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청 도서요약
   국내도서 요약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 The Far Eastern General

저   자
마이클 샬러(역자 : 유강은)
출판사
이매진
출판일
2004년 10월







  •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로 유명한 맥아더 장군의 평전. 전쟁 영웅으로서의 맥아더가 아닌 인간 맥아더의 생애와 업적을 비롯해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의 이면을 보여준다. 또한 당시 전 세계와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대한 내용도 엿볼 수 있다.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맥아더의 모습, 맥아더의 네 여자 등에 대해서 다루었으며, 맥아더에 대한 평가들, 한반도와 세계에 맥아더가 갖는 의미를 짚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형성
    더글러스 맥아더는 군인인 아서2세 맥아더와 메리 핑크니 사이에서 1880년에 태어났다. 1880년대 내내 맥아더 가족은 서부와 서남부의 군 주둔지를 전전했다. 어머니는 정계 유력인사에게 추천장을 받아내 아들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시킬 만큼 열성적인 사람이었다. 1899년에 사관생도로 입학한 맥아더는 수석을 놓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유명세 때문에 동기들에게 괴롭힘을 받았다. 1903년 6월에 졸업, 소위로 임관된 더글러스는 첫 임지로 필리핀을 선택했다.


    맥아더가 도착하기 전에, 스페인은 수천 개의 섬으로 이뤄진 이 식민지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반란을 진압하느라 분투하고 있었다. 미 지상군이 마닐라에 도착한 1898년 8월 초에 이미 미국 해군과 아기날도의 반란군이 스페인 수비대를 맹렬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미군 사령관은 스페인의 명예를 해치지 않도록 스페인 측이 저항의 몸짓을 보이도록 허용해주었다. 미국과 스페인이 휴전에 합의한 뒤 6개월 동안 맥아더는 마닐라 점령을 감독했다. 장군은 불만으로 가득한 필리핀 반란자들이 마닐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고, 스페인인들이 본국으로 귀환할 때까지 뒤를 봐주었으며, 다양한 도시 기반시설도 제공했다. 그러나 1899년 2월에 미국 상원에서 전쟁을 끝내고 미국이 필리핀을 통제한다고 결정하자 반란군들은 새로운 식민 지배자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반란군을 상대로 성공적인 지상전을 벌였고, 1900년 5월엔 반란군을 완전히 소탕했다고 선언했다. 워싱턴 당국은 맥아더 장군을 식민지 군정총독으로 임명했다.


    1904년 여름에 말라리아에 감염된 더글러스는 10월까지도 완쾌되지 않아 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1906년 맥아더는 육군부의 명을 받아 워싱턴 DC의 공병학교에 배치되었다. 1917년 4월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자 맥아더 역시 동료들처럼 전투임무를 강력히 요청했다. 전투는 맥아더의 극적인 재능과 군사기술이 꽃을 피울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되었다. 맥아더는 미국과 연합국이 주는 수많은 훈장을 받았고, 야전사령관으로서 재능을 갈고 닦았으며,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1919년 4월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맥아더는 집안의 연줄 덕택에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순조롭게 두 번째 별을 단 맥아더는 직업적인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개인적인 삶은 꼬이기 시작했다. 1927년 부인 루이즈와 갈라서게 된 것이다.


    맥아더는 안식처를 찾아 필리핀으로 향했다. 1928년 말에는 육군의 필리핀 군관구 사령관으로 마닐라로 배속되었다. 50세가 되던 1930년엔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마닐라에서 거의 서른 살이나 어린 혼혈여성 이자벨과 연애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맥아더는 미국에 이자벨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맥아더와 뉴딜, 1933~35
    대공황이 가져온 엄청난 파괴와 참사는 육군 수장으로서 맥아더의 임기를 끔찍하게 만들었다. 임기를 마칠 때까지 장군은 군사비 지출의 엄청난 삭감을 강요한 경제적 재앙과 평화주의라는 정치 분위기에 맞서 분투를 벌였다. 법률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관례상 4년인 참모총장 임기가 1934년 가을로 끝날 예정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빨리 후임자를 발표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1934년 11월에 대통령은 맥아더의 임기를 일시적으로 연장한다고 발표했으며, 한 달 뒤에는 이것을 무기한 연장으로 확대시켰다.


