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청 도서요약
   국내도서 요약 

제왕과 재상

저   자
리정(역자 : 이은희)
출판사
미래의창
출판일
2006년 11월







  • 중국 고대 제왕과 대신 간의 협력관계와 용호상박관계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해 온 저자가 제왕과 재상의 미묘한 관계를 이 책에 담았다. 한신과 유방, 송염과 주원장, 화신과 건륭제, 제갈량과 유선, 소하와 유방, 사마위와 위 명제 등을 비교·대조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권력가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제왕과 재상


    비극은 반복된다
    팽월과 유방 - 황제가 죄인이라면 죄인일 수밖에

    “고대의 황제치고 천하를 천하인의 것이라 생각한 인물은 극히 드물다. 천하통치권을 손에 쥔 황제는 천하에 속한 모든 사물을 자기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자신의 성공에 기여한 양장이나 모신 또한 그의 눈에는 천하를 포획하는 데 이용한 사냥개에 불과했다. 때문에 일단 천하가 태평해지면 사냥개는 잡아먹히는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천하를 평정한 후, 유방은 대대적인 논공행상을 시행했는데 그 중에서도 후방에서 온 힘을 기울인 소하의 공을 으뜸으로 치하했다. 하지만 이에 불복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에 유방이 군신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사냥에 대해 아는가?” “알고 있습니다.” 군신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그렇다면 사냥개도 알고 있는가?” “물론 잘 압니다.” “잘 되었구나. 사냥을 할 때, 사냥개는 전력을 다해 목표물을 포획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하지만 이 또한 반드시 사냥개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대들이 용맹하기 그지없는 사냥개와 같다면, 소하는 바로 사냥개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이다.”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신하를 바라보는 유방의 관점만큼은 짚고 넘어갈 만하다. 유방은 신하를 그저 목표물을 쫓는 사냥개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단지 비유일 뿐이라고는 하지만 분명 황제의 교만이 절로 묻어난 말이다. 결국은 유방 또한 고대의 수많은 지도자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고대의 황제치고 천하를 천하인의 것이라 생각한 인물은 극히 드물다. 유방 또한 천하를 유씨의 것으로 여겼고, 자신을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한 양장들과 모신들은 그저 자신이 이용한 사냥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이미 천하가 태평해진 지금에 와서 사냥개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유방의 사냥개들 또한 잡아먹히는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초와 한이 자웅을 겨룰 때, 팽월이 장기간 초나라에 머물면서 유격전을 벌였다. 때문에 항우는 매번 승리를 눈앞에 두고도 후방이 불안하여 퇴각하기를 되풀이하다가 결국 해하에서 패망하고 말았다. 비록 팽월의 공로가 한신에 못 미친다고는 하나 개국 공신이라 칭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장오와 한신이 잇달아 죽임을 당하자 이에 팽월은 동병상련을 느끼는 한편으로 자신에게도 화가 닥칠 것을 염려하여 매사에 각별히 주의했다.


    진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방은 한단에 이르러 팽월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팽월은 병을 핑계로 자기 대신 부하장수에게 군사를 딸려 보내어 유방을 지원하도록 했다. 이에 대노한 유방은 사자를 보내 팽월을 크게 꾸짖었다. 그러자 당황한 팽월은 몸소 한단으로 가서 사죄하려 했으나 부장이 나서서 그를 만류했다. “대왕이시어, 처음에는 가시지 않다가 이제 와서 가신다면 한신과 같은 일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도모함이 낫다 여겨집니다.” 그러나 팽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제께서 내게 부족함이 없이 대하셨는데, 어찌 반란을 입에 담는가!”


    그즈음 팽월의 부하 중 대죄를 지어 사형선고를 받은 태복 하나가 장안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는 유방에게 팽월이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고발했다. 이에 진평은 유방에게 이렇게 고했다.


    “팽월은 한신의 죽음을 슬퍼해왔으니 모반의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그러나 일의 안전을 기하기 위해 일단 그를 궁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만약 그가 스스럼없이 입궁한다면 모반의 뜻이 없는 것이니 관직을 빼앗아버리면 그만이고, 만약 오지 않는다면 모반이 분명하니 군사를 파견하여 정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군사파견의 명분 또한 분명해집니다.”


