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청 도서요약
   국내도서 요약 

현대사 인물들의 재구성

저   자
고지훈(그림 : 고경일)
출판사
앨피
출판일
2005년 12월







  • 테마와 인물을 통해 한국현대사를 살펴보는 <현대사 인물들의 재구성>. 젊은 만화가 고경일과 오소독스 역사학자 고지훈의 만남을 통해, 현대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승만부터 전두환까지, 현대사 속의 인물들을 몇 개의 테마로 분류하여 살펴본다. 이 책은 역사연구의 새로운 방향과 변화한 캐리커처 장르의 특성을 결합시킨 새로운 역사서이다. 책의 곳곳에 담긴 캐리커처는 대상에 대한 사실적 접근에서 벗어나 그 인물의 시대적 역할이나 삶의 '스토리'를 담고 있으며, 이 스토리는 '사실'을 넘어 새로운 조합과 배치를 통해 역사를 재구성한다. 그리고 이렇게 재구성된 역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주목하지 않았던 또 다른 '진실'을 밝히고 있다.



    현대사 인물들의 재구성


    절대권력의 맞수되기


    ‘이승만호’ 승선자들의 최후, 비명횡사
    김구, 신익희, 조봉암, 조병옥, 이 네 사람의 공통점은? 초딩용 문제 같지만 답은 ‘모두 죽었다’이다. 여기에 한 가지 답을 더하면 이들은 한때 특정 인물과 동지적 관계에서 적으로 돌아선 경험을 갖고 있다. 마지막 답을 추가하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들은 모두 ‘갑작스럽게’ 죽었다. ‘아니 왜? 누가 죽였어?’라는 의문이 생기겠지만 접어두도록 하자. 아직은 그 답을 찾지 못했으니까. 애석한 일이다. 어쨌든 이들은 한때 이승만의 심복이거나 동지였다가 정적이 되었으며, 결국에는 모두 비명횡사했다.


    저돌적 반항아 김구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프린스’와 ‘평민’

    이승만과 김구는 여러 면에서 대조된다. 이승만은 곁가지 중에도 한참 곁가지이긴 하지만 그래도 전주 이씨 왕족의 피를 물려받았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프린스’라 자칭하고 다녔다. 이씨 왕가 족보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던 이승만과 달리, 김구는 백범白凡(백정과 범부)이란 호를 쓰며 누누이 자신이 평민 신분임을 강조했다. 출신 성분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과 지나친 겸손, 이 양극단의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 비슷한 조직에서 감투를 놓고 여러 번 얽히게 되는데, 이때에도 역시나 정반대의 퍼스낼리티를 보여준다.


    이승만이 한국을 미국의 위임통치 아래 두게 해달라고 청원했던 이른바 ‘위임통치사건’(1919)으로 인해 상해임시정부, 곧 임명권자에게 ‘권고사직 통지서’를 받아들었을 때 일이다. 이승만은 임명권자들의 기대와 달리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해고? 누가 날 해임해? 내가 지들을 해고하면 또 몰라도.” 어째, 『삼국지』의 조조 멘트를 패러디한 느낌이다. 어쨌든 이승만은 아랑곳하지 않고 ‘프레지던트’라는 호칭을 계속 달고 다녔다. 해방이 될 때까지 쭉~. 그에 비해 비슷한 시기 임시정부의 ‘국무령(國務領)’을 맡으라는 권고를 받은 김구의 반응은, 임명권자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김구는 “아휴, 저 같은 천출이 어디…….”라며 손사래를 쳤다. 두 사람의 고향은 황해도 해주(김구)와 평산(이승만)으로 그리 멀지 않았지만, 사회적? 심리적? 경제적 거리감은 꽤 컸던 셈이다.


    전과 기록에서도 밀린 철처한 ‘넘버2’
    출신 성분의 격차로 멍든 평민 김구의 가슴은 이승만의 가방끈, 그것도 최고급 악어가죽으로 만든 가방끈으로 피멍이 든다. 멍든 데 또 멍이 들면 아예 점처럼 남아 지워지지도 않는 법. 조지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 프린스턴대학, 지금도 강남의 숱한 학부모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 명문대학들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마치는 데 이승만 딱 5년 하고도 5개월(1905년 2월~1910년 7월)이 걸렸다. 당시 평범한 학생이라면 11년은 족히 걸릴 과정이었는데 말이다. 사실 이승만은 갑오개혁(1894년)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8수를 했었다. 그때 그리 열심히 했으면 장원급제 서너 번은 했을 텐데 …….


