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도서 요약 

바이오그래피 매거진 ISSUE. 6: 고은

저   자
스리체어스 편집부
출판사
스리체어스
출판일
2015년 10월
서   재







  • 한 호에 한 인물을 소개하는 격월간지 『바이오그래피 매거진(Biography Magazine)』. 광고가 없고 양장본으로만 발행하는 잡지로, 전권에 걸쳐 명사의 삶과 철학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흥미로운 인물 이야기와 감성적인 그래픽이 어우러져 쉽게 읽을 수 있다. 타인의 삶에 우리를 비추어 본다. 사람을 배우고 세상을 배운다.



    바이오그래피 매거진 ISSUE. 6: 고은


    PREFACE 

    언어 예술의 정점에는 시가 있다. 수려한 산문은 시에 가깝고, 청아한 시는 산문에서 멀다. 그런가 하면 현실 참여의 정점에는 산문이 있다.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에 따르면 예술의 현실 참여는 문학에 국한되고 특히 산문에 한정된다. 그의 주장은 이러하다. 산문가는 독자를 인도할 수 있다. 메시지를 전달해 현실을 깨우치고 분노를 자아내고 행동을 독려한다. 반면 화가나 음악가는 특정한 상황을 보여 주거나 들려줄 뿐이다. 행동 강령이 되기에는 구체성이 부족하다. 시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심지어 사르트르는 "사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대학생 친구가 한 명만 있었으면 좋겠다." 이 간단한 문장은 발화자에 따라 사뭇 다른 의미를 지닌다. 서울시 종로구에 거주하는 평범한 젊은이가 저 말을 한다면 산문체로 인식된다. 발화자에게 대학생 친구가 없다는 사실만을 암시한다. 그러나 평화시장의 노동자 전태일이 같은 말을 한다면 벼락처럼 들린다. 전태일이 뱉은 A라는 말은 사실의 진술에 불과하지만 듣는 이에게 A 이상의, 곧 B라는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그는 시인이다.


    이번 호에서는 고은 시인을 만났다. 1958년에 등단한 그는 이제까지 150여 권의 저서를 간행했다. 우리 현대 문학사에 유례없는 다산성의 시인이다. 노벨 문학상에 이름이 오르내린 지 벌써 10년. 그는 한국의 시인이자 아시아의 시인이고 세계의 시인이다. 거리에서 만난 누군가 내게 반문했다. "애송하는 시도 몇 편 없는데 국민 시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 이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덧붙였다.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후광 효과는 아닐까."


    모든 인간은 개별적이다. 같은 사건을 경험해도 같은 감상을 가질 수 없다. 유일무이한 시인의 개인적 체험을 타인에게 완벽히 재생하는 일 따위는 애초 불가능하다. 다만 근접을 허락할 뿐이다. 쓰지 않음을 씀으로 타인을 가까이 불러들이려면 시적 문맥이 탁월한 시를 쓰거나, 시인의 삶이 시여야 한다.


    고은 시인의 시를 읽는다. 주머니에 넣었다가 틈날 때마다 꺼내 보고 싶은 시가 있다. 한번 훝어보고 마는 시도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알고 나면 주머니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고은은 시인이다. 그리고 시다.



    WORKS 

    1958년 고은은 《현대문학》 등에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승려 시절 《불교신문》을 창간하고 편집인 겸 주필을 지냈다. 환속 이후 허무와 탐미에 천착했으나 전태일의 죽음을 계기로 사회 참여에 나섰다. 연작시 《만인보》, 서사시 《백두산》, 《고은 전집》 등 150여 권의 저서를 펴냈다. 고은의 주요 활동과 저작물을 소개한다.


    불교신문 1960

    1957년 고은(법명 일초)은 조계종 총무원장에 추대된 스승 효봉 스님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1958년 효봉 스님은 종정에 취임하고 청담 스님이 총무원장이 되었다. 고은은 종단에 눈과 귀가 있어야 한다고 청담 스님을 설득해 1960년 《대한불교》를 창간했다. 오늘날 《불교신문》의 전신이다. 고은은 편집인 겸 주필을 맡았다. 한국일보 문화부장 신석초 시인에게 신문 편집과 제작 상식을 배워 4면짜리 창간호를 발행했다. 인력이 부족해 편집과 논설, 교정까지 혼자 했다. 편집 여백을 메우기 위해 자작시를 싣기도 했다. 이때부터 조금씩 필명을 알렸다.


