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도서 요약 

학원 대신 시애틀, 과외 대신 프라하

저   자
이지영
출판사
서사원
출판일
2022년 05월
서   재







  • 아이들에게 넓은 세상, 폭넓은 경험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 사교육 비용으로, 가족 여행을 택한 작가가 있습니다. 남편, 두 딸과 함께 누빈 미국, 태국, 중국, 프랑스, 체코, 홍콩 여행의 조각들이 어우러진 10년간의 가족 여행기를 만나보세요.



    학원 대신 시애틀, 과외 대신 프라하


    같은 듯 다른 서점

    올림피아 다운타운에는 작은 서점이 몇 개 있었다. 주인의 취향이 그대로 녹아든 독립 서점은 나의 로망이기도 해서 한글 책 하나 없을 서점이지만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가곤 했다. 아이들은 주로 어린이 책 판매대로 가서 팝업북이나 놀잇감 등을 들춰보았다.


    어떤 서점은 밖에서 볼 때는 분명히 작아 보였는데 막상 들어가니 앞뒤로 긴 구조여서 의외로 많은 책이 꽂혀 있기도 했다. 더 깊은 안쪽으로 들어가니 “아!” 작은 탄성을 부르는 아늑한 공간. 다락방 같기도 하고 작은 응접실 같기도 한, 흔들의자와 작은 테이블, 테이블 위 빨간 화분, 바닥에 깔린 초록 러그와 사방을 둘러싼 낮은 책장이 나를 맞이했다. 마치, ‘누구나 와서 읽다 가도 좋아요. 편할 대로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작은 서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교보문고나 영풍문고가 있듯 미국에는 ‘반스앤노블’이 있다. 대형서점답게 질서정연하고 각종 책과 더불어 관련 상품들도 다양해 눈길을 끌었다. 반스앤노블에서의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추억은 바로 스토리텔링 시간이다. 아이들은 매주 목요일 저녁 8시를 기다렸다. 그 시간 어린이 코너에 가면 직원이 쟁반에 음료수를 담아 온다. 어떤 날은 오렌지 주스, 어떤 날은 사과 주스, 매번 다르다. 우리 아이들은 “엄마, 오늘은 뭘 줄까?”하며 갈 때마다 기대감에 들떴다. 책을 읽어주기 전에 아이들의 입을 즐겁게, 기분을 좋게 해줌으로써 스토리텔링 시간을 더욱 즐기게 하는 것이 정말 괜찮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벽에는 커다란 나무 모형이 있고 바닥에는 풀밭을 떠올리게 하는 초록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자원봉사자는 편안한 자세로 걸터앉아 대여섯 권의 책 표지를 먼저 보여준다. 그러고는 옹기종기 앉아 있는 아이들에게 그중 어떤 책을 듣고 싶냐고 물어본다. 대여섯 권을 준비하지만 다 읽어주는 것은 아니고 그중 선택 받은 서너 권을 읽어준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책을 읽어주니 더욱 집중할 수밖에. 아이들 모두 머리를 풀어헤치고 귀여운 잠옷 차림이다.


    애착 인형이나 담요를 꼭 안고 있는 아이도 있었다. 베드타임 스토리 삼아 듣고 돌아가서 바로 자는 모양이었다. 그때 들었던 그림책들을 우리 아이들이 나중에도 보고 또 보고 했던 걸 보면 무척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시간과 장소를 제공한 서점도, 자원봉사자도, 나무 모형과 카펫도 몽땅 훔쳐 오고 싶었다.


    주말을 이용한 포틀랜드 여행에서도 서점 탐방은 이어졌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서점인 파웰 서점이 있다기에 찾아갔는데 수십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미로 같았다. 층고도 어찌나 높은지 점원들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파웰 서점은 새 책과 중고 책을 함께 팔고 있었는데, 예상과 달리 새 책과 중고 책들이 사이좋은 친구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뒤표지에 붙은 가격표를 하나씩 보여주었다. “이렇게 되어 있으면 어떤 점이 좋을까? 너라면 어떤 책을 사겠지?” 아이는 꽤나 상태가 좋은 중고 책을 이리저리 보더니 중고여도 깨끗하다며 새 책을 사지 않아도 되겠다고 했다. 검색대에서 책이 꽂혀 있는 위치를 찾고 그 자리에서 새 책을 살지 중고를 살지, 중고라면 얼마짜리를 살지 결정할 수 있는 게 합리적으로 보였다. 서점 주인의 철학에 감동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신기했던 건 어느 서점을 가도 문제집, 학습지류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처럼 문제집을 푸는 것이 공부라고,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가능한 서점의 모습이 아니었을지. 문제집이 없는 서점. 진짜 서점의 모습 같아 부러웠다. 그래서 더 오래 머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비 오는 날의 시애틀