    1900년대 초반에 반란을 진압한 이래로 미국은 점차 필리핀인들을 입법부와 행정부에 참여시켰다. 1920년대 후반에 이르면 필리핀 의회는 미국인 총독의 감독 아래 상당한 권한을 누리게 됐다. 미국은 투자와 이윤이 계속 확대될 수 있도록 식민지를 조용하게 유지하는 데 몰두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중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현지 엘리트들을 활용하는 게 최선의 방책인 듯 보였다. 마누엘 케손 같은 소수의 인물들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이야말로 식민지를 감독하는 간단하면서도 편리한 길임이 입증됐다.


    군관부 사령관으로 가거나 55세의 나이로 은퇴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마닐라로 돌아가 신생 국가의 안보태세 확립을 책임지는 일은 맥아더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로 보였다. 그러나 루즈벨트가 다른 사람을 새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하는 바람에 맥아더는 전(前)육군참모총장으로 마닐라에 도착하는 데다가 계급도 일시적으로 달았던 별 네 개에서 2성장군, 즉 소장으로 강등되었다. 


    필리핀의 육군 원수
    1937년 4월 맥아더는 진 페어클로스와 결혼했는데 그해 말에 맥아더의 군사고문관 임기가 만료될 예정이었다. 맥아더는 건강이 악화된 데다가 자신이 할 일은 모두 마쳤고, 더 많은 하급 장교들에게 승진 기회를 주고 싶다면서 크레이그에게 가능한 빨리 퇴역하고 싶다고 전했다. 육군참모총장과 루즈벨트는 맥아더의 은퇴를 받아들였고, 1937년 12월 31일자로 맥아더는 은퇴했다. 아내는 임신 중이었고 1938년 초에 아이를 낳을 예정이었다. 맥아더는 마닐라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밀워키에서 문화생활을 즐길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두 사람은 수도의 사교계 생활과 마닐라 호텔의 호화스러운 스위트룸을 즐겼다. 맥아더는 이 호텔을 소유한 회사의 동업자가 되었는데, 아마 금광에도 손을 댔던 것 같다. 미국에는 집도 없었고 또 돌아간다고 해도 바로 일자리를 얻을 가능성도 없었다. 


    마누엘 케손은 맥아더에게 독립과도정부에서 직접 임명한 군사고문관 자격으로 필리핀에 머물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맥아더와 케손의 불화가 시작됐다. 1939년 중반, 케손은 군 요직을 교체하면서 맥아더 충성파들 대신 일본의 공격을 견뎌낼 수 있는 군의 능력에 의문을 표해 온 장교들을 새로 발탁했다. 이듬해 케손은 군에 대한 대통령의 개인적 권한을 확대시키면서 대통령과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맥아더의 재량권을 크게 제한했다. 맥아더의 운은 이제 다한 듯 보였다.


    전쟁으로 가는 길, 1937~41
    일본은 동남아로 손을 뻗쳤다. 그러나 태평양에서 미국의 군사력을 증강할 수 있는 예비 병력이나 선박, 무기는 전혀 없었다. 유럽과 대서양을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핵심전선으로 생각하고 있던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상징적인 엄포만으로 일본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맥아더에게 의지했다. 비록 퇴역한 뒤였지만 맥아더는 여전히 미국에서 뚜렷한 입지를 지닌 군 사령관이었다. 맥아더는 자신보다 직급이 높은 동료들보다 이 지역에 관해 더 잘 알고 있었고, 또 몇 년 동안 필리핀이 난공불락이라고 큰소리치기도 했다. 육군부는 더글러스 맥아더 소장이 지휘하는 극동사령부를 새로 설립했다. 극동미육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맥아더는 이제 미 육군 휘하 필리핀 군관구의 정규군뿐만 아니라 미 연방군으로 편입된 필리핀 육군까지도 이끌게 되었다. 맥아더는 임시 육군 준장으로 승진했다. 몇 달 전만 해도 사실상 퇴물이 된 것처럼 보였던 맥아더의 주위로 미국과 필리핀의 지도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10월경에 맥아더는 육군과 해군이 최근 공동으로 작성한 방위계획(무지개5호)에 따르면 자신은 군도 자체가 아니라 마닐라 만과 수빅 만만을 방어하기로 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맥아더는 이런 전략은 사실상 유화정책이라고 비난했다. 워싱턴의 육해군합동위원회는 맥아더를 달래기 위해 더 많은 재량권을 주었다.


