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청 도서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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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 세기의 눈

Henri Cartier-Bresson : L'Oeil du sie'cle

저   자
피에르 아술린(역자 : 정재곤)
출판사
을유문화사
출판일
2006년 07월







  • 20세기 위대한 예술가와 그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 9번째 권으로, 흑백 이미지를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은 사진미학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조망한 평전이다. 저자가 브레송과 나눈 5년에 걸친 대화를 비롯하여 전화, 편지, 엽서, 또는 팩스를 통해 주고받은 방대한 내용을 토대로 완성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 세기의 눈


    1. 실 공장 집 아들, 1908~1927
    규모가 꽤 큰 실 공장 집의 아들로 태어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물가가 비싸다느니, 근검절약해야 한다느니, 음식을 아껴서 먹어야 한다느니 하는 말을 하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집안이 가난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카르티에 브레송 집안은 대단한 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리스본 가의 아파트에 세들어 살았다. 기업이 아닌 곳에 목돈을 묶어 두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 청소년이던 카르티에 브레송은 데생을 시작했다. 그에게 예술이 아닌 정신적?육체적 활동은 전혀 안중에 없었다. 키가 크고 말랐으며 균형 잡힌 체격을 가졌던 카르티에 브레송은 경쟁심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운동을 싫어했다. 성적은 보통이었지만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가톨릭 학교에 적응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였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훈육주임 덕에 독서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영화와 전시회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아직 사진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맏아들이 파리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팡탱에 있는 공장에 취직해서 사장 자리를 이어받기를 바랐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식구들이 원하는 대로 바칼로레아(프랑스의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세 차례나 응시했지만, 모두 떨어졌다. 첫 응시 땐 3점이 모자라서 떨어졌다. 그 다음 번엔 13점, 마지막엔 30점이 모자랐다. 아들이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연거푸, 그것도 점점 더 나쁜 점수로 떨어지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품었던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면서, 뭔가 진지한 일을 찾아보라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조차 그것이 무엇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카르티에 브레송도 자기가 앞으로 무슨 일(예술)을 할 것인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슨 일(가업 이어받기)이 하기 싫은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2. 결정적 순간들, 1927~1931
    카르티에 브레송은 테크닉을 찾아 나섰다. 파리에는 그림 테크닉을 가르쳐주는 아틀리에들이 적지 않았다. 그는 막 문을 연 아카데미 중 하나였던 로트 아카데미를 선택했다. 기하학과 초현실주의 쪽으로 유명한 앙드레 로트와, 키슬링이나 메칭거와 같은 명성 높은 선생들이 있는 아카데미였다. 로트는 오로지 세계를 지탱하는 구조를 통해서만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카르티에 브레송도 스승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2년 후, 스승의 아류로 전락하기 싫어서 아카데미를 떠났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영국으로 유학을 간 사촌 루이 르 브르통을 따라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거기서도 그는 주로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파리로 돌아온 카르티에 브레송은 초현실주의 운동의 공식 기관지인 「초현실주의 혁명」을 탐독했다. 그리고 초현실주의자들의 본거지인 몽마르트의 담 블랑슈 카페나 블랑슈 광장 부근에 있는 시라노 카페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초현실주의 자체에는 깊이 공감하면서도, 초현실주의자들의 보잘것없는 작품에는 실망이 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림의 탈을 쓴 문학이로구먼! 마그리트(초현실주의풍 작품으로 유명한 벨기에 출신의 현대 화가)의 그림은 재치가 넘치고, 풀어야 할 문학적 수수께끼도 담겨 있지만, 예술은 아니다. 광고로나 쓰면 적당할까." 반면에 만 레이(미국 출신 사진작가로, 사진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의 인간성이나 그의 초상사진 작품들은 인정하는 편이었으며, 막스 에른스트에게는 깊은 애정을 느꼈고 또 그의 콜라주 작품들도 높이 평가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어차피 군복무를 치러야 한다면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기술적 이유가 아니라 낭만적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공군에 지원했고, 비행장이 있는 파리 북부의 부르제 기지에 배속되었다. 기지에 근무하는 동안 카르티에 브레송은 오른쪽 어깨엔 르벨 소총을 짊어지고, 왼쪽 팔에는 1928년에 출간된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를 끼고 다녔다. 그러나 잘 적응하진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비행훈련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부르제 공항은 팡탱과 가까웠고, 거기서 카르티에 브레송 공장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카르티에 브레송은 벌을 받아도 걸레자루를 집어 들거나, 조금 더 심한 경우에도 구류나 헌병대 영창에 며칠 수감되는 데 그쳤다. 이때 우연한 기회에 미국인 해리 크로스비를 만나게 되었다.


