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도서 요약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저   자
오강남·성해영
출판사
북성재
출판일
2011년 05월
서   재







  •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종교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미래의 종교는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지 모색하고, 우리 종교가 나아갈 길을 찾아보고자 한 책. 『예수는 없다』의 오강남 교수와 소장 종교학자 성해영 교수의 유쾌한 대담집이다. 저자들은 인간의 영성, 나아가 인간성의 근본에 대한 성찰을 통해 시대의 갈등과 불화를 넘어서는 통합적인 종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세속적인 세계관과 종교적 세계관, 나아가 종교적 세계관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건설적으로 통합하고자 했다. 이 책을 통해 종교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미래의 종교는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지, 우리 종교가 나아갈 길을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심층종교란 무엇인가

    심층 종교로 가는 길

    진정한 종교를 찾아서

    오강남 종교에 대한 정의는 수백 가지지만, 종교에 대한 정의로 가장 많이 활용되는 것은 루돌프 오토와 폴 틸리히의 정의입니다. 오토는 종교를 한마디로 엄청나며, 동시에 매혹적인 신비(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의 체험이라고 말합니다. 폴 틸리히의 경우, 종교를 궁극관심(ultimate concern) 이라고 했어요. 무엇이든지 궁극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 종교라고 볼 수 있다는 거지요. 인간에게는 돈, 명예, 성(性), 시간 지키는 것, 건강 등과 같은 것도 그럴 수 있고,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나 신념체계와 같은 것이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우도 있을 터인데, 이런 것들도 종교라 부를 수 있다는 뜻이지요. 결국 죽음, 삶, 신과 같은 가장 궁극적이며 실재적인 것에 대한 궁극관심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종교라는 뜻입니다.


    성해영 요아힘 바흐(Johachim Bach)라는 종교학자는 『비교종교학』이라는 책에서 종교를 네 가지 차원, 즉 체험적 차원, 교리적 차원, 제도적 차원, 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하기도 합니다. 바흐는 이런 식으로 현실 생활에서 발견되는 종교의 다양한 차원을 강조했지요. 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같은 학자는 바흐와는 조금 다르게 물질적인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관계가 종교의 핵심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unseen world)가 종교에 불가결하다는 것이지요. 제임스의 종교 정의에 입각하면 우리가 공산주의, 유물론, 실증적 세계관 등에 아무리 헌신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사고 체계가 곧 종교라고 보기는 힘들겠지요.


    오강남 종교를 논의하면서 우리가 꼭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은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궁극적으로 체험이라는 점입니다. 성 박사가 요아힘 바흐의 종교의 네 가지 차원을 이야기했지요. 제가 좀더 부연하자면 바흐 같은 종교학자는 종교를 이야기할 때 종교적 체험을 중심에 둡니다. 바흐가 말하는 종교적 체험의 특성 네 가지는 첫째, 그것이 궁극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한 체험이라는 것, 둘째, 그것이 지 · 정 · 의(知情意)를 포함하는 인간의 전존재와 관련된 체험이라는 것, 셋째, 인간의 다른 어떤 체험보다도 강력하고, 포괄적이고, 역동적 체험이라는 것, 넷째, 행동을 불러오는 체험이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심층종교 역시 종교체험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체험이다

    성해영 체험 얘기가 나왔으니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윌리엄 제임스인데요. 그는 신비체험의 네 가지 특징을 제시한 걸로도 유명합니다. 첫째 불가형언성 곧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앎의 특성입니다. 세 번째 특성은 수동성입니다. 신비체험이란 본인이 의도한다고 해서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일시성입니다. 즉 변형된 인간 의식상태의 하나인 신비적 합일은 일시적인 상태이지 끝없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오강남 제임스의 신비체험 정의와 관련해 몇 가지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우선 일시성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파스칼 같은 사람은 자신의 체험이 일어났던 정확한 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죽고 난 후 외투 속에서 발견된 쪽지에서 그가 남긴 신비체험의 기록을 보면 "10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기쁨의 눈물…아멘"이라는 식으로 감격에 겨운 증언을 남기고 있지요. 그 점에서 파스칼은 대표적인 신비주의자입니다. 그리고 제임스의 불가형언성을 보다 쉽게 표현하자면 신비체험의 내용을 인간의 언어로 온전하게 나타낼 수 없다는 겁니다. 즉 절대적인 것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는 거지요. 수동성은 인간인 우리가 수도(修道)를 한다, 수행(修行)을 한다 하면서 신비체험이 오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준비를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왔을 경우 그것이 너무나 엄청난 것이기에 도저히 우리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 여겨지지 않고 그저 주어진 것이라 생각된다는 점입니다. 앎의 특성은 불교의 정(定)과 혜(慧)에서 혜를 뜻하는 것으로, 깨달음을 통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을 말하고, 일시성은 아까 논의된 대로 이 체험이 잠시의 일이라는 겁니다.