    하여간 나이 서른에 대학에 들어갔으니 배전의 노력을 기울였음은 분명하다. 얼마나 급했으면 전명운 ? 장인환의사의 스티븐슨 살해사건 공판 통역을 부탁받고도 “아, 거 참 리포트 쓰느라 바빠 죽갔구만 귀찮게들 구네. 궁시렁 궁시렁…….”하면서 간단히 거절했을까.


    난세에는 전과 한둘쯤 없는 사람이 영웅 축에 끼지 못하는 법. 당연 김구와 이승만도 전과가 있었는데 둘은 여기서도 차이가 난다. 이승만은 1899년 ‘박영효 쿠데타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후 탈옥을 시도했다가 실패하여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한다. 한편 김구는 이보다 2년 앞선 1896년 일본인 장교를 살해하여 수배전단(?)에 이름을 올렸는데, 그 죄목이 ‘살인강도죄’였다. ‘데라우치 암살음모사건(1910년 12월 안명근 등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는 사건)으로 비롯된 ’105인 사건(1911)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을 때에도 김구에게는 강도 혐의가 씌어졌다.


    강도 전과 때문이었을까? 그 죄목만큼이나 둘의 수감 생활도 달았다. 이승만은 동서고금의 양서를 차입하여 감방 안에서 도서관도 운영하고, 수형자들을 모아 독서회도 꾸렸다. 읽기만 하니 답답하여 가끔 <제국신문>에 논설도 썼다. 잡범으로 수십 번 들락거리는 것보다 큰 거 한 방 터뜨려 무기수로 들어앉는 게 그 바닥에서는 더 대접받는 법, 아! 김구, 전과 기록에서도 밀리다니, 이처럼 김구는 이승만과 비교해서 무엇 하나 뛰어날 것 없는 철처한 ‘넘버 2’였다.


    “북으로~” 생애 최초? 최후의 딴지걸기
    세월이 훌쩍 뛰어넘어 25년 후로 가보자. 강산이 두 번 하고도 절반이 바뀐 1945년 11월 23일, 한때 관상쟁이를 지망했던 칠순의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이라는 화려한 감투를 쓰고 서울에 도착했다. 도착 기념 성명도 발표하고 경성라디오 방송도 탔다. 25년간의 고단한 망명 생활 끝이라 단맛이 혀 끝에 착착 달라붙는다. 한데, 이미 한 달 전 서울에 먼저 도착한 왕년의 보스 이승만이 영 거슬린다. ‘다시 만나면 뭐라 불러야 하나? 이 형, 이건 좀 아니고, 이 선배, 라고 하면 또 프린스턴 어쩌고 우드로우 월슨(미국 28대 대통령)선생님이 어쩌고 하면서 거들먹거릴테고, 어쩐다…….’


    도착한 지 사흘이 지나도록 돈암장(이승만의 거처, 이화장)에선 코빼기도 안 비친다. 이승만의 성격상 먼저 찾아올 리는 만무하고, 김구가 문안 가야 할 밖에, 귀국한 지 사흘 만에 돈암장을 찾는 김구의 기분은, 아마 제대한 후에 먼저 제대한 고참한테 놀러가는 기분 아니었을까? 뭐 그래도 그 후 김구와 이승만은 비교적 잘 어울리는 투톱을 이루며 남한의 우파 진영을 이끌었다. 물론 언제나 한 치쯤 높은 단상에 이승만이, 그 아래 김구가 어울려 서는 형국이었다. 의장도 언제나 이승만이 먼저였고, 신문 지상에서도 항상 이승만이 앞자리를 차지했다. 처절한 ‘넘버 2’의 운명은 임시정부 주석이란 명찰로도 극복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과 이를 둘러싼 찬탁 진영과 반탁 진영의 격렬한 대립, 그리고 정부 수립 논의를 위한 미 ?소 공동위원회 개최 등으로 1946년과 1947년 2년의 세월이 정신없이 흘렀다. 그 사이 두 사람의 끈질긴 관계는 서서히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단선? 단정 반대, 김구의 묘비명이 되다
    1947년 11월 13일 유엔총회에서 결정한 ‘한국 총선거 실시안’과, 1948년 2월 26일 “가능한 지역에서만 선거 실시”를 결정한 소총회의 절차적 합법성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국 문제에 관한 한 미국과 소련 양자의 합의 없이 궁극적인 해결을 하지 않겠다는 1945년 ‘모스크바 3상 결정’을 파기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좌익과 북한은 한국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을 ‘3상 결정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이라고 고집했고, 이승만을 비롯한 우파들은 유엔이 최고의 국제기구이므로 유엔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고 맞섰다. 덧붙일 것은 유엔 내에서도 남한만의 총선거가 합법적인지 아닌지를 둘러싸고 논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북한에서도 정부가 수립되어 소비에트 블록의 정식 승인을 속속 받아나가는 상황에서, 유엔총회의 결의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승인받는 것은 이승만 정부에게 반드시 필요한 ‘특효약’이었다. 그러니 남한에서 영향력 있는 김구 같은 우파 정치인이 남한 단독선거가 원인 무효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통령도 면책받지 못한다는 중죄(내란? 외환? 쿠데타 선동)에 해당한다. 내란? 외환에 대한 최고형은 사형이다. 김구는 그 집행이 약 1년쯤 늦춰졌을 뿐이다. 김구는 북한에 다녀온 지 1년쯤 뒤인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처형당한다.