    해리 크로스비는 미국 보스턴의 최고 명문가 출신으로, 억만장자 은행가인 J. P. 모건의 조카이기도 했다. 유럽에 정착한 그는 아내와 함께 ??블랙 선 프레스??란 출판사를 세웠다. 여기에서 피터 파월과 그레첸 파월 부부의 사진집을 내기도 했다. 피터는 카르티에 브레송에게 사진기가 무엇이며, 사진기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가르쳐주었다. 그레첸은 카르티에 브레송과 재즈에 대한 정열을 나누었으며, 정열 그 자체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그레첸은 카르티에 브레송보다 열 살이나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존중하는 한 남자의 부인이었다. 카르티에 브레송과 그레첸은 서로 열렬히 사랑했지만, 이렇다 할 탈출구가 없었다. 해리 크로스비의 자살을 계기로 이 관계도 변화를 맞게 되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그레첸을 떠났다.


    폴 모랑(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외교관)은 카르티에 브레송에게 눈과 마음을 씻어낼 수 있도록, 남미의 파타고니아로 가서 폭풍우치는 광경을 보고 오라고 권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랭보가 익명으로 말년을 보냈던 에티오피아를 떠올렸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카메룬을 거쳐서 코트디부아르에 도착했다. 그곳이 그의 에티오피아였다.


    1930년대만 하더라도 코트디부아르에는 거의 원시상태로 살아가던 원주민 몇만 명밖에 없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처음엔 잡다한 여러 가지 일들을 닥치는 대로 했다. 그러다 오스트리아 사냥꾼을 만나 함께 카발리 강을 거슬러 오르며 사냥을 하게 되었다. 사냥을 하지 않을 때 카르티에 브레송은 아프리카로 떠나오기 전에 장만한 중고 카메라로 처음 사진을 찍어보았다. 혈뇨병에 걸려 죽다 살아난 카르티에 브레송은 다시 프랑스로 돌라왔다. 아프리카에서 보낸 일 년은 짧은 시간이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고 비극적이면서도 찬란한 순간이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23세였다. 이미 완성된 나이였다. 이제 한 세기를 거쳐서 다음 세기까지 걸어서 갈 일만 남았다.