    사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 직접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루즈벨트는 영국과 네덜란드 측에 일본이 공격해오는 경우 지원군을 보낼 것이라고 비공식적으로 보증하긴 했지만, 구속력 있는 약속을 하지는 않았다. 모호한 해석을 피하고 이의를 최소화하기 위해, 루즈벨트 대통령과 참모진은 일본이 먼저 발포한다면 미국이 참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12월 7일, 일본 기동부대의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비행기들이 미국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태평양의 후퇴
    진주만 공습은 극적이면서도 갑작스럽게 전쟁을 가져왔다. 아무 저항 없이 공중을 장악하게 된 일본은 12월 22일에 마닐라 동북쪽에 있는 링가옌 만에 주력부대를 상륙시키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침략을 막기 위해 아시아함대의 잠수함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 잠수함들 역시 정박해 있는 선박도 가라앉히지 못할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일본군은 거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상륙거점을 확보했다. 필리핀 육군은 침략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했는데도 48시간 만에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비록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만 필리핀의 미군 방어병력은 영국군이나 네덜란드군에 비해 훨씬 오랫동안 일본에 맞서 저항했다. 바탄과 코레히도르를 5개월 동안 방어한 것은 일본의 전반적인 전쟁계획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이 일 덕분에 맥아더는 전쟁에서 첫 번째로 미국의 영웅이 되었다. 코레히도르에서 3개월을 보내면서 맥아더 사령부는 보도자료를 140건 이상 내보냈는데, 대부분은 맥아더가 직접 쓴 것이었다. 보도자료 대다수는 다른 내용은 전혀 없이 맥아더 장군에 관한 이야기만 언급하고 있었다. 보도자료를 보면 동료 장성들이나 전선의 부대는 전혀 공적을 세우지 못했다.


    일본군이 바탄과 코레히도르 주변을 에워싼 채 포위망을 좁혀 오자, 맥아더는 루즈벨트 정부와 육군의 경쟁자들이 자신을 희생물로 택했다고 확신하게 됐다. 전쟁 초기에 워싱턴에서는 맥아더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려고 했다. 당시 전쟁계획국 부국장이었던 아이젠하워는 맥아더를 지원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를 중계지점으로 활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1월 중순에 이르러 하와이에서의 손실과 일본의 필리핀 봉쇄 때문에 맥아더에게 군수물자를 전달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영국과 미국 지도부는 아카디아 회담에서 일본보다 독일을 먼저 물리치자고 결정했다. 때문에 필리핀을 위해 더 노력하기란 불가능했다. 게다가 2월에 싱가포르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가 함락되면서 맥아더를 지원해야 할 전략적인 이유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일본은 1월 중순에 이르러 바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맥아더의 전투뿐만 아니라 질병과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필리핀 부대는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필리핀에서의 군사적인 패주 외에도 마닐라 엘리트 집단의 오랜 친구들이 등을 돌린 것도 맥아더를 괴롭게 만들었다. 일본 군 당국은 마닐라를 접수하자마자 필리핀 관리들에게 현재 직책을 그대로 유지하라고 했다. 정복자들은 협력의 대가로 조기 독립을 약속했다. 소수 독재정치의 지도자들은 일본이 승인한 행정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으로 부응했고, 이 위원회는 곧 꼭두각시 정권의 중핵이 되었다. 친구들 대부분이 협력에 가담한 데 충격을 받은 케손과 맥아더는 둘 다 서로에 대한 충직을 다시 확인할 방도를 찾았다.


    케손은 필리핀의 즉각적인 독립을 승인하고 자신이 일본군과 미군의 동시 철수를 교섭하도록 허락해달라고 워싱턴에 제안했다. 맥아더는 이 제안을 공식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대를 제기하지도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미국 관리들은 케손의 요구에 충격을 받고 분노했다. 맥아더의 암묵적인 지원에 대해서도 분노를 표시했다. 루즈벨트와 마셜은 맥아더에게 코레히도르를 떠나 오스트레일리아에 집결해있는 군대의 사령관 자리를 주었다.  


    태평양전쟁과 미국의 정책
    미 해군은 필리핀을 우회하는 방식으로 태평양 중부에서 대규모 공세를 벌이라고 촉구했다. 맥아더에게 동정적인 육군의 전략가들은 해군이 맥아더의 전역(戰域)을 니미츠 제독의 통제 아래 놓는 것을 저지하는 데 겨우 성공했다. 카사블랑카 회담의 타협안에 따라 맥아더와 니미츠는 각자의 작전권을 그대로 승인받았다. 그러나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가 기대했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원만을 서남태평양지역 사령부에 할당했고, 따라서 필리핀을 공격하려는 맥아더의 계획은 좌절될 위기에 처하게 됐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맥아더의 부대는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었다.