    북으로 간 사람들


    ‘올라운드 재야운동가’ 문익환의 탄생
    문익환은 우리 역사상 원정출산이 가장 많이 행해졌던 시기에 태어났다. 물론 요즘처럼 이중국적 취득 때문이 아니라, ‘무국적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식민지 치하 일본 국민으로 출생신고를 하기 싫어서였단 말이다. 19세기 마지막 순간, 풍전등화의 고국을 등진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난 자그맣고 병악한 아이가 바로 문익환이었다. 조부와 부친이 모두 목사였고, 문익환 역시 일본 신학교로 유학을 가 목사 안수도 받았다. 독립운동의 터전을 일군 조부와 부친 아래에서, 진보신학자이자 문익환보다 앞선 재야원로 김재준목사를 평생의 스승으로 모셨고, 최연소 육참총장과 최장수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의 1년 후배였으며, 민족시인이었던 윤동주와 ‘재야 대통령’ 장준하를 친구로 뒀으니, 어차피 편안히 살기는 글렀다. 그나마 환갑 때까지 이 난장판의 현대사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었던 건, 그의 피난처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품이었기에 가능했을 테다.


    해방 직후 북한을 거쳐 남한으로 피난해 온 문익환은, 1951년 휴전회담 때 유엔군 측 통역을 잠시 맡았던 경험을 제외하면 철저하게 ‘탈속의 삶’을 살았다. 한신대학교 교수와 ‘신? 구교 공동성서 번역’에서 구약 번역위원을 맡는 동안 그는 완벽한 신앙인이었다. 하나 신앙인도 밥은 먹어야 하고, 가끔 신문도 봐야 한다.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1970년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비상구급약’은 뭐니뭐니해도 청심환이 아니었을까 싶다.


    1972년(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한) ‘7?4남북공동선언’부터 시작하여 1975년 장준하 추락사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아니 큼직큼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으니까 말이다. 10월 유신(1972), 김대중 납치사건(1973), 육영수 시해사건(1974), 민청학련사건(1974), 긴급조치 1~9호 발동(1974~1975), 인혁당재건위 재판(1975) 등. 1970년 11월 13일 타오른 “청계천의 불꽃”(전태일 분신)은 이 모든 사건을 예감케 했다. 수유리 한신대 캠퍼스에 조용히 묻혀 있던 문익환에게도 그 불꽃은 선명하게 보였다. 문익환이 재야에 데뷔하게 되는 계기는 10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충격적인 사건들이 연속극처럼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장식하던 바로 그 무렵이었다.


    늦게 맞이한 사춘기, 반미와 통일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는 윤보선? 김대중 등을 비롯한 재야인사 12명의 연서로 장식된 ‘민주구국선언’(소위 ‘3.1구국선언’)이 조용히 발표되었다. 이 선언문을 작성한 사람이 바로 문익환이었다. 시나 끄적이고 히브리어 번역에만 매달리던 문익환이 비로소 ‘발언’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언문에 담긴 내용은 간략했다


    1. 긴급조치를 철폐하고 의회정치 회복과 사법권의 독립을 이룰 것.
    2.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것.
    3.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질 지상의 과업임.