    3. 도구를 찾아 나선 예술가, 1932~1935
    카르티에 브레송은 마틴 문카치가 찍은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마틴 문카치는 이렇게 말했다. "대개의 사람들이 무심하게 지나치는 현상을 1천분의 1초 동안 포착한다. 바로 이것이 르포 사진의 원칙이다. 1천분의 1초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사람들이 이미 본 것을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르포의 실천적 측면이다." 문제의 사진은 흑인 청소년 세 명이 탕가니카 호수 속으로 뛰어드는 광경을 뒤에서 포착한 것이다. 이 사진은 카르티에 브레송이 도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진은 삼각대에 고정시켜 놓고 찍은 것이 아니라 휴대용 카메라로 찍은 것이었다. 휴대용 카메라는 사진작가에게 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줌으로써, 예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하던 장소에서도 사진을 찍게 해주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1932년 마르세유에서 라이카를 산 즉시 사진작가가 되었다. 예술가가 드디어 자기 도구를 손에 넣은 것이다. 라이카는 카르티에 브레송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신화적 존재가 된다. 그는 단 한번도 라이카와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손바닥만한 라이카는 거리측정기, 노출계도 없었다. 네모난 파인더는 ??황금의 수??를 찾기에 안성맞춤이었고 초점거리 50밀리에, 조리개 3.5인 하나뿐인 렌즈는 뺄 수 없게 고정되어 있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이 카메라 외에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사람 눈에 상응하는 이상적인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른 방식의 데생이 시작되는 셈이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1932년부터 33년까지 친구 망디아르그와 레오노르 피니와 중고 뷰익을 타고 유럽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뷔」에서 르포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자 망설이지 않고 수락했다. 공화국이 설립된 지 2년이 지난 스페인의 의회선거를 취재하는 일이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1933년 11월, 처음으로 사진을 찍어 돈을 벌게 되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멕시코에서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도둑 맞기도 했다. 그는 그때 머무르던 동네가 위험하고 더럽기 짝이 없는 데다 돈도 없어서 매일 쩔쩔매며 지내야 했지만, 인생에서 이때만큼 행복한 적은 없었다고 회고한다. 옥수수빵을 튀겨서 시장에 내다팔던, 맨발의 약혼녀 구아달루페 세르반테스가 있어서 더욱 행복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라이카를 손에 들고 시장을 누비면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보냈다.


    4. 이전 세계의 종말, 1936~1939
    카르티에 브레송은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뉴욕에서 보낸 1년간의 생활을 청산하고 파리로 돌아온 그는 영화감독을 찾아가서 자신을 조감독으로 써달라고 요청했다. 세 번째 시도에서 자신을 받아주는 영화감독을 만났다. 장 르누아르였다. 아직 르누아르가 신화적 인물로 등극하기 전이었다. 장 르누아르와 함께 영화를 찍으며 감을 익히던 카르티에 브레송은 언론계에서 시사 다큐멘터리를 담당하게 되면서 영화 일을 그만두게 된다. 사실 카르티에 브레송 자신의 개인적 사유가 가장 컸다. 그가 자바 출신 무용수인 라트나 모히니와 결혼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고정적인 수입이 필요했다. 게다가 스페인 내전이란 현실에 몸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첫 앙가주망(참여)이었다. 그는 「스 수아르」지의 사진기자가 되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미국 의료국에서 영화 제작 의뢰를 받기도 했는데 직업적 동기보다는 정치적 동기에서 즉시 수락했다. 프랑스어 제목은 <삶의 승리>였고 영어 제목은 <삶에로의 복귀>였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스페인 내전 동안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후회할 만했다. 그는 공화국 측 병원 건립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선전 영화를 찍느라 동분서주하면서 대의에 봉사하려 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영화는 영사막 위에서 상영될 동안뿐이고 지나가면 그만이다. 반면 사진은 영원히 남는다. 게다가 영화는 찍고 나서도 편집에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편집하는 동안 전쟁은 끝나간다. 이를 계기로, 카르티에 브레송은 세상사에 무턱대고 뛰어들기보다는 리포터로서 좀더 신중한 태도를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파리로 돌아와 「스 수아르」에 복귀했다가 사진을 찍기 위해 다시 그만둔 카르티에 브레송은 르누아르 곁에서 세 번째 영화를 마친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가 영화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자신이 계속 조감독 일을 해봐야 결코 감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5. 국적 : 탈주자, 1939~1946
    1939년 여름,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독일이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1940년 봄, 비겁한 행동으로 군인들의 불만을 샀던 달라디에 정부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새로 내각 수반에 오르게 된 폴 레노는 「뷔」와 『파리 수아르』를 이끌었던 필립 뵈네르에게 군대 내에 사진 촬영부서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필립 뵈네르는 전 세계를 상대로 취재 중인 프랑스인 사진기자가 겨우 8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즉시 24명의 종군기자를 차출하기로 했는데, 리스트에 오른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었다.