    그리하여 유방은 대부 육가를 보내 팽월을 데려오도록 했다. 팽월이 육가를 따라 도읍에 다다랐을 때, 저만치서 성문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호철이 눈에 들어왔다. 놀란 팽월은 황급히 다가가 주위사람들에게 그를 끌어내리도록 명했다. “대부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황망한 일을 당하셨습니까?” 팽월이 묻자 호철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오늘 대왕께서는 위험한 지경에 있는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헌데 대왕께서 지금 성에 들어가시면 필경 위험한 지경에 빠질 텐데, 그땐 아무도 가서 구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한신의 경우를 면하시려거든 부디 발길을 멈추시어 돌아가십시오!” “대부의 말씀은 참으로 고마우나 황제의 부름을 거역할 수는 없소이다.” 팽월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육가와 가던 길을 재촉했다. 호철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팽월이 입궁하자 유방이 엄하게 문책했다. “내가 친히 진희의 난을 평정하고 있을 때 그대는 어찌하여 도우러 오지 않았는가?” “당시 신은 정말로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폐하의 명을 어기려던 뜻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흥, 그대의 수하에 있던 태복이 그대가 모반을 꾸미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도 할 말이 있다는 말인가!” “그 자는 공무를 게을리 하여 제가 처벌하려 했습니다. 때문에 앙심을 품고 저를 모함한 것이니 폐하께서는 부디 소인에게 속지 마시고 저와 정면 대질을 시켜주십시오” 그러나 유방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정위를 불러다 팽월을 심문하도록 했다. 이때 근신이 다가와 어떤 자가 급히 황제를 뵙기 원한다고 고했다. 누구냐고 물으니 대부 호철이라고 했다. 유방은 호철을 들게 한 후 물었다.


    “무슨 일로 예까지 왔는가?” “일찍이 황상께서 형양에 포위 당하셨을 때, 팽월이 초군의 군량 보급로를 끊고 유격전을 벌여 구해드렸습니다. 이토록 큰공을 세운 팽월을 이제 와서 소인배의 참소를 믿고 죽이려 하십니까? 이 일로 천하 사람들이 겁을 먹고 황상을 멀리하게 될까 심히 두렵습니다.” 호철의 말에 유방은 과거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을 생각한 후 유방이 입을 열었다. “내 본디 팽월의 죄를 엄히 다스리려 했으나, 그대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목숨만은 살려주리라. 단 그의 왕작을 몰수하고 서민으로 강등하여 촉땅으로 귀양보낼 것이다.” 단 한시도 모반지심을 품어보지 않았던 팽월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었다. 크게 상심한 그는 눈물을 삼키며 귀향길에 올랐다.


    그런데 이튿날 팽월은 낙양으로 돌아가던 길에 여후의 행차를 만났다. 여후를 본 팽월은 복받치는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바로 길가에 엎드려 통곡했다. 여후가 다가와 묻자 그는 그간의 일을 낱낱이 밝히며 하소연했다. “부디 신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황상께 잘 말씀드려 고향 창읍으로 가게 해 주십시오.” 여후는 짐짓 그를 달래어 함께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여후는 궁에 돌아오자마자 곧장 유방에게 이렇게 말했다. “폐하, 팽월은 천하의 명장입니다. 그런 자를 불러왔으면 당장 제거하여 후환을 방지해야지 어찌하여 살려서 촉땅으로 가게 하셨습니까? 이는 덫에 걸려든 호랑이를 다시 산으로 보내는 것과 같으며 그랬다가는 훗날 분명 폐하를 해하려 들 것입니다. 마침 제가 도중에 그를 만나 다시 데려왔으니, 주저 마시고 화근을 없애버리십시오!”


    유방이 듣고 보니 여후의 말 또한 옳았다. 이에 그는 곧 팽월을 끌어다가 정위 양염에게 모반죄의 여부를 심문하도록 했다. 그제서야 팽월은 가까스로 사지를 벗어났다가 또다시 제 발로 호랑이굴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왕염이 팽월에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진희의 반란 때, 그대가 병을 핑계로 출정명령을 따르지 않자, 그 때부터 그대를 죽일 마음이 있으셨다. 그러나 어제 폐하께서는 옛 일을 생각해 목숨만은 살려주는 큰 은혜를 베푸셨거늘, 그대는 욕심에 눈이 어두워 여후를 따라 되돌아오고야 말았다. 때문에 황상께서는 자네가 분명 모반지심을 품었다고 판단하신 것이다. 이제 그대는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원래 ‘화복은 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초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대의 죽음은 폐하께서 각박해서가 아니라 그대가 자청한 것이나 다름없다. 더 이상 생환의 길은 없으니 바른대로만 말한다면 혹형만은 면하게 해주겠다.”


    그러자 팽월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내 호철의 말을 듣지 않아 이 같은 일을 당하게 되었구나. 이렇게 된 바에야 폐하께서 원하는 대로 답하리라!” 그리하여 왕염은 즉시 팽월은 ‘모반죄’가 분명하다는 내용의 보고문을 작성했다. 곧이어 유방은 한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팽월의 목을 베고, 삼족을 멸했다. 팽월의 처형을 지켜본 여후가 말했다.


    “폐하께서 자애로우셔서 천하의 제후들이 무서운 줄 모르고 제멋대로 날뛰고 있습니다. 그러니 팽월의 시체를 푹 고아 제후들에게 나누어주면 모두들 겁을 먹을 것이고, 다시는 반역자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유방은 이에 찬성하고 팽월의 삼족을 모조리 참수하여 장대에 꽂아 낙양에 세워두도록 했다. 아울러 누구든 시체를 거두는 자가 있으면 즉시 체포하겠다고 엄포했다.