    시애틀의 겨울비는 우산을 쓰기엔 민망하고 안 쓰기엔 찝찝하다. 곱슬머리인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부슬비다. 거의 날마다 비가 왔지만 우산을 쓰는 사람은 보기 힘들었고 사람들은 주로 후드티나 후드집업을 입고 다녔다. 비가 오니 야외 대신 시애틀 도서관에 가보기로 했다. 내비게이션을 찍고 다다랐을 때 독특한 디자인의 유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정직하게 네모난 점잖은 색의 도서관, 또는 알록달록한 어린이 도서관만 보다가 전혀 도서관 같지 않은 세련된 외관의 도서관을 보니 엄지가 올라갔다.


    평소 책에 관심이 많은 남편에게 도서관을 구경할 기회를 주고 나는 아이들과 어린이실로 향했다. 외국 책 코너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한글 책들이 어찌나 반갑던지, 근 한 달 반 만에 보는 한글 책을 아이들은 잔칫상 받은 배곯은 아이들처럼 꺼내 보고 또 꺼내 보고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얘들아, 여기 도서관 구경 좀 하자. 다른 데도 좀 가보고….” 나의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시간이 넘도록 독서 삼매경에 빠져드는 아이들. “지금 아니면 한글 책 또 못 보잖아. 엄마, 여기 다시 올 거야? 한글 책 많으니까 또 오자!” 물론 다시 올 일은 없을 테니 기다려 주기로 했다. 조그만 소리를 툴툴대기는 했지만.


    자유의 여신상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리버티 섬으로 가기 위해 선착장으로 갔다. 사람도 많은데 가방은 물론 외투, 신발까지 강도 높은 검색을 받느라 꽤 오래 기다려야 했다. 아이들은 이 과정이 이해되지 않을 터였다. 자유의 여신상이 뭘 의미하는지도 몰랐을 테니까 말이다.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의 상징이잖아. 그러니까 보호를 해야겠지? 나쁜 사람들이 폭탄이라도 터뜨리면 안 되니까 이렇게 가방도 검사하고 옷도 보고 그러는 거야.”


    도시 쪽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봤을 때는 그렇게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배가 다가갈수록 점점 어마어마해지는 크기, 섬에 내려서 보면 압도당하는 기분이다. 당시 막 7살이 된 작은 딸에게 물어보았다. “저 여신상 손에 있는 게 뭐 같아?” 아이는 여신상을 자세히 관찰하더니 자못 심각하게 대답했다. “아이스크림하고… 신문!”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아이다운 대답에 혼자 빵 터졌다. 네가 그렇게 대답했었다고 말하면 아이는 피식 웃는다.


    막상 섬 안으로 들어가니 할 게 없었다. 여신상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배를 타기 전부터 벌써 진이 다 빠졌던 건지, 그저 체험하고 노는 게 좋을 나이라 그랬던 건지 아이들이 귀찮아했다. 하… 아이들은 ‘의미’가 있는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내가 아무리 이것은 프랑스에서 미국에 선물로 준 것이고, 너무 커서 머리, 몸통, 팔, 다리가 따로따로 와서 합체한 거라고 열심히 설명을 해줘도 그건 나만의 공부였다.


    아이들은 아이스크림과 신문을 손에 들고 있는 저 시퍼러둥둥한 거인 아줌마가 수없이 많은 영화에 등장하는 걸 보고서야 어딜 다녀왔는지 알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공룡 동상만도 못한 것이 아니었을까? 여행 중에 아이에게 뭘 가르치겠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대화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건 잔소리일 뿐, 여행은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나비 효과

    브로드웨이까지 와서 뮤지컬도 안 보면 어떡하냐고 친구가 말했다. 비싼 만큼의 값어치가 있을까? 아이들이 어린데 제대로 보기는 할까? 선뜻 내키니 않았다. 그러나 친구 덕분에 뉴욕에서의 숙박비가 해결되었고, DVD로 여러 번 보았던 <라이온 킹>이라면 아이들이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브로드웨이, 이름만 들어도 근사하지 않은가. 거리에선 음악이 흘러나오고 멋스럽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리드미컬하게 걸어 다닐 것만 같은 꿈의 거리, 그러나 현실은 노랑 택시들과 무수히 많은 사람들, 번쩍이는 네온사인 간판들로 낭만보다는 복잡함에 가까웠고 길조차 찾기가 쉽지 않았다.