    1940년 5월 10일,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북부 사람들은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프랑스 전체가 피난민 행렬로 들끓었다. 졸지에 나라가 붕괴되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여지껏 찍은 것 중에서 간직하고자 하는 필름만 오려내어 비스킷 금속통 안에 넣은 다음 아버지에게 맡겼다. 아버지는 그것을 은행금고에 맡겼다.


    1940년 6월 22일 휴전협정이 조인되던 바로 그날, 카르티에 브레송 하사는 보주의 생디에에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는 포로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도망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탈출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쟁 동안 독일로 잡혀간 프랑스 전쟁포로 160만 명 가운데 6만 명만이 탈출에 성공했다. 두 번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1943년 2월 10일, 탈출에 성공했다. 3년 만의 일이었다. 탈주자. 바로 카르티에 브레송의 자랑스러운 메달이었다.


    전쟁이 계속되는 한 그림이나 데생에 몰두할 수 없었다. 그럴 시기도 아니었고, 그림은 집중하는 방식도 다르고 속도도 빠르지 않았다. 사진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도구라 생각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카르티에 브레송은 전쟁 중에 도망가는 동안 급히 라이카를 숨겨두었던 보주의 숲으로 가서 땅을 파헤치고 카메라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 후 단행본 안에 삽입될 예술가들 사진과 해방된 조국의 순간을 찍게 되었다. 하지만 수도의 들뜬 분위기를 맛보는 것도 잠시였을 뿐, 곧바로 떠나야만 했다. 전쟁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쾨니크 장군 휘하의 부대에 소속된 종군기자로 전쟁을 취재했다. 당시 카르티에 브레송은 신문사에 사진을 보내면서 처음으로 길고도 상세하며 명확한 캡션을 첨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신문사 사람들은 물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작업의 진의가 어긋나거나 왜곡되지 않도록 캡션을 달기로 했다. 이후엔 이것이 원칙이자 습관 내지 카르티에 브레송 특유의 방식으로까지 굳어졌다.


    1945~46년 동안 카르티에 브레송의 렌즈에는 무엇이 담겼는가? 3년간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이 엄청난 작업이 이루어졌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예술가, 신문기자, 작가, 시인, 지식인, 데생화가를 가리지 않고 초상사진에 담았다.


    6. 뉴욕에서 뉴델리까지, 1946~1950
    카르티에 브레송은 뉴욕에서 「하퍼스 바자」와 일했다. 그러면서 존 맬컴 브린닌과 함께 책을 낼 생각으로 1947년 4월 두 사람은 자동차를 타고 2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미국 횡단여행을 떠났다. 성과는 거의 없었다. 도리어 두 사람 사이만 나빠졌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미국에 있는 동안 취재여행을 하느라 개인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놓치게 된다. 바로 뉴욕 등기소에 매그넘 포토 사(社)란 이름으로 회사를 등록하는 바로 그 순간을 놓쳤던 것이다. 물론 상징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마땅히 그의 카메라에 담겨 있어야 할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창립 멤버는 모두 다섯 명이었다. 로버트 카파와 일명 침이라 불리는 다비드 스치민,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조지 로저, 미국인 윌리엄 밴디버트였다. 밴디버트가 곧 탈퇴함으로써 인원은 넷으로 줄었지만, 모임을 유지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얄타 회담이 열린 지 2년 후, 매그넘 창립 멤버들은 세계를 그들 식대로 분할했다. 카파와 침은 유럽을 맡고, 조지 로저는 아프리카와 중동, 또 카르티에 브레송은 아시아를 맡기로 했다. 아시아를 맡은 데에는 부인의 영향이 컸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1947년 8월 유엔 정보국 산하 사진 담당자로 임명됨으로써, 세계적으로 식민통치를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려는 활발한 움직임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게 된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정치적 신념이나 기질, 혹은 부인 라트나와의 공감대를 통해서, 탈식민지 문제야말로 전후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되리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인도에서 간디의 죽음 직전의 사진을 찍기도 하고 중국에서 국민당이 붕괴하는 마지막 현장도 사진에 담았다. 카르티에 브레송 부부는 중국에서 홍콩과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이란을 거쳐 귀국했다. 이란 국경 근처에서 이 부부가 타고 있던 자동차가 트럭에 의해 전복되었다. 라트나는 손가락 끝에 유리가 박히는 부상을 입었다. 그 고장의 의사가 유리를 빼낸다는 것이 그만 실수로 신경까지 잘라내 버렸다. 이로 인해 라트나는 더 이상 무용을 할 수 없게 되었다. 1950년 여름의 일로, 카르티에 브레송이 42세이던 때였다. 그는 간디의 죽음을 취재한 공로로 그해 유에스 카메라가 수여하는 최고 르포상을 받았고, 난징과 상하이 사진으로 권위 있는 단체인 오버시 프레스 클럽이 수여하는 상을 받기도 했다.