    194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이룩한 놀라운 성과는 모든 뉴딜 비판자들을 감동시켰다. 공화당은 하원 47석과 상원 10석을 추가로 획득, 루즈벨트가 없는 민주당 후보단의 약점을 드러냈다. 루즈벨트가 1944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었으므로, 공화당은 백악관을 탈환할 것이라는 전망에 군침을 삼켰다. 대체로 맥아더의 지지자들은 서로 약간씩 겹치는 두 범주 ― 전통적인 고립주의자들과 중서부의 공화당원들 ― 로 이루어져 있었다. 공화당의 아서 밴던버그 상원의원이 맥아더를 공화당으로 데려오려고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후보 지명에서 실패했다. 맥아더는 예비선거에 나서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혹스러운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필리핀과 해방정책
    서남태평양지역 사령부가 동남아시아로 다가감에 따라, 맥아더는 처음으로 다수의 민간인 주민과 식민지 영토의 해방이라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필리핀 망명정부는 케손 대통령과 몇몇 측근, 맥아더의 호의로 이루어진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부통령인 세르히오 오스메냐는 국내에 정치적 기반이 거의 없었고 미국 유력인사들과의 연줄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전쟁 중에 광범위한 기반을 갖춘 게릴라 운동이 태동해 사태가 더 복잡해졌다. 1943년 초, 맥아더는 필리핀 게릴라 운동의 잠재적인 이점과 위험을 인식했다. 게릴라 운동은 필리핀으로 돌아갈 이유가 될 뿐만 아니라 중요한 정보와 지원도 제공했다. 그해에 맥아더는 필리핀 게릴라만을 전담하는 특별참모부를 만들었다.


    레이테 섬을 필두로 필리핀 전역을 해방시키는 일은 맥아더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은 희생과 시간이 소요되었다. 2월 5일, 맥아더 장군은 자신의 군대가 마닐라에 진입했다고 발표하면서 적군의 “괴멸이 임박했다”고 예상했다. 그러나 실은 이제 막 전투가 시작된 것일 뿐이었고, 일본군만이 아니라 필리핀 주민도 괴멸을 당할 지경이었다. 3월 3일에 마닐라 전투가 끝났을 때, 미군 1,200명과 일본군 16,000명, 필리핀인 10만 명이 죽었다.


    일본이 항복한 뒤에 자신이 일본 점령군 사령관으로 선택될 공산이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맥아더는 마닐라에서 맡고 있던 여러 책임을 서둘러 털어버렸다. 맥아더는 필리핀 독립을 축하하기 위해 1946년 7월에 마닐라를 다시 방문했다. 불충분한 미국의 원조와 지방 관리들의 끔찍한 부실행정으로 이 나라는 1년 전에 비해 훨씬 가난해져 있었다. 실제로는 독립에 수반된 여러 조건 때문에 필리핀은 계속해서 미국에 구속당했다. 미국은 광대한 군사기지 소유권을 계속 유지했으며, 필리핀 거주 미국인들은 헌법에 따라 “사업자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두 나라 사이의 경제적 연관 역시 무역과 원조라는 양날의 칼을 통해 여전히 식민지-종주국의 특성을 유지했다. 게다가 미국식 탈식민화 정책은 프랑스와 네덜란드, 영국 등이 보유하고 있던 아시아 식민지들의 고난에 찬 운명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행선지 ― 도쿄
    일본이 항복하기 전의 몇 달 동안, 맥아더는 전쟁을 마무리할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워싱턴의 고위 당국은 일본과의 협상이나 연합국간의 정책 조정, 전후 계획 입안 등에 관해 장군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8월 10일경 맥아더는 트루먼이 자신을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루즈벨트의 죽음과 “오키나와에서 발생한 해군의 커다란 손실”에 대한 비판, 우호적인 “국민 여론” 등으로 맥아더는 유일한 최고사령관 후보가 되었다. 임명 조건에 따라 맥아더는 공식적인 항복을 처리하고 스스로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수준에서 일본을 “지배”하는 전권을 부여받았다. 8월 15일에 대통령이 발표한 일반명령 1호는 더 나아가 맥아더에게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감독할 권한까지 주었다.