    등장인물이 나오고 배경이 바뀔 때마다 나는 떡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런 기발한 무대장치를 만들 수 있지? 어떻게 저런 의상을 생각해 냈을까? 어떻게 저런 동선을 짤 수 있지? 감탄이 끝나기도 전에 새로운 감동이 치고 올라왔다. 이 엄청난 무대와 음악에 비하면 내가 지불한 티켓값은 하나도 비싼 게 아니었다. 아이들 역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어린이 뮤지컬 말고 이렇게 큰 규모의 뮤지컬은 처음이었으니까 말이다. 돌이켜보면 아이들에게도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된 날이다. 엄마인 내가 변한 날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통해 다양한 경험과 넓은 생각을 갖게 된다. 그래서 아이 혼자 해외연수나 캠프에 보내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가족 전체가 가려면 비용이 부담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라이온 킹> 뮤지컬을 보고 나니 아이 혼자 보내는 것보다 오히려 몇 번 못 가더라도 함께하는 가족 여행이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보고, 겪고, 생각하고, 바뀌어야 세상과 아이를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결국 육아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그날 거기서 뮤지컬을 보지 않았다면 아이들의 오늘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뮤지컬과 콘서트를 그렇게 많이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쓸데없는 데 돈을 쓰냐고, 시간을 낭비하냐고, 그럴 정신이 어디 있냐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변화로 인해 아이들은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게 되었고, 꿈을 꾸게 되었고, 그로 인해 삶의 많은 과정에서 행복했다. 내가 미국 여행을 어렵게 결심하지 않았다면 이후의 여행을 계획하기도 어려웠을 테고, 그랬다면 그 비용은 사교육에 들어갔을 수도, 집을 넓히는 데 썼을 수도, 나이 명품 가방이 되었을 수도 있다. 멀리 가보니, 큰 세상에 가보니, 다른 경험을 해보니 내가 변했다. 경험은 고스란히 나의 양육 가치관과 태도에 영향을 주었다.


    두 아이 모두 공연 문화를 사랑한다.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독립을 이끌어준 것도 공연 문화였다. 혼지 고속버스를 타고, 혼자 밥을 사 먹고, 택배 보내는 법과 은행 이용하는 법 등을 자발적으로 익혔다. 공연을 보기 위해서, 여러 팬층과 어울리기 위해서 해낸 것들이다. 관련 자료나 문학 작품, 배우의 다른 공연 등을 찾아보면서 배경지식을 넓혀갔고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도 관심을 보였다. 조금 더 크니 바람직한 공연 문화에 대해 나름의 생각도 정리하고 한때는 그쪽 계통의 진로를 꿈꾸기도 하면서 여러모로 많이 성장했다. 나는 그게 진짜 공부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이 브로드웨이에서 본 <라이온 킹>이 일으킨 나비 효과다. 그래서 지금 하는 우리의 결정, 경험, 생각들은 작지만 귀하다. 많은 것의 시작, 거대한 변화의 작은 날갯짓이니까.


    우리 임시정부인데 왜?

    상하이 임시정부. 어릴 때부터 많이 들어보았던 장소다. 아이들에게도 역시 생소한 곳은 아니었다.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임시정부 앞에 도착했다. 옆 건물에서 입장권을 사고 상하이 임시정부 유적지 입구로 들어갔다. 아마 한국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뭉클함을 느낀 것이다. 존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 우리 아이들의 존재, 우리 모두는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관람하기에 앞서 절대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는 주의사항을 들었다. “아무리 중국에 있어도 우리 역사의 일부분인데 사진 하나 못 찍게 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대단한 비밀이 숨어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지나간 역사인데 사진기가 보일 때마다 후다닥 달려와 나무라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언짢았다. 직원이 살짝 고개를 돌린 사이 얼른 몇 장 찍었다. 그렇게라도 간직하고 싶었다.


    시간대가 맞으면 한국어로 설명하는 도슨트의 안내를 받을 수 있는데 우리가 갔을 때가 마침 그 시간이었나 보다. “엄마, 한국말 맞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래서 우리는 도슨트의 설명을 포기하고 자유롭게 둘러보기로 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남편이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어 짤막짤막 설명을 해주었고, 임시정부가 상하이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여러 번 옮겨 다녀야 했던 것도 알려주었다. 한 나라의 운명을 바꾸고자 했던 사람들이 머문 곳인데 참 작고 허름하고 소박했다. 아이들이 역사를 다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힘만으로 독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무언가 개운치 않았나 보다.