    성해영 오강남 선생님 말씀은 결국 종교라는 게 깨달음이라는 체험과 분리될 수 없고, 나아가 신비주의라는 개념은 이러한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체험, 다른 말로 신비적 합일(mystical union)에 기반한다고 요약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깨달음 체험에 뿌리를 둔 종교를 지칭하는 보다 간결한 표현이 바로 심층종교이겠지요


    심층종교와 신비주의 

    신비주의는 마술이 아니다

    오강남 신비주의(mysticism), 그러면 오해가 많아요. 그래서 저는 지금처럼 심층종교, 표층종교라는 표현을 더 즐겨 씁니다. 종교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열린 종교와 닫힌 종교로 말이죠. 열린 종교는 심층종교이고 닫힌 종교는 표층종교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요. 일반적으로 신비주의라고 하면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 일쑤입니다. 신비주의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모호하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호함을 피하기 위해 독일어에서는 신비주의와 관련해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합니다. 부정적인 뜻으로서의 신비주의를 Mystismus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영매, 유체이탈, 점성술, 마술, 천리안과 같은 초자연현상이나 그리스도교 부흥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열광적 흥분, 신유 체험 등을 지칭합니다. 이런 일에 관심을 보이거나 거기에 관여하는 사람을 Mystizist라 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종교의 가장 깊은 면,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한 종교적 체험을 목표로 하는 신비주의를 Mystik라 하고 이와 관계되거나 이런 일을 경험하는 사람을 Mystiker로 구분하고 있지요.


    신비주의의 대가들

    오강남 가장 유명한 기독교 신비주의자를 꼽으라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대표적일 겁니다. 에크하르트는 그 당시까지의 신비사상을 모두 통합하고 그 이후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지요. 51세가 되던 해부터 파리, 스트라스부르그, 쾰른 등지에서 가르치면서 훌륭한 설교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쾰른의 대주교로부터 이단적 가르침을 전한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종교재판의 최후판결을 받기 2년 전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최후판결은 그의 사상의 28가지 조항 중 17개는 이단으로, 나머지도 이단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개탄스러운 것이라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에크하르트는 그의 변론에서 "나는 오류를 범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나는 이단일 수 없다. 전자는 지력(智力)에 속하는 것이고, 후자는 의지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르치는 것은 발가벗은 진리뿐이라고 강조했지요.


    성해영 에크하르트와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그가 신성(神性, Godhead)과 신(God)의 개념을 구분했다는 사실일 겁니다. 신비적 하나 됨의 상태에서 경험하게 되는 완전한 신의 초월성과 자족성을 신성의 개념으로, 그 이전 단계에서 불가피하게 등장하는 관계의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측면을 신으로 개념화했지요.


    오강남 기독교 전통, 특히 가톨릭에서 더 언급하고 싶은 인물은 토머스 머튼입니다. 머튼은 20세기 미국의 사상가 중에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호방한 시인이자 깊은 영성의 종교인이었으며, 반전평화운동과 사회정의 구현에 적극적이었고 선불교와 장사 사상에 심취했던 영성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해영 머튼이 동양 종교, 특히 선불교에 많은 애착을 가졌다는 점도 언급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점에서 머튼은 종교적 보편주의자였습니다. 그는 틱낫한 스님, 쿠마라스와미, 스즈키 다이세츠 등 동양의 저명한 인물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했습니다. 머튼은 이 과정에서 명상과 신비체험과 같은 것들이 동서양 종교를 배출한 인류 보편의 기반이라고 보았습니다.