    이 선언과 함께, 이후 여섯 차례에 걸쳐 12년 가까이 반복된 감옥생활이 시작되었다. 1979년 가석방되었다가 신군부의 집권으로 다시 투옥되고, 1985년 전열을 재정비한 재야운동단체 ‘민통련’ 의장에 취임하기까지의 숨가쁜 과정은 후다닥 넘어가자. 긴급조치(유신헌법에 규정돼 있는 헌법적 효력을 가진 특별조치)는 ‘그때 그 사람’과 함께 사장되었고, 경제입국의 구상이나 자세는 보릿고개를 추억담처럼 말하기 시작한 한국인들에게 이제 ‘장기(臟器)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남은 것은? 그렇다. 여전히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독재권력에 대한 저항은 유효했고, 아직 시작도 해보지 못한 통일운동이 과제로 남아 있었다. 문익환이 재야운동에 투신한 1976년부터 방북을 감행하는 1989년 사이, 남한에서는 중요한 ‘흐름’이 진행 중이었다. 바로 ‘반미(反美)’라는 화두였다.


    늦게 맞이한 사춘기는 더 혹독한 법. 여드름도 더 많이 나고, 실존적 고민도 더 치열하다. 1980년대 초반 등장하기 시작한 ‘반미 문제’는, 분단과 맞물리며 가장 비과학적이지만 가장 휘발성이 높았던 ‘통일운동’으로 이어진다.


    원쑤를 끌어안다 : ‘못 말리는’ 뚝심
    1988년 봄, 대학생들의 ‘남북한학생회담투쟁’을 거치며 통일운동은 반독재투쟁과 함께 운동권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남북민간교류 활성화를 포함한 노태우 정권의 7? 7선언(1988)은 통일 문제에 관한 이니셔티브를 민간에게 넘기지 않겠다는 선포였다. 통일 논의를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된 이상, 적어도 주도권만은 놓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 88올림픽으로 다소 느슨해진 이 양 진영의 신경을 빳빳하게 곤두서게 만든 것이 바로 문익환의 방북이었다. 그런데‥‥‥.


    문익환의 방북 사실이 알려진 1987년 3월 말, 남한의 정세는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투쟁이 해를 넘긴 채 100일 이상 진행 중이었고, 이 투쟁의 양상에 따라 ‘민주노조의 전국적 연합조직 결성’으로 발전할 태세였다. 재야와 학생운동권에서는 5공 청산 및 학살자 처단 문제로 새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5공 청문회와 잇단 비리사건으로 수세에 몰렸던 집권세력 역시 손놓고 있지는 않았다. 올림픽이 끝난 직후인 1988년 12월 28일, ‘민생치안확립을 위한 특별지시’라는 엄포를 놓는다. “놀 만큼 놀았지? 이제 형한테 좀 맞아야겠다!” 아무리 그래도 막무가내로 팰 수는 없고 뭔가 건수가 필요했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그럴 즈음 터져나왔다.


    북한에 머무는 동안 문익환은 두 차례 김일성과 회담했다. 한데 처음 김일성과 만나는 자리에서 악수를 청하는 김일성의 손을 뿌리치고 냅다, 덜커덕, 와락 그 큰 덩치를 한 품에 껴안고 말았다. 이는 두고두고 문익환의 ‘대담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회자되었으며, ‘오랫동안 김일성과 내통하지 않고서야‥‥‥.’ 라는 의구심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문 목사의 진짜 비범함은 늦은 나이에도 징역살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심장이나, 김일성 같은 큰 인물(?)과 맞서면서도 기죽지 않는 대담함 같은 데 있지 않다. 초등학생만 되어도 눈치 챌 수 있는 ‘분명한 오류’인데도 종종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 그것을 발견하는 데에서 문 목사는 진가를 발휘했다.


    방북이후 그에게 내려진 ‘찬양고무죄’에 대해 문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통일 통일 하면서도 상대방을 욕하면서 어떻게 통일이 되는가? 아무리 작은 거라도 상대방의 좋은 점을 애써 발견해서 그걸 칭찬해줘야 비로소 가능한 거지. 우린 가능한 고무, 찬양을 해줘야 해. 안 그래 검사양반?” 이 말을 듣고 검사가 웃었다고도 하고, 묵묵히 조서에 받아 적었다고도 한다. 요는 ‘통일과 반북’이 해괴하게 공존하는 통일정책의 비논리성에 대한 ‘초딩적 문제 제기’에 수재 출신 검사님께서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분단이 정말로 골치 아픈 건 이런 거다. 멀쩡한 사람을 ‘병신’ 만드는 거 말이다. 알고 보면 진리는 명쾌하고 간단하며 또 유쾌하기까지 한데 말이다. ‘찬양고무죄’라는 무시무시한 칼을 들이대는 검사에게 “찬양고무, 그거 해야 해!”라고 말하는 문익환의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웃음이 터져나온다. 이 얼마나 유쾌한 문답법인가?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