    피안감성 1960

    1958년 여름 고은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인이 되어 있었다. 1957년 도반(道伴)의 병(炳)을 소재로 <폐결핵>이란 시를 썼는데, 그 친구가 한국시인협회 기관지 《현대시》에 투고하면서 조지훈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나온다. 그리고 그해 10월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당시 등단을 하려면 기성 문인에게 3회 추천을 받아야 하는데 통상 1~2년이 걸렸다. 그런데 미당 서정주가 고은의 시를 보더니 세 편을 《현대문학》에 단번에 추천했다. 1960년 고은은 첫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을 편낸다. 탐미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세계를 형상화했다. 1962년 고은은 환속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974

    1974년 11월 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결성되었다. 박태순, 백낙청, 신경림, 염무웅, 이문구, 이호철, 조태일, 황석영 등이 참여했다. 대표 간사를 맡은 고은은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문학인 101인 선언을 낭독했다. 첫마디는 이러했다. "오늘날 우리 현실은 민족사적으로 일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고은은 유신 정권의 긴급 조치와 언론인 대량 해직 사태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선언 직후 고은을 비롯한 문인 30여 명은 긴급 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민족문학작가회의를 거쳐 2007년 한국작가회의로 이름을 바꾸었다.


    겨레말큰사전 남북 공동 편찬위원회 2005

    2005년 한반도 분단 이후 최초로 한국어 공도 사전 편찬을 위해 겨레말 큰사전 남북 공동 편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고은은 상임위원장에 취임했다. 반세기 넘게 갈라져 있어 너무나 달라진 남북 언어의 틈을 좁히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시도였다. 우리나라의 표준국어대사전과 북한의 조선말큰사전에서 공통된 단어와 어문 규범은 그대로 반영하고, 상이한 말들은 남북 토론을 거쳐 정하기로 했다. 고은은 말했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빼앗긴 우리말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2005년 8월 15일, 우리는 갈라진 겨레를 하나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BIOGRAPHY 

    군산 시내의 전원다방은 예술인들의 집결지였다. 고은도 단골로 드나들었다. <솔베이지의 노래>를 매번 신청해 손님들이 솔베이지라 불렀다. 그 다방에서 친척 어른을 만났다. 군산북중학교 이사장 겸 교장이던 그는 고은에게 국어와 미술을 가르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중학교 4학년 중퇴 학력으로 중학교 교사가 되라니. 한동안 멍멍했다. 그길로 고은은 군복을 벗었다. 친구의 헌 양복과 와이셔츠를 입었다. 헐렁했다.


    학생들과 나이가 비슷해 단번에 학급을 휘어잡을 수는 없었다. 대신 철저히 준비하고 가르쳤다. 미술 시간엔 산에 올라 야외 수업을 하고, 국어 시간엔 시를 낭송했다. 변사 경험이 도움이 되었는지 학생들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숙직실에서 자취하며 시를 다시 습작했다. 문학에 대한 열망이 살아났다. 시를 쓰고 이름을 적었다. 고은태의 태를 떼어냈다.


    전쟁의 상처는 쉬이 아물지 않았다. 숱한 죽음이 떠올라 생이 허무했다. 그러다 군산 시내에 대사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에 해박한 혜초라는 행각승이었다. 혜초를 심방해 몇 마디 나누었다. 그리고 머리를 깎았다. 자석에 못이 달라붙듯 선뜻 출가했다. 1952년 고은은 승려가 되었다. 20세였다.


    불가의 깨달음은 말과 글에 있지 않다지만 승려 고은은 한동안 글을 버리지 않았다. 목련 송기원의 권유로 토요 동인회에 가입했다. 1955년 토요 동인회는 가람 이병기, 신석정, 김수영을 초청해 문학 강연회를 열었다. 그때 김수영을 처음 만났다. 김수영은 고은의 시에 격찬했다. 이런 와중에 혜초가 고은을 나무랐다. 고은이 내는 소리도 많고 듣는 소리도 많다는 것이었다. 고은은 충격을 받았다. 인간의 소리, 세상의 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청산가리를 양쪽 귀에 집어넣었다. 왼쪽 고막이 녹았다.


    혜초와 고은은 전국을 누비며 길 위에서 선(禪)을 수련했다. 혜초는 "이제부터 네가 내 스승"이라며 고은과 절을 주고받았다. 둘은 사제라기보다 도반에 가까웠다. 그러다 혜초는 여자가 생겨 환속한다. 혜초와의 이별로 고은의 내면은 다시 황폐해졌다. 약국을 하던 친구의 집에서 극약 다섯 알을 삼키고 자살을 감행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실패한다. 기척 없는 고은을 수상히 여긴 친구 어머니가 방 안을 들여다본 것이다. 깨어나니 응급실이었다.