    “일본이 져서 우리가 독립이 된 거잖아. 그럼 이런 임시정부가 무슨 소용이 있어? 만약 일본이 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임시정부가 있고 독립운동을 했어도 독립이 안 되었을 수도 있었던 건데?” 아이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런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독립운동가들은 당연히 고마운 분들이고 그분들이 노력을 했으니 독립이 되었겠지,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들이 없었어도 우리는 독립했을 거라는 사실이 갑자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이들의 순수한 질문, 질문다운 질문이 마음과 뇌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럴 수도 있지. 독립운동을 했다 해도 우리는 계속 일본의 속국으로 살아야 했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계속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만약 포기하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가 얼떨결에 독립이 되었다고 생각해 봐. 계속 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그나마 독립을 이룬 거 아닐까? 임시정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국민들의 마음가짐에도 영향을 주었을 거 같고,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하잖아.” 내가 그 격변의 시대를 살아낸 사람이 아니라 감히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광복의 날 아마 우리 선대들은 “우리가 이루었다! 해냈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며 경건한 마음으로 둘러보고 나서 임시정부를 나가려는데 방문일이 생일인 사람에게는 기념품을 준다는 안내문을 보게 되었다. 그날은 마침 큰아이의 생일. 여권을 꺼내 확인시켜주자 직원이 작은 상자를 건넸다. 기념 열쇠고리였다. 꼭 필요한 물건도 아니고 예쁘지도 않았다. 아이가 실망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어떻게 내 생일 딱 맞춰서 여길 왔지? 너무 신기하다!” 라며 환하게 웃었다. 열쇠고리를 보고 또 보았다. 선물보다는 우연한 행운에 더 초점을 맞추는 큰아이의 모습이 예뻤다.


    지금까지 아이들과 함께 많은 영화를 봤는데 그중에서 일제강점기나 독립운동에 관한 영화들도 꽤 된다. 처음엔 우리 부부의 추천이 많았고 나중에는 아이들이 권한 것들도 있다. <암살>, <모던보이>, <귀향>, <박열>, <군함도>, <말모이>, <아이 캔 스피크>, <허스토리>, <덕혜옹주>, <동주> 등 많은 영화를 보면서 상하이 임시정부를 둘러볼 때 미처 하지 못했던 말, 생각지 못했던 대화들을 나눌 수 있었다. 그 대화 끝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 문장이 있다. “나,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열쇠고리 받았는데….” 그러면 또 고구마 줄기 딸려 나오듯 상하이 여행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태양의 제국>과 함께

    상하이에 가기 전 다 같이 영화 <태양의 제국>을 보았다. 태평양 전쟁 때 상하이에서 포로가 된 영국 소년의 이야기다. 중국인 하인의 시중을 받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소년 제이미는 일본군 침략으로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 부모를 잃고 포로수용소로 가게 된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 제이비가 혹독한 현실에 타협하고 적응해가는 내용이 펼쳐진다. 와이탄 거리를 걸으며 자연스럽게 <태양의 제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쯤에서 제이미가 엄마를 잃었을지도 몰라.” “영국의 지배를 받을 때 지었던 건물이라 다 서구식이지? 다른 곳과 느낌이 다르네.” 영화의 배경은 아주 오래전이지만 그대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지금도 은행, 보험사 같은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성 이그나티우스 성당 역시 평범한 성당이지만 소년 제이미가 미성으로 성가를 불렀던 장소라 하니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동방명주 건물에 있는 역사박물관에서는 아편에 절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영화 이야기가 이어졌다. “중국이 무역에서 이득을 보니까 영국이 아편을 팔기 시작한 거야. 아편은 마약이잖아. 그러니까 한번 시작하면 끊기 어렵고, 중독된 사람들은 더 사려고 하겠지? 마약을 하면 정신을 못 차리니까 일도 제대로 못 하고, 건강도 나빠지고. 그때 아편을 하던 사람들이 이런 모습이었대. 몽롱해 보이지? 이렇게 국민들이 아편에 정신을 못 차리니까 중국에서 아편을 다 태웠대. 그래서 영국이 전쟁을 일으켰지.” “그럼 영국이 나쁜 건가?” “유럽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누가 더 많이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드나 하던 때였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어?” “중국이 졌어. 그래서 저렇게 많은 건물이 지어지고 <태양의 제국>에 나오는 제이미도 여기서 살 수 있었던 거지. 제이미가 중국인 하인들 막 대하는 거 봤지? 엄청 버릇없이 굴었잖아.”