    심층종교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

    여러 종교의 신비주의 

    신비주의는 어디에나 있다

    성해영 동서양의 모든 종교에는 신비주의적 흐름이 있습니다. 동양 종교에서는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동일성(identity)을 강조하는 신비주의 전통이 활발했던 반면에, 유일신 전통이 강한 서양 종교에서는 신비주의적 흐름이 종교사의 주류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만, 서양 종교에서는 표층과 심층 간의 갈등이 보다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깨침을 강조하던 영지주의 전통이 초기 교회사에서 이단으로 매도되어 탄압되는 바람에 신비주의 전통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그 뒤를 이은 서로마 기독교에서도 신비주의적 영성은 성공적으로 제도화되지 못했습니다. 반면 위 디오니소스의 영향을 크게 받은 동방정교회 전통에서 신비주의 전통은 보다 활발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이슬람교의 경우도 표층종교가 다수를 이루고 있지만 수피즘이라고 하는 독특한 신비주의적 전통이 명맥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서방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교의 주류로 자리 잡지는 못했습니다. 유대교 신부주의에는 대표적으로 카발리즘이 있었고, 근대로 들어와서는 보다 민중적인 성격을 띤 하시디즘이라는 신비주의적 전통으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동서양의 신비주의

    성해영 동양이 궁극적 실재와의 동일성을 보다 분명하게 강조하는 데 반해, 서양 종교사에서는 비록 신비적 합일체험이 가능하지만, 신과 인간이 어떻게 다르고, 이 관계가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됩니다. 동서양 종교사에서 신비적 합일(mystical unity)과 신비적 동일성(mystical identity)이라는 두 차원이 긴장 관계로 나타난 적이 많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나친 일반화는 곤란하겠지만, 조금 더 쉽게 얘기해 보자면 동양 전통은 신비주의적 동일성을 강조하는 흐름인 데 반해, 서양은 신비주의적 합일을 더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보통은 표층이 다수고 심층이 소수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예수기도나 염불선 같은 수행 전통들은 표층이 곧바로 심층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런 수행법들은 심층종교가 지니기 쉬운 엘리트주의를 보완하고 견제하려는 움직임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또 소수에게만 가능한 지성적 완성을 사랑과 같은 정서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보완하려는 시도이기도 하구요. 물론 이런 대중적인 수행법들은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이며 지성적인 정화라는 면에서는 약점을 지니기도 합니다. 또 사회적으로 왜곡되거나 악용될 위험성도 다분하구요.


    오강남 신비주의 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문제가 동서양의 신비주의 혹은 신비체험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겁니다. 라다크리슈난, 올더스 헉슬리, 휴스턴 스미스 같은 사람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같다고 봅니다. 다른 한편 스티븐 카츠와 같은 학자는 신비주의자들이 800만 명이면 그 800만 명이 체험의 측면에서 각각 다 다르다고 봅니다. 이처럼 각 종교 전통에서 말하는 신비체험의 동일성 여부도 쉽게 결론지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한국의 심층종교 

    대안종교로서의 동학

    성해영 제가 우선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요, 우리나라에서도 하나 됨을 강조하는 종교 전통이 있었습니다. 또 우리는 샤머니즘,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 전통들이 서로 활발하게 영향을 주고받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동학(東學)은 유불선(濡佛仙)뿐만 아니라 당시의 서학(西學)이라고 불리던 기독교의 영향도 흡수해 대단히 통합적인 세계관을 만들어냈지요. 신비주의적 종교 전통이 개인의 깨달음만을 강조해 사회적 측면을 도외시할 가능성이 큰 데 비해, 동학은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겠다는 현실 참여적인 경향도 강합니다. 요컨대 한울님의 뜻이 구현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현세 지향적 의지와 더불어, 모든 인간의 내면에서 한울님을 각자가 발견해야 한다는 신비주의적 성향 역시 명확합니다.


    오강남 언제 어떤 잡지사의 주선으로 한신대 김경재 교수님하고 대담하게 되었는데 김 교수님 자신은 기독교인이지만 한국 사람들의 종교성에 가장 맞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이 동학이 아닐까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해영 동학은 인간과 궁극적 실재 사이에 존재하는 동일성과 상대성이라는 두 축을 아주 잘 결합하고 있습니다. 인내천(人乃天)과 같은 인간이 곧 한울님이라는 동일성 주장과 더불어 한울님을 내면 깊숙이 모시고 공경할 것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니 말이죠. 또 여기에다 다른 사람들을 한울님으로 존중하라는 가르침을 함께 펴고 있으니, 동서양 종교의 좋은 점을 고루 잘 갖추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더욱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초월하거나 벗어나는 것만이 개인적 수행의 목표로 여겨지기 쉬운 상황에서, 이 아픈 현실을 바꾸어 모두가 함께 존중받는 곳으로 바꾸려 노력했으니, 참으로 보기 드문 영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에서의 심층종교