    1958년 여름 선승(禪僧) 고은은 부지불식간에 시승(詩僧)이 되었다. 결핵을 앓던 친구를 소재로 <폐결핵>이란 시를 썼는데, 시골 병원에 내려가 요양하던 친구가 막 발족한 한국시인협회 기관지 《현대시》 창간호에 투고한 것이다. 조지훈의 천거로 게재되었다.


    가을이 왔다. 어느 날 문학 애호가인 교통부 국장이 고은을 내방했다. 선학원 별당에 있는 고은의 방에서 그의 시 몇 편을 보더니 놀라서 물었다. "누가 쓴 것입니까?"


    고은은 심상히 답했다. "빈칸이나 메우려고 써 본 것입니다." 국장은 더욱 감탄했다. "스님이 이런 시를 쓰시다니! 과연 심산(深山)에서 사신 분이라 시도 깊습니다."


    그러고는 서둘러 방을 나갔다. 며칠 뒤 다시 오더니 다짜고짜 고은을 어디론가 데려갔다. 전차를 타고 마포 공덕동에 내렸다. 좁은 골목을 따라 한참 걸었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갔다. 옥양목 바지저고리를 입은 남자가 보였다. 미당 서정주였다. 국장은 서정주에게 고은의 시 몇 편을 건넸다. 서정주는 바로 읽었다. 잠시 뒤 입을 열었다. "이것 한꺼번에 추천해야겠소."


    그해 11월 고은의 시 세 편 <봄밤의 말씀>, <천은사운(泉隱寺韻)>, <눈길>이 《현대문학》을 통해 발표된다. 당시는 3회 추천을 받아야 등단할 수 있었다. 통상 1~2년이 걸렸다. 그런데 고은은 예외적으로 단번에 3회 추천을 받았다. 《현대문학》 주간 조연현은 앞으로 한 번에 3회 추천을 하는 일은 없다고 못 박았다. 고은의 나이 26세였다.


    60년대 고은의 초기 시는 허무주의적, 탐미주의적 색채가 짙다. 현실 도피와 죽음에의 집착도 엿보인다. 무상(無常), 소멸 같은 불교의 무위적 세계관도 녹아 있다. 한 평론가는 그의 초기 시를 두고 "스스로를 의미 없는 세계에 의미 없이 던져진 존재로 파악하고 삶의 존재론적 고뇌를 표현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고은의 허무주의는 당시 유행하던 서구 실존주의나 동양 노장사상과는 무관하다. 전쟁 체험에서 비롯된 자생적 허무주의다.


    70년대 후반 고은은 거리의 시인이었다. 문단과 재야, 노동 현장 어디에도 고은이 있었다. 70년대 고은의 시는 허무와 탐미를 벗어나 혁명가 투쟁을 노래했다. 비유와 상징은 줄었고 산문화 경향을 띠었다. 그러다 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시적 상징과 투쟁 의지를 공히 성취한 저항시를 발표한다. 1978년 발표한 <화살>이 대표적이다.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 온몸으로 가자 / 허공 뚫고 / 온몸으로 가자 /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 박혀서 /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1980년 서울의 봄이 왔다. 그러나 신군부의 등장으로 서울의 봄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언로도 얼어붙었다. 문예지들은 강제 폐간이나 정간을 당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민중의 최전선에서 저항 문학을 실천하기 위해 기관지를 만들기로 했다. 고은, 박태순, 이문구 등이 자본을 각출했다. 하지만 등록 허가제인 정기 간행물은 발간할 수 없었다. 방법을 궁리하다 독일에서 잡지(Magazine)와 책(Book)을 합성한 무크(Mook)라는 부정기 간행물이 나온다는 말을 들었다. 고은은 바로 이거다 싶었다.


    출간 형식을 무크로 정하고 창간을 서둘렀지만 YH사태로 구속되면서 일정이 연기되었다. 10‧26사태 이후 출감하면서 다시 창간 작업에 착수했다. 그렇게 해서 1980년 4월 《실천문학》이 세상에 나왔다. 창간호의 주제는 역사에 던지는 목소리였다. 표지는 도발적인 주황색이었다.


    계엄 사령부의 검열로 창간호는 많은 내용이 삭제되었다. 본문이 잘려 나간 자리에 박스형 광고가 박혀 있었다. 고은은 창간을 주도했지만 창간사도 쓸 수 없었다. 고은이란 이름이 금지되던 시절이었다. 대신 무단(無丹)이란 가명을 썼다. 붉은 춤을 의미한다. 무단이란 이름으로 창간호에 실은 <벽시(壁時)>는 이렇게 끝맺는다.