    고대에는 황제가 죄인이라면 무조건 죄인이 되어야 했다. 황제가 내린 죄명은 결코 피할 수도, 씻을 수도 없었다. 팽월의 ‘모반’ 또한 순전히 유방이 벌인 비극에 불과했으니, 팽월에게는 너무나도 억울한 일이었다. 그러나 팽월은 황제의 근심을 해소하기 위해 어떻게든 죽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제아무리 양장이나 모신이라고 해도, 전횡과 권모술수가 들끓는 정계에서 정세를 관찰하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처신하지 못했다가는 한순간에 필생의 공업을 무너뜨릴 수 있다. 관직을 잃는 것은 둘째치고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을 잃는 치명적인 손상도 입을 수 있다.



    어진 재상과 현명한 군주의 짧은 화합
    주공과 주 성왕 - 지도자의 정치이상

    “중국 역사상 출현했던 명재상들은 하나같이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공(公)을 위해 사(私)를 버리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제왕이 영명하든 어리석든, 위대하든 범용하든 그들은 모두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나라와 사직 그리고 만백성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여 중국역사 발전에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명재상을 꼽으라면 단연 주공단(周公丹), 즉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주공이다. 그는 주 문왕의 아들이자 주 무왕의 동생으로 서주 초기의 저명한 정치가이다. 주 무왕은 상을 멸한 이듬해에 병사했다. 주 무왕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천하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주공은 무왕의 어린 아들 희송을 주 성황으로 옹립했다. 아울러 그가 섭정을 맡았고, 이로 인해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주공은 어린 군주를 대신해 대권을 장악하고 사태를 진압했다.


    주공은 수도에 남아 정사를 처리하느라 자신의 봉지인 노국을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들 백금을 노국으로 보내 대신 다스리게 했다. 백금이 떠나기 전 부친에게 당부할 말이 없는지 묻자 주공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이며 현 천자의 삼촌이다. 나는 지금 어떠한 자리에 있느냐?” “굉장히 높은 지위에 계십니다.” “그렇다, 나는 분명 아주 높은 자리에 있다. 그러나 나는 머리를 감다가도 급한 일이 있으면 감던 머리를 손에 쥔 채 나와서 정사를 처리해야 하고, 또 밥 먹는 중이라도 누가 찾아오면 입에 있던 밥도 뱉어내고 그 사람을 만나야 한다(吐哺握發). 행여 훌륭한 인재를 놓칠까 염려해서이다. 그러니 노국에 가더라도 결코 교만하지 말지어다!” 백금은 부친의 말을 명심하고 노국에 가서 어진 정치를 펼쳤다.


    주공이 성심성의껏 성왕을 보좌하고 국사를 돌보자 이를 시기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바로 무왕의 또 다른 형제인 관숙과 채숙이었는데, 이들은 주공이 야심을 품고 왕위를 찬탈하려고 한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주왕의 아들 무경은 상왕조가 멸망하면서 은후에 봉해졌지만, 언제나 주왕조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때문에 자유롭지 못했던 그는 조석으로 주왕조의 내란만 바라고 있던 터였다. 그는 상왕조를 회생시킬 요량으로 관숙, 채숙과 함께 구귀족들을 연합하고 더불어 동이의 몇몇 부족을 선동하여 반란을 도모했다.


    무경과 관숙 등이 퍼뜨린 유언비어로 호경 전체가 들썩이고 심지어 소공 석마저 주공을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아직 나이가 어려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는 성왕마저도 자신의 숙부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주공은 소공을 붙잡고 답답한 속마음을 터놓았다. 자신은 결코 야심 따위를 품지 않았으니 부디 대국을 살피고 유언비어를 믿지 말라고 했다. 그의 진실한 모습에 감복한 소공은 오해를 풀고 다시 주공과 뜻을 모았다. 일단 내부가 안정되자 주공은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군 평정에 나섰다.