    아이는 중국에도 우리처럼 아픈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영화를 보거나 관련 지역에 가서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은 귀를 기울이곤 한다. 아마도 나눈 이야기들을 세세히 기억하긴 어렵겠지만 ‘감정을 가지고 들었으니 나중에 공부할 때도 어렴풋하게 그 감정이 떠오르지 않을까?’,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들어맞았다. “엄마, 나는 역사 배우는 게 너무 재미있거든. 수업 시간도  재미있고, 공부할 때도 재미있고.” 그러나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그 뒷말이었다. “근데 이상하게 시험을 못 봐.” 재미와 성적이 일치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럴 수 없다면 좋은 성적을 받는 것보다 재미와 관심으로 알아보고 제대로 된 역사관을 갖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괜찮아. 엄마는 역사 점수 높은 것보다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갖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게 진짜 역사 공부지.” 아이의 팔짱을 끼며 다정하게 말했다.


    다시 여행 시작

    짐 부치고 찾는 것도 번거롭고 아이들도 각자의 짐을 들 정도의 나이가 되었으니 이번에는 1인 1가방으로 모두 기내에 들고 타기로 했다. 덕분에 셀프 체크인 기계로 수속도 빨리 끝났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갈아탄 작은 비행기는 이륙 후 갑자기 관광버스로 변했다. 이 자리, 저 자리에서 어르신들이 슬금슬금 일어나더니 노래를 부르고 몸을 흔들며 건배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이 우스워 더 보고 싶었지만 한국 시간으로 새벽이라 그랬는지 겨우 1시간 비행에 기절하듯 잠이 들어 버렸다.


    프라하 공항에 도착해서는 예약해 둔 공항 픽업 택시 기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네 명이 여행 가방을 끌고 프라하의 돌길을 걸어갈 생각을 하니 다른 교통수단은 곤란할 것 같았는데 SUV 택시로 호텔 앞까지 아주 편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돌아다니는 것이 체력적으로 무리라는 걸 파리에서 경험한 뒤였기에 이번 숙소는 무엇보다 위치가 중요했다. 별이 많이 달리지 않아도 되고 작은 곳이어도 괜찮으니 중심지에 숙소를 잡자고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1차로 구경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2시간 정도 쉬다가 다시 나가 저녁까지 먹고 들어오는 전략을 썼다. 침대에 누워 쉬는 중간 휴식 시간 덕분에 전반적으로 여행의 만족도가 높았다.


    마지막 날은 평화롭게

    마지막 날이 되니 다시 첫날로 돌아가고 싶었다. 문을 연 곳은 없을 테지만 시간이 아까워 아침 9시도 안 되었는데 아이들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프란츠 카프카 박물관 앞이었다. 아이들에게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줄거리를 들려주니 “그게 뭐야? 무슨 내용이 그래?” 라며 인상을 썼다. 즐거운 내용도, 쉬운 내용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설명하기에 참으로 난감한 소설이긴 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진짜 재미있는 건 박물관 마당에 있었다. 가운데 연못을 향해 소변을 보고 있는 실물 크기의 남자 동상 두 개가 마주 보고 서 있는 것이었다. 민망하게도 동상들의 엉덩이가 좌우로 왔다 갔다하고 성기가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시선은 그만 갈 곳을 잃었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들의 눈에는 작품성보다 선정성이 우선인 모양이었다. 알고보니 그 동상은 설치미술가로 유명한 데이비드 체르니의 작품이었다. 카를교 아래 공원에서도 그의 작품을 더 볼 수 있는데 그중 기어 다니는 아기 동상들 역시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민망한 엽기적인 거대 동상이었다.


    언제까지나 아이들이 원하는 곳만, 아이들에게만 맞춰서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아빠가 원하는 곳에도 가보는 것이 공평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남편은 안 그래도 전부 안 좋아할 것 같아 망설였다며 발렌슈타인 궁전을 가보고 싶다 했다.


    엇! 이 신비함은 뭐지? 아이들조차 입이 떨 벌이지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인공 벽이었다. 인위적으로 석회를 흘려서 만든 것이라는데, 동굴에서나 볼 수 있는 꿀렁꿀렁한 무늬에 송송 뚫린 구멍들. 그 속에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사람의 얼굴과 동물의 형상을 찾을 수 있었다. 매직아이를 볼 때처럼 집중해서 쳐다보면 ‘사람 얼굴 같다’ 하는 순간 소름 돋게 입체감 있는 얼굴이 나타난다. 기괴하기까지 했다. 남편에게 이곳을 추천해줘서 고맙다고 했고 아이들 역시 사람 얼굴 찾기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며 아빠의 안목을 인정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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