    성해영 우리의 심층종교 전통이나 혹은 종교인들을 찾아보면 대표적으로 개신교의 이용도 목사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용도 목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분이었습니다. 이분은 자신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신비주의를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폐결핵으로 서른세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점 역시 그 분이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았는지를 증언하는 것 같습니다. 짧은 삶이었지만 열정적으로 살았고, 이 분 때문에 한국 개신교 내에 신비주의가 그나마 뿌리를 내리게 된 것 같습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부흥회가 저렇게 열광적이고 흥에 겨운 모습을 가지게 된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친 분이기도 하구요. 물론 열광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여전히 교회 안팎에 있는 게 사실입니다만, 신비주의의 불가결한 요소인 엑스터시(ecstasy)적 경향성이 우리 실정에 맞게 부흥회라는 계기를 통해 발전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부작용도 있을 수 있지만, 소통과 해소라는 차원에서는 긍정성이 있다고 봅니다.


    오강남 참된 영성이라면 인습적인 윤리를 초월할 수도 있지만, 윤리에 결코 반하지는 않습니다. 인터넷으로 최근 일부 기독교의 부흥회를 보면 귀신 쫓아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신도들이 데굴데굴 바닥에 구르고 하는데, 그런 모습들은 의식의 변화에 수반되는 부작용 중의 하나이지, 심층종교로 가는 모습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바람직한 종교는 궁극적으로는 이성을 초월하는 것인데 상당수 부흥회는 아예 이성을 마비시키는 경우가 많아요. 자기를 잃어버리는 경험 자체는 기쁨을 주는 것이지만,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마비시키는 종교경험은 맹신에서 자칫 광신과 미신으로도 갈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종교는 어떤 모습인가

    영성과 지성의 통합 

    열정과 이성 사이

    성해영 부흥회 얘기를 하면서 종교적 열정이 이성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걸 언급하셨는데요. 이 문제는 종교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종교적 열정과 이성의 관계라고 할까요. 혹은 지성과 종교적 감성의 관계, 아니면 지성과 신앙의 관계로 정리될 수도 있을 것 같구요.


    오강남 언제나 하는 이야기지만 신앙과 지성이 일치하지는 않아요. 신앙은 지성을 넘어서는 것이지 지성에 반하거나 못 미치는 것은 아니에요. 신앙은 라틴어로 꽁트라 라시오(contra ratio), 즉 반지성적인 것이 아니라, 수프라 라시오(supra ratio), 즉 지성을 초월한 그 무엇이지요. 지성이 끝까지 가면 지성 스스로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즉 지성이 갈 수 있는 최고점에서 그 한계를 깨닫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지성을 사용해 보지도 않고, 혹은 아예 지성을 포기한 상태에서 영성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착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영성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성해영 선생님이 지적하신 대로 전-이성적인 단계를 초-이성적 단계와 혼동해 지성이나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게 곧 신앙이자 영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고 봅니다. 이 얘기를 또 지성과 감정의 차원에 적용해 보면요, 표층에서 심층으로 깊어질 때 종교적인 열정과 같은 감정적인 측면이 지성에 의해서 보완되고 균형 잡혀야지 더 깊은 신앙으로 발전해 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지성을 말 그대로 인간에게 주어진 앎을 가능케 하는 힘이라고 본다면, 그 힘은 단순히 논리적이고 추론적인 이성적인 것뿐만 아니라, 직관적이고 신비적인 것들을 함께 아우르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또 교(敎)와 선(禪)이 일견 갈등하는 것 같지만, 많은 고승들이 궁극적으로는 교선일치를 강조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심층종교에서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오강남 종교에서 구원이라는 문제를 빠뜨릴 수 없지요. 표층적 차원에서 구원이라고 한다면 대부분 지금의 내가 이 세상에서도 잘되고 다음 세상에서도 잘되는 걸 의미합니다. 지금의 나를 강조하는 것이지요. 심층종교에서는 지금의 나, 즉 몸나, 제나 혹은 일상적인 나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됩니다. 이기적인 감정이라든지 편협한 생각들을 벗어나 참나, 얼나, 큰나라고 표현되는 새로운 나 또는 진정한 나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구원이라는 표현을 안 써도 이런 가르침이야말로 종교가 궁극적으로 가야 하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도 깨쳐서 내 속에 있는 불성을 알게 되어 더 이상 육도를 옮겨 다니지 않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봅니다. 말 그대로 깨달은 자, 즉 부처가 되기 때문이죠. 심층적 기독교 역시 우리 영혼이 하느님과 같이 되는 걸 목표로 삼습니다. 하느님이 죽지 않듯이 나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심층 기독교의 구원이죠.