    그 무렵 동방에서는 회이와 서융 등 이민족 부락들이 무경의 반란군에 부응하여 주왕실에 대한 공격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 주공은 태공망에게 군권을 부여하고 주왕조에 불복하는 제후들을 책임지고 토벌하라고 지시했다. 그런 후 자신은 무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주공은 3년 만에 반란군은 진압하고 무경을 잡아다 처형했다. 그리고 채숙은 국외로 추방했고, 관숙은 자신의 형과 조카를 볼 면목이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공은 반란군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구왕조의 귀족들을 사로잡았다. 주왕조에 반항했다 하여 ??완민(頑民)??이라고 불렀는데, 주공은 이들을 원래 살던 곳에 놔두려고 했으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동시에 도읍 호경은 서쪽으로 치우쳐 있어 동쪽의 광대한 중원지역을 제압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주공은 동쪽에 도성을 건설하고 낙읍(洛邑)이라 명명한 후, 상왕조의 완민들을 이주시켜 살게 했다. 물론 군대를 파견하여 감시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주공이 조정에 돌아왔을 때, 그가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는 소문은 오히려 전보다 더 무성해져 있었다. 주공이 관숙을 죽이고 채숙을 유배 보낸 이유가 성왕을 고립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주공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시 한편을 지었다. <치효(??)>라는 제목의 이 시는 주왕실과 성왕에 대한 자신의 충정을 전달하는 한편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들을 올빼미에 빗대어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를 읽고도 성왕은 여전히 주공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노력해도 성왕의 의심이 깊어지자 주공은 이대로 조정에 남아 있다가는 필시 후환이 닥치겠다 싶었다. 그리하여 성왕에게 노국으로 돌아가겠노라고 말했고, 성왕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 해 가을, 주나라에 갑자기 천둥번개를 동반한 강한 폭풍이 몰아 닥쳐 농작물이 모두 쓰러지고 나무들도 뿌리째 뽑혀 온 백성이 두려움에 떨었다. 성왕은 이를 천신이 크게 노한 것이라 생각했고, 주공에 대한 거짓 소문을 만들어낸 자들은 한술 더 떠 이렇게 말했다. “이 같은 변고는 주공의 왕위찬탈을 조심하라는 하늘의 경고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성왕은 이 말이 옳다 여기고 주공의 모반에 대응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앙정부의 소장문서를 뒤지다가 주공이 쓴 문장 『금등(金騰)』을 발견했다. 무왕의 병이 위독해졌을 당시 그의 회복을 기원하고 심지어 아픔은 물론 죽음까지 대신하게 해달라고 기대한 내용이었다. 그제야 성왕은 주공의 충정에 거짓이 없음을 깨닫고 즉시 사람을 보내 주공을 데려와 용서를 빌었다. 그 뒤로 성왕은 주공을 진심으로 믿고 따랐으며 주공 또한 늘 한결같은 자세로 그를 보좌했다.


    주공이 어질고 현명한 정치가로서 섭정한 지 수년이 흘렀을 때 어디선가 또다시 그를 모함하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성왕은 또다시 주공을 멀리하기 시작했고, 그가 아무리 결백을 주장해도 성왕의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이에 주공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봉지로 돌아갔다. 만약 주공이 계속해서 도성에 남아 있었다면 성왕의 의심은 갈수록 깊어졌을 것이고, 소문도 더욱 무성해졌을 것이다.

    런데 주공은 차라리 조용히 물러나서 언젠가 성왕이 진심으로 자신의 충정을 알아줄 날을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였다.


    주공은 참으로 긴 안목을 지닌 현명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눈앞의 득실을 따지지 않고 과감히 높은 지위에서 물러남으로써 자신을 보호할 줄 알았다. 이처럼 세밀한 사고와 범인을 초월하는 넓은 가슴을 지닌 덕분에 결국 성왕은 다시 주공을 기용하여 자신을 보좌하도록 했다. 주공은 지도자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정치 이상을 보여준 인물이다. 이처럼 공을 위해 사를 버리고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최대한 발휘하는 자세를 지닌 지도자만이 역사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다.



    공성신퇴 ― 나를 지키는 처세술
    범려와 구천 - 공을 이룬 뒤 초야로 물러나다

    “가득 차면 기울기 마련이고 지나치게 강하면 부러지기 마련이다. 모든 사물은 정점에 달한 후 쇠하기 마련이다.” - 노자 『도덕경』


    노자가 이르기를 “공을 이룬 뒤에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功成身退 天之道)”라고 했다. 이 말이 고대 중국 정치가들에게 권모술의 하나로 해석되었다면, 월왕 구천을 보좌한 범려는 최초의 실천인 중 하나였다. 월나라는 오나라를 멸한 뒤로 경제, 정치, 군사 분야에서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다. 그리하여 월왕 구천은 주천자의 승인을 얻어 패자가 되었고, 공신 범려를 상장군에 임명했다. 구천이 승리를 거두고 오나라의 조당에 앉아 있을 때였다. 오나라의 멸망에 적잖은 공을 세원 간신 백비가 상을 기대하며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구천은 그가 오왕의 대신이었다는 이유로 외면했다. 백비가 화가 나서 물러가자 구천은 화근을 제거한다는 핑계로 그를 뒤쫓아가 죽였다.