    7. 세계가 그의 스튜디오이다, 1950~1970
    이제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은 사방에 실리고, 전시되고, 상을 받고, 인용되고, 해석되고, 칭송받고,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20년에 걸쳐 찍은 사진 가운데 126장을 골라 사진집 『재빠른 이미지』를 출간했다. 미국에서는 『결정적 순간』으로 출간되었다. 3년 후, 다시 사진집을 내고 전시회를 열면서 그의 인기는 또 다시 높아졌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은 이런 일화를 소개한다. 기자는 어느 날 자정 무렵 맨해튼에서 카르티에 브레송과 함께 근처에서 술을 마시기로 한다. 한데 카르티에 브레송이 카메라를 들고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아니, 왜, 사진 찍으려고?" "아닐세. 라이카를 놓고 다닐 수는 없어서 그래." 바로 이런 태도, 오로지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에게만 결정적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 매 순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설사 이런 순간이 오더라도 이내 영원히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세계를 누볐다. 자진해서 하는 취재이거나, 매그넘 에이전시를 위한 취재였다. 직업의식이었을까? 차라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천성, 또는 삶의 태도나 세계관이라고 말하는 편이 보다 적합하다. 그의 소명의식인 셈이다. 무엇에 대한 소명의식인가? 바로 시선이다.


    8. 또 다른 삶을 향해서, 1970~
    다시 데생이란 출발점으로 복귀한 카르티에 브레송은 집으로 돌아왔다. 사진을 포기하던 무렵 그는 이사를 했고, 매그넘과 거리를 취했으며, 몇 해 전부터 별거해오던 라트나와 드디어 이혼하고 재혼을 했다. 1970년 카르티에 브레송은 자기보다 서른 살이나 적은 여성 사진작가와 재혼을 함으로써, 마치 자기 직업을 승계하는 것처럼 보였다. 상대는 마르틴 프랑크라는 여성으로, 벨기에 대부르주아 집안 출신이었다. 이제 마르틴과 어린 딸 멜라니를 곁에 두게 된 카르티에 브레송은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동료 사진작가들에게 데생을 찬양하고 사진을 폄하하는 얘기를 함으로써 상대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많은 사진작가들이 화를 냈다. 물론 카르티에 브레송은 자신이 죽는 날까지 재킷 주머니에 라이카를 넣고 다니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영혼은 줄곧 사냥꾼으로 남지만, 사진은 더 이상 취하지 않는 채식주의자 사냥꾼으로 일관하게 된다. 그의 집 벽에는 데생이며 판화며 그림들은 가득하지만, 사진은 한 장도 걸어놓지 않았다.


    삶, 그리고 시선. 카르티에 브레송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이 두 가지뿐이다. 그에게서 호기심이 사라지는 날은 바로 그가 죽는 날이다. 본다는 것은 곧 관습에 맞서서 싸우고, 타성을 벗어던지며, 의외의 순간에 자기를 끊임없이 내던지고, 충동에 복종하며,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비례를 포착하는 일이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언제나 강조하듯이, 바라는 보되 식별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용기가 있었더라면 사진 캡션을 거짓으로 써서 사람들이 오로지 영상에만 신경 쓰도록 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가짜 캡션 덕에 진실이 정확하게 전달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