    그런데 표층적 기독교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에서 보이듯이 지옥을 피하고 천당에서 잘사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믿어주는 대가로 육신적인 나, 몸나가 지금 잘살 뿐만 아니라, 나중에 천국에 가서도 영원토록 더 잘살겠다는 것 아니겠어요? 내 속의 신과 신의 불멸성을 아는 질적으로 바뀐 삶이 아니라 양적으로, 시간적으로 길게 늘어난 삶을 바라는 것입니다.


    성해영 달리 표현하자면 분리된 것들이 온전함과 전체성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심층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일 것 같습니다. 또 구원이란 이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체험을 통해 신과 자신의 참된 본성을 알게 되는 사건이겠지요.


    천국과 지옥

    성해영 천국과 지옥의 얘기를 심층종교의 차원에서 살펴본다면, 마치 지옥과 같이 고통 받고 있는 현실을 우리 모두가 노력해 더 나은 곳, 곧 지상천국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는 의미일 것 같습니다. 이 점에서 모든 사람들이 존중받는 개벽된 세상을 꿈꾸었던 동학은 이 대담이 다루고 있는 심층종교의 특성을 가장 분명한 형태로 보여주고 있는 한 가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한 가지는 정말로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웃사랑이라는 대의에 지나치게 매달려, 자칫 타인의 자율성을 무시한 채 종교적 가르침을 전달할 수 있다는 점 말이죠.


    오강남 그 얘기는 곧 전도(傳道), 즉 도를 전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전도를 이웃사랑의 발로라고 말할 수는 있는데, 자기 입에 맞는 음식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해선 곤란합니다. 좋은 음식을 권할 수는 있지만 강요하는 것은 안 되겠지요.


    죽음은 마침표가 아닌 쉼표다

    오강남 심층종교의 차원에서 보면 죽음은 근원으로 돌아가 다시 거기서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 저 역시 조사(弔辭)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단지 쉼표라고요. 하지만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 아직 저도 결론은 보류중입니다.


    성해영 죽음은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심층종교는 탄생, 삶, 죽음을 하나의 통합적인 과정으로 바라봅니다. 표층적 차원의 종교는 인간이 태어나기 전은 도무지 알 수가 없고, 죽음 이후에는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서 그걸로 끝이라고 주장합니다. 근원적인 단절이 있지요. 그러나 심층종교는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과 태어난 후 그리고 죽은 이후라는 세 단계를 서로 연결해 이른바 커다란 원과 같은 순환주기를 상정합니다. 죽음은 이 커다란 원에서 탄생과 더불어 큰 원을 완성하는 불가결한 연결고리가 됩니다.


    오강남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하느님을 정말로 믿는다면 문자적 의미의 천국 지옥이란 없다고 선언해야 된다고 봅니다. 만인구원설을 주장한 노위치의 줄리안 같은 사람에 의하면 죄란 필요한 것이라 합니다. 죄란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고, 이렇게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일은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의 역할이 중요함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또 절대적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 노를 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하느님이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도 있을 수 없다고 했지요. 용서라는 말은 뭔가 옳지 못한 일을 했을 때 사용하는 말인데, 죄는 옳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성숙해 가는 데 겪어야 할 학습 과정의 일부라는 거에요.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완전한 것으로 보시면서, 인간의 영혼이 성숙해지므로 더 이상 죄악의 방해를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날이 올 것을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절대적 사랑의 하느님이 지옥 같은 것을 마련했을 수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하느님을 진정 확고하게 받아들인다면 천국 지옥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해영 만약 천국이 우리의 내면에서 발견된다면, 우리가 죽음 이후에 천국과 지옥에 갈 것인가를 두고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질 겁니다. 각자가 자신의 내면에서 천국을 발견하고, 체험으로 알게 된 천국의 기쁨을 타인과 함께 지금 이곳에서 구현하려 노력한다면, 죽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는 저절로 사라지지 않을까 싶거든요. 그게 바로 심층종교의 진정한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되면 두려움과 공포에 뿌리 내린 종교가 아닌, 희망과 기쁨 속에서 커가는 종교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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