    월나라로 돌아온 후, 구천은 대신들을 청해 축하연을 베풀었다. 대신들은 저마다 하례를 올리고 월왕의 공로와 덕을 칭송했는데, 구천의 표정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범려는 속으로 ‘구천과 환난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나눌 수 없구나!’라고 탄식했다. 오나라도 멸하고 원한도 다 갚은 이상 월왕에게 모신들은 불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범려는 이대로 있다가는 언제 화를 입을지 모르니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종에게도 편지를 써 상황을 알리고 일찌감치 떠날 것을 권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범려는 따나기에 앞서 구천을 찾아가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자고로 군주가 치욕을 겪으면 신하는 죽음으로써 충효를 다해야 마땅하다고 들었습니다. 소신이 지난날 대왕께서 회계에서 치욕을 당하셨는데도 죽지 못한 이유는 한때의 수모를 참아 월나라의 패업을 이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지난날의 치욕도 씻었으니 만일 과거 소신의 죄를 사면해주신다면 이제 그만 관직에서 물러나 초야로 돌아갈까 하옵니다.”


    구천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만류했다. “그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오늘이 있을 수 없었소. 부디 내 곁에 남아 함께 나라를 다스립시다. 이미 마음을 굳힌 범려가 극구 사양하자, 급기야 구천은 위협까지 했다. “계속 고집을 피운다면 그대 가족의 목숨이 성치 못할 것이오.” 하지만 범려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말했다. “대왕께서 뜻한 바대로 하소서. 소신은 소신이 원하는 길을 가겠나이다.” 범려는 약간의 재물을 가지고 가솔들과 함께 월나라를 떠났다. 사실 구천은 유능한 공신이 제 발로 떠나주는 것이 통쾌하기만 했다. 그래서 범려를 막지도 잡아오지도 않았고, 대신 인심을 얻기 위해 그에게 봉읍을 하사했다. 범려는 성과 이름을 바꾸고 제나라에 은거했다. 그는 그곳에서 다시 한 번 문종에게 편지를 보냈다.


    “잡을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화살은 사라지고,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는 잡아먹는 법이요.” 뜻인즉슨 이미 목적을 다 이룬 이상 구천이 공신들을 가만둘 리 없으니 어서 피하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문종은 여전히 범려의 말을 반신반의했다. 그는 단지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아가지 않는 소극적인 방안을 택했다. 더 이상 구천과 국사를 논하지 않으면 위험을 막을 수 있으리라 믿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토사구팽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며칠 후 몸소 병문안을 온 구천이 검 한 자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대는 오래 전에 내게 일곱 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나는 그 중 세 가지 계책만을 이용해 오나라를 멸하고 패자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나머지 네 가지는 어디에 쓸 것인가?” 구천이 돌아간 후 검을 살펴보니 바로 옛날 오왕이 오자서에게 자살을 명하며 내렸던 속루검이었다. 문종은 그제야 범려의 말을 떠올리며 가슴을 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는 결국 구천의 명에 따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범려는 제나라에 정착한 뒤로 경상능력을 발휘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한때 제나라의 군주가 그의 소문을 듣고 상국으로 기용하고자 했으나 범려는 정중히 거절했다. “소신을 높이 평가해주셔서 황공할 따름입니다. 허나 저는 벼슬하면 이미 경상까지 지내보았고, 재물 또한 먹고 살기에 충분하니 더 이상은 바랄 것이 없나이다.”


    그리고는 얼마 뒤에 절친한 벗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나눠주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범려는 당시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인 도(산동성 비성현)로 가서 도주공이라 칭하고 농목업과 상업에 종사하여 큰 재산을 모았다. 그는 가난한 벗들과 고향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어 사람들의 추앙을 받다가 나중에 도에서 사망했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중용(中庸)’을 지향하고, ‘당장의 근심이 없더라도 미래의 근심을 걱정해야 함’을 강조하고, 공업을 매우 중시한 것과 더불어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때문에 각 개인으로서는 진퇴를 결정하는 일이 어려운 과제였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물러섬은 결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다 먼 미래를 위한 재충전을 의미한다.


    상앙, 문종, 여불위, 이사, 한신 등 유능하지만 나아감과 물러섬의 때를 고르지 못하여 비운을 겪은 역사적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세운 업적은 시대가 바뀌어도 계속 전해지고 있지만 정작 그들 자신의 말로는 부귀하지 못했다. 고로 위정자는 사회적인 평가에 신경 쓰기에 앞서 공적을 세운 뒤에는 한 걸음 물러서고, 일이 잘 될 때 자성의 시간을 가지고 먼 앞날에 있을지 모를 나쁜 결과를 예상해보는 슬기로움을 지녀야 할 것이다.



    공성신퇴―나를 지키는 처세술
    진평과 유방 ― 임기응변의 고수

    “어떤 일을 할 때 한 가지 방법만 고수하지 말고 임기응변할 줄 알아야 한다. 변화에 능해야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는 법이다. 상대의 변화를 예상하여 유연한 책략을 시행할 줄 알아야 예기치 못한 상황에도 적응할 수 있다.”