    "오오 두근거림으로 그리움으로 오랜 세월 흘긴 눈 원한으로 / 우리가 모든 거짓과 깡패 쫓아낸 자리에 / 아픔의 시여 아픔으로 읽는 시여 진리의 울음이여 / 어떤 신놈도 어떤 우상놈도 지우지 못하는 민중의 시가 되자 / 시인이여 마지막 진실이여 / 오오 어이할 수 없이 열렬한 향기의 인내인 밤이 가면 새벽인 담벼락이여"


    2005년 10월 13일 오후 8시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경기도 안성 고은의 자택 앞에 모인 100여 명의 취재진과 주민들이 일제히 탄식했다. 스웨덴 한림원의 선택은 영국 극작가 해럴드 핀터였다.


    고은은 그해 노벨 문학상의 유력한 수상 후보자였다. 국민적 관심이 대단했다. 《고은 전집》을 펴낸 출판사는 고은의 영어 홈페이지를 만들었고, 외국 언론사에 제공할 고은의 영문 소재 자료를 준비했다.


    2002년부터 고은은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군에 이름을 올렸다. 2005년부터는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다. 해마다 10월이면 고은의 집 앞은 인파로 가득하다. 방송국 중계 차량이 집을 에워싸고 주민들이 몰려와 발표를 기다린다. 집 주변엔 수상을 기원하는 현수막이 내걸린다. 특히 2010년엔 통계적으로 볼 때 유럽이 아닌 지역의 시인이 수상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면서 그 어느 때보다 수상 기대를 높였다. 그해 노벨 문학상은 페루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에게 돌아갔다.


    2000년대 이후 한국 문학의 해외 번역이 크게 늘었다. 그때부터 고은도 해외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그의 시와 소설은 세계 27개 국어로 소개되었다. 유럽에선 특히 그의 선시에 열광했다. 해외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스웨덴 시카다상, 노르웨이 뵨슨 문학 훈장, 캐나다 그리핀 문학상, 미국 아메리카 어워드, 마케도니아 황금화관상 등 해외 문학상을 두루 수상했다. 특히 마케도니아의 스트루가 국제시축제가 수여하는 문학상인 황금화관상은 역대 수상자의 다수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에 쏟아지는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고은은 말한다. "지난 10년간 늘 내 뒤통수에 노벨 문학상이란 말이 들러붙어 있었어요. 외국에 나가도 그럽니다. 한때는 신경 쓰였지만 이제 그냥 놓아두죠. 난데없이 잠자리가 내 어깨에 앉을 때가 있잖아요. 그게 오래 있나요. 제풀에 날아가지. 상에 대한 얘기들은 그런 겁니다."


    고은은 오늘도 시를 쓴다. 처녀시다. 그가 쓰는 시는 언제나 태초의 시다. 문단에 나온 1958년 이래 늘 그러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RUMOR 

    1960년대 고은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전국 각지에 가짜 고은이 출몰했다. 지방을 돌며 진짜 대신 백일장 심사를 보고 결혼도 두 번 했다. 마침내 가짜와 진짜가 서울에서 마주 앉았다.


    가짜는 하나인지 둘인지 알 수 없었다. 영남 지방에서 목격된 자는 고은보다 키가 크다 했고, 서울 문단에 알려진 자는 고은보다 작다 했다. 일단 최소 두 명이었다. 가짜의 존재는 고은에게 불명예는 물론이거니와 가짜 노릇으로 자기 존재를 포기하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실존적인 불쾌감이기도 했다. 처음엔 웃어넘길 수 있는 장난으로 치부했으나 피해를 입은 쪽의 고백이 계속되자 차츰 그것이 사악한 범죄임을 깨달았다. 흑백텔레비전도 귀한 시절이었다. 신문에 난 흐릿한 동판 사진만으로 얼굴을 알아보는 이도 드물었다. 지방에 연락할 일이 있으면 전보를 치던 때의 일이다. 가짜의 존재가 즉각 들통 나기는 쉽지 않았다.


    김천

    경상북도 김천시에는 고은과 절친한 시인이자 화가인 홍성문이 있었다. 히필 그가 집을 비운 사이 가짜가 나타났다. 가짜는 백일장 한시부와 한글시부 심사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한시의 음악적 가락인 평측(平仄)에 대한 상식도 없는 그가 제멋대로 등급을 매겨 장원을 냈다. 홍성문은 뒤늦게 고은에게 전화해 "김천까지 왔으면서 나도 안 보고 심사만 하고 가긴가?"라며 힐책했다. 가짜는 경주에서 열린 백일장 심사도 맡았다. 능란하게 심사 소감을 발표하고 심사비와 여비까지 받아 챙겨 유유히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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