌을 때는 본인의 의지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조약은 결코 유효하지 않다"고 말했다. 또 1906년 프랑스의 국제법학자 프랑소아 레이(Francis Rey) 교수는 『한국의 국제상황』이라는 저서에서 강압에 따른 조약은 무효라며 "우리들은 망설일 이유도 없이 1905년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한다"라고 결론 내렸다. 이 원칙은 1935년 하버드 법대 국제법 관련 규약에 의해 다시 한 번 확인된 바 있다. 또한 1965년 체택된 조약법에 관한 빈(Wien) 조약 제51조에는 나라의 대표자에 대한 강제결과의 조약은 무효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을사늑약과 한일합방은 일제가 대한국의 황제를 협박하고, 회담장 주위에 무장한 군인들을 배치시켜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상태에서 강압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제법상으로 당연히, 그리고 완전히 무효가 되는 것이다.


    역사는 이때 이루어진 조약의 결과를 한일합방이라고 한다. 조약은 당사자 간에 대등한 입장에서 자유의사로 이루어질 때 유효한 것이다. 그래서 조약의 명칭을 정함에 있어 자국의 이름이 항상 먼저 나온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북한과 정상회담을 추진할 때 남북이 자유의사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의미로 남한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이라 하고, 북한에서는 북남정상회담이라 한다. 만약 두 당사자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남북이니 북남이니 하는 용어 자체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19010년 8월 22일 일제가 총칼로 대신들을 협박하여 체결한 조약은 대한국의 자유의사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일본에서는 일한합방이 존재하는지 몰라도 한반도에서는 한일합방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한일합방이라고 한다면 이는 "한국이 일본에게 합방을 하자고 승인했고, 합의를 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강제로 당했고 결코 동의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용어는 한일합방이라 한다면, 정말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으로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투사들은 순종황제의 명령을 거역하고, 대한국 국민들의 합의를 깬 반역자가 되는 셈이다. 한일합방은 일제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용어이다. 결론적으로 이 땅에는 결코 한일합방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강탈했다는 일한병탄, 또는 경술년에 일어난 치욕적인 사태인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불러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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