    한초 3걸로 꼽히는 한신은 토사구팽을 당했고, 소하는 참언을 당해 옥에 갇혔고, 장량은 화를 피해 도망쳤다. 그러나 진평만은 이들과 달리 죽는 날까지 신임을 받고 승상직에 머물다 세상을 떠나 후인들이 존경해 마지 않았다. 진평은 유방에게 계책을 바쳐 한신을 포로로 잡은 공으로 호우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거안사위(居安思危 :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생각함)의 지혜를 지닌 그는 “제 공로가 아닙니다”라고 하며 후작을 사양했다. 유방이 물었다. “그대 덕분에 승리를 거두었는데 어찌 사양하는가?” 그러자 진평이 말했다. “만일 위무지의 천거가 없었더라면 제가 어찌 폐하 앞에 설 수 있었겠습니까?” “실로 은혜를 잊지 않는 인물이로다!” 유방은 진평을 크게 칭찬하며 위무지에게도 후한 상을 내렸다.


    유방이 백등(白登)의 포위에서 간신히 풀려나 도성으로 돌아가다가 곡역(하남성 완현)이라는 곳에 들렀다. 성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던 유방이 감탄하며 말했다. “참으로 살기 좋은 곳이로구나. 내 천하를 다 돌아봤지만 좋기로는 이곳과 낙양이 최고로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지방관에게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원래 3만 호가 넘었으나 수년 동안 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피난을 가 지금은 겨우 5천 호가 남았습니다.” 유방은 백등에서 자신을 구한 진평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곡역을 식읍으로 하사하고, 다시 곡역후에 봉했다. 당시 일개 현을 식읍으로 받은 자로는 진평이 유일했다.


    한 고조 12년(195년), 연왕 노관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해 2월, 유방이 번회에게 반란군을 정벌하도록 했는데, 얼마 안 있어 누군가 그의 과실을 고해 바쳤다. 유방이 대노하여 말했다. “번회는 내가 중병에 걸린 것을 보고 빨리 죽기를 바라는구나!” 유방은 다른 장군을 임명하여 전선에 보내고 싶었으나, 혹 군권을 장악한 번회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 염려되었다. 이에 진평으로 하여금 조서를 전달하고 수레에 주발이 숨어 있다가 번회를 죽이고 대장군 인수를 빼앗도록 했다. 하지만 번회는 전공이 혁혁한 장수인데다 황후의 여동생 여수의 남편이었다. 황제의 명이기는 하지만 잘못하여 여후의 노여움을 살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심하고 계략에 뛰어난 진평이 주발에게 말했다. “번회 장군은 황상과 함께 오랫동안 전장을 누비면서 무수한 공을 세운 데다 여후와는 인척관계요. 지금 황상께서 노하여 그를 죽이라 했으나, 나중에 화가 가라앉으면 후회할지도 모르오. 그 때가서 여후께서 원망이라도 한다면 우리 두 사람의 목숨을 보존할 수 없소이다. 차라리 번회 장군을 산채로 잡아서 조정으로 데리고 갑시다. 그런 후에는 황제께서 죽이시든 살리시든 우리는 책임을 면할 수 있지 않겠소?”


    두 사람은 의견 일치를 본 후 진회의 군영으로 향했다. 군영에 도착한 후 진평은 성지를 발표하기 위한 대를 쌓도록 하고, 사신에게 부절을 딸려 보내어 번회를 불러오도록 했다. 그는 문관 진평이 왔다는 소리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단독으로 나와 맞이했다. 그때 갑자기 대 뒤에 숨어 있던 주발이 튀어나와 번회를 체포하여 수레에 가두었다. 그리고 새 장군을 임명한다는 성지를 발표한 후 수레를 몰아 장안으로 향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진평과 주발은 가는 도중에 한고조 유방의 병사소식을 들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제 여후가 정권을 장악할 것이 분명했다. 사태가 매우 심각했지만 번회를 죽이지 않은 것은 실로 천만 다행이었다. 하지만 진평은 만의 하나 일이 잘못될 경우를 생각해 밤낮으로 수레를 몰아 장안으로 향했다. 그런데 진평이 장안에 미처 도착도 하기 전에, 사자에게서 관영과 함께 형양을 지키라는 명령을 전해 들었다. 조정을 눈앞에 두고 다시 발길을 돌려야 한다니 진평은 속이 탔다. 급한 가운데 묘책이 떠올랐다. 그는 즉시 주발과 번회보다 한 걸음 앞서 입궁한 뒤 유방의 영구 앞에 꿇어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소신 차마 대신을 죽일 수 없어 번회를 죽이라는 폐하의 명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대신 번회를 데려와 폐하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실은 여후에게 전해지길 바라고 한 말이었다. 여후와 여수는 이 말을 전해 듣고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게다가 황제의 죽음을 슬퍼하는 진평을 애처롭게 여겼다. 그리하여 진평을 낭중령에 임명하고 장안에 남아 새로 즉위한 한 혜제(韓惠帝)를 지도하고 보좌하도록 했다. 얼마 후 장안에 도착한 번회는 즉시 사면을 얻고 관작을 그대로 유지했다.


    증국번과 동치제 ― 거안사위의 표본

    “모험을 피하고 이목을 집중시키지 않고, 함부로 나서지 않는 것이 기본원칙이다. ‘1등보다는 2등이 낫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최고의 권위자가 보든 안보든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지 않고, 수시로 자신을 되돌아보고 언행을 단정히 하고 예의와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청나라 말기를 풍미한 인물 증국번은 강한 인내심과 선견지명을 갖추고 정치질서 유지를 위해 그 무엇도 아끼지 않았다. 가장 두드러진 예는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후 그가 자진해서 상군을 해산시킨 행동이다. 상군은 증국번이 조직한 사가군대로 청 정부의 군대와 큰 차이를 보인다. 팔기군과 녹영병은 모두 정부가 편성하고 훈련시킨 군대로 전시에는 조정에서 임명한 장수들의 지휘를 받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장수들의 병권을 회수했다.


    상군의 경우 각 초관(哨官 : 청대의 군제 중 하나로 백 명의 병사를 통솔하던 관리)이 직접 사병을 선발하고, 초관은 영관이 직접 선별하고, 영관은 대부분 증국번의 친구, 동학, 동향, 문하생 등이었다. 따라서 상군의 병사들은 자신의 직속상사에게 절대 복종했고, 전체적으로 사병에서 영관까지 증국번에게 절대 복종하는 구조를 이루었다. 이처럼 예속관계가 농후한 상군에 대해 기타 청 정부를 포함한 어떤 집단도 지휘하거나 간섭하기 어려웠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증국번의 주도 하에 결성된 상군은 조정의 정규군이 별다른 선전을 거두지 못하는 상황 하에 신속하게 난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무능한 조정은 1861년 11월 증국번에게 강소, 안휘, 강서, 절강 4성의 군무를 위임하고, 이 지역의 순무, 제독 이하 문무관원을 관리하게 했다. 이는 청 왕조 건립 이후, 한족 관료에게 베푼 최고의 대우였다. 그러나 증국번은 결코 득의양양하거나 기쁨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경각심을 늦추지 않았고, 편안할 때도 위태로운 경우를 생각했다. 후에 태평천국의 난이 진압되자, 증국번은 공로를 인정받아 후대가 세습할 수 있는 의용후에 봉해졌다.


    입신양명을 이룩하여 가문을 영화롭게 한 뒤로 증국번의 언행은 전보다 훨씬 더 신중해졌다. 그는 공로가 높을수록 시기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매사에 조심했으며, 토사구팽의 위험을 경계했다. 그는 중국 역사상 ‘공성신퇴’의 도리를 몰라 목숨과 명예를 잃은 공신들로부터 생생한 교훈을 얻었던 것이다. 증국번은 동생 증국전에게 편지를 써 앞으로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는 즉시 군대를 해산시키고 물러서라고 당부했다. 일찍이 상군은 천경을 함락한 후 그곳의 재화를 대거 약탈했는데, 당시 증국전이 가장 많은 재물을 차지했었다. 이에 좌종당 등이 증국번 형제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증국번은 북경으로 돌아온 뒤 서둘러 다음 세 가지 대책을 세워 조정에 제시했다. 첫째 공원을 세워 강남의 선비들을 발탁한다. 둘째 남경에 팔기군의 병영을 세우고 주둔하게 한 뒤 군량을 제공한다. 셋째, 상군을 4만 명으로 감축하여 스스로 권세에 대한 욕심이 없음을 알린다. 그러자 조정도 더 이상 증국번을 추궁하지 않았고 이로써 그에 대한 조정의 의심과 시기도 해소되었다.


    후에, 증국번은 또 다시 조정에 주청하여 말하기를 상군의 유지기간이 길고 오랫동안 전쟁을 수행해 아무래도 옛 군대의 악습이 재연될까 염려스럽고, 전투력이나 기상이 예전만 못하니 해산시키겠다고 했다. 이로써 증국번은 자신은 결코 사적으로 군대를 양성하여 개인의 이익을 취하려는 야심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그는 상주문에서 자신의 거취문제를 논하지 않았다. 만일 조정에 남겠다고 말하면 권력을 탐한다고 의심받을 것이고, 또 군대의 해산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조정을 위하는 마음이 없거나, 상군의 추대를 받으려는 속셈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증국번의 세밀함을 보여주는 예이다.


    사실 태평천국의 난이 진압된 후, 조정에서는 증국번 문제를 두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에게는 조정으로서도 어쩌지 못하는 강대한 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조정대신들이 한창 고심하고 있을 때, 증국번 스스로 상군의 해산을 청하니 심중의 무거운 바위를 내려놓는 듯 속이 후련한 일이었다. 조정은 상군의 해산을 승인하는 동시에 증국번의 양강총독 지위는 그대로 두었다. 증국번은 자신이 처한 지경을 정확히 인식하고 상황의 흐름에 따라 알맞은 책략을 취해 충신이라는 미명을 얻었다.



    권력이 커지면 군주를 업신여기다
    고징과 원 선견 - 권력이 커지면 군주를 업신여기다

    “고대의 대신들을 논할 때 과연 ‘충’이라는 단어가 가당키나 할까? 제왕의 권위가 크면 그들은 하나같이 숨죽이고 복종했으나, 제왕의 힘이 약하면 그들은 늑대와 호랑이가 되어 제왕을 함정에 빠트리려 했다. 그리하여 권력은 쉴 새 없이 제왕과 재상 사이를 오갔다.”


    신하에게 욕을 듣고, 얻어맞고, 모반을 기도했다고 질책 당한 제왕이 있었다면 믿을 수 있는가? 남북조시대 동위의 마지막 황제 원(元) 선견(善見)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마지막 황제 하면 대부분 무능하거나 겁약할 것 같은데 원 선견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풍채가 당당하고 보통 사람을 능가하는 힘을 지녀 석사자를 안고 궁궐 담을 넘고, 활을 쏘면 백발백중일 만큼 무예가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시문에도 능했고 성격 또한 강직했다.


    원 선견은 유능한 황제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지녔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불운한 일생을 보냈다. 그는 11세 때 권신들에 의해 옹립되었다. 당시 권신 고환은 이전 황제 효무제가 질려 달아날 정도로 악랄했다. 그런 그가 나이 어린 원 선견을 황제로 대우했을 리가 없다. 원 선견은 즉위하는 그 날부터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환이 죽자 권력은 그의 아들 고징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고징의 발호는 고환을 능가했다. 원 선견 앞에서 그의 행동은 오만무례하기 짝이 없었고, 심지어 황문시랑 최계서를 붙여놓고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할 정도였다. 때문에 원 선견은 대소사를 막론하고 결정권을 누릴 수 없었으며, 무슨 일이든 반드시 최계서에게 먼저 이야기해야만 했다.


    하루는 원 선견이 사냥에 나섰다가 흥이 올라 나는 듯이 말을 몰았다. 그러자 그의 수행원이 큰 소리로 만류했다. “폐하, 그렇게 빨리 달리다가는 대장군(고징)께서 화내십니다.” 가엾은 천자는 하다 못해 말 달리는 속도마저도 고징의 간섭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고징은 자주 황제의 연회에 참석하곤 했는데, 한번은 시종에게 가장 큰 술잔을 가져오게 하여 술을 가득 채우더니 원선견에게 내밀며 말했다. “폐하, 건배하시지요!” 도저히 대신이 황제에게 술을 올리는 말투라고는 볼 수 없었고, 오히려 친구와 술잔을 주고받는 듯 했다. 원 선견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하고야 말았다. “짐이 이렇게까지 모욕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이 말에 고징은 노발대발하며 욕을 뱉었다. “짐? 짐? 무슨 얼어죽을 짐!” 뿐만 아니라 최계서를 시켜 원 선견을 세 대나 후려갈겼다. 불쌍하고도 불쌍한 황제 원 선견. 욕을 듣고 말대꾸도 못하고 얻어맞고도 주먹을 돌려주지 못하고, 다음날 최계서에게 미안하다고 비단 백 필을 하사하기까지 해야 했다.


    마침내 원 선견은 불의를 참지 못하고 몰래 왕공대신과 황실 인원 몇 명과 결탁하여 고징을 해치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단 한 명의 무장도 없는데 어찌 싸운단 말인가? 이에 차선책으로 암살 계획을 세우고 궁궐에 지하도를 파서 고징의 집까지 통하게 했다. 그런데 이마저 고징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고징은 장병들을 이끌고 황궁에 쳐들어와 예도 올리지 않고 다짜고짜 따져 물었다.


    “폐하, 어찌하여 모반을 기도하셨나이까?” 원 선견은 기가 막히고 서글퍼 말했다. “자고로 신하가 군왕을 배반했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군왕이 신하를 배반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도다. 모반을 행하고 있는 사람은 그대이거늘 어찌 나를 질책하는가? 그대를 죽여야만 강산과 사직이 평안할 수 있다. 이제 내가 실패했으니, 황위가 탐난다면 어서 나를 죽여라.”


    당시 고징은 그냥 물러났지만, 다음해 원 선견은 압력에 못 이겨 고징의 동생 고양에게 황위를 이양해야 했다. 동위왕조의 역사도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

    ‘짐’이라는 호칭은 진시황이 황제 전용어를 제정할 때 함께 정한 것으로 지고무상과 신성불가침의 대명사였다. 고환처럼 황제를 무례하게 대한 이는 역사상 아마 더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역사상 황제가 폐위당하거나 살해당한 일은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이처럼 황제가 욕을 먹고 얻어맞은 경우는 아마 원 선견이 최초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황제가 대신에게 모반이라는 말을 들은 일도 최초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