    최고사령관
    연합국 최고사령관에 오른 맥아더는 1945년 8월 30일에 일본에 입국했다. 맥아더로서는 마침내 평생 동안 준비해 온 권한과 책임을 누리게 된 것처럼 보였다. 현역에서 은퇴(장군은 이제 65세였다)해 일반인으로 돌아가는 대신, 7천만 국민 위에 군림하는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이 자리는 맥아더에게 명예와 의욕을 주었을 뿐 아니라, 차기 대통령선거 때까지 3년 동안 장군의 이름이 계속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만들어주었다. 점령은 출발점부터 최고사령관과 동의어였다. 맥아더는 명목상으로는 연합군 사령관이었지만 언제나 미국의 관리로 행동했다. 맥아더는 일본과 남한에서 점령군을, 1947년 이후에는 이 지역을 아우르는 극동지역사령부를 지휘했다.


    1945년에서 1950년 사이에 맥아더는 기업 연합체의 보존과 해체, 노동조합의 보호와 억압, 일본에 주둔하는 미국의 상설 군사기지의 금지와 구축, 소련과의 강화조약 체결에서 대소련 협력과 배제, 1945년에 창설된 연합국 협의기구들에 대한 무시와 활용 등을 번갈아가며 주장했다. 트루먼 행정부가 옹호한 정책 역시 이 시기 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두 경우에 변화의 이유는 뚜렷하게 달랐다.


    맥아더는 어떤 이데올로기적 또는 지정학적 비전보다는 정치적인 야망과 개인적인 좌절의 양극에 나침반을 고정시켰다. 워싱턴의 비판자들은 맥아더가 시시때때로 새로운 태도를 보이는 모습에 혼란스러워하거나 격분했다. 일본 점령은 맥아더가 자신의 행정 능력과 정치적인 재능을 군사영웅의 자질과 결합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할 전례 없는 기회였다. 패배한 적을 재건함으로써 미국을 이끌 능력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 정치라는 프리즘은 맥아더의 행동을 계속해서 굴절시켰다. 한 장교가 언론인인 마크 게인에게 말한 것처럼, 맥아더는 자신이 66세가 된 지금 다가오는 대통령선거가 “자신이 직접 뛰어들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마지막 선거”임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장군이 어느 쪽이든 한번 해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점령하의 일본과 미국의 정치, 1945~49
    1945년 11월, 맥아더 사령부는 재벌 지주회사를 해체한다는 내용의 ‘연합국 최고사령관 지령 제244호’를 발표했다. 맥아더는 이전의 군사시설을 민간 생산에 없어서는 안 될 산업으로 재분류하도록 허용해 몰수를 면제해줌으로써 배상 프로그램의 토대를 무너뜨렸다. 맥아더가 근본적인 경제개혁을 위한 계획을 방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워싱턴의 많은 정책 입안자들은 크게 놀랐다.


    경제는 하향곡선을 긋고 있었다. 이 지루한 교착상태는 생산의 하락과 실업 증가, 극심한 인플레이션, 무역적자 확대 등으로 이어졌다. 육군의 ‘점령지역 행정구호 계획’은 대규모 기아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식료품과 의약품, 연료 등을 제공했다. 그러나 법률에 따르면 이런 원조(연간 약 4억 달러)는 경제회복을 위해 사용될 수 없었다. 맥아더와 그의 최고위 경제 보좌관인 마쿼트 장군은 여전히 경제 문제를 전쟁 탓으로 돌렸다.


    1947년 3월에 발표된 트루먼 독트린과 그 직후 제안된 유럽부흥계획(마셜계획)은 독일과 일본을 미국 대외정책의 중심축으로 세웠다. 트루먼 행정부에서 맥아더의 반공주의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세계정세에 대한 장군만의 기이한 반응에 정부는 처음에는 놀라고 그 뒤에는 분노했다. 「네이션」이나 「뉴리퍼블릭」, 「뉴스위크」 등은 일본 점령이 위험할 정도로 ‘왼쪽’으로 빗나갔다며 비난했다.


    1947년 말에 일본에서 강화회담을 조정하려 한 맥아더의 실패한 노력은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것이었다. 맥아더는 국민들이 전시의 적국과 첫 번째로 맺는 강화조약을 열렬히 환영할 것이고 또 일본 독점기업에 대한 자신의 공격에 박수갈채를 보낼 것이라고 추측했다. 자신의 계몽된 보수주의를 입증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증거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 무렵 조지 C. 마셜 대신 아이젠하워가 맥아더의 주된 적수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출마를 포기했고 맥아더는 위스콘신 주 예비선거에서 패배했다. 대통령 자리는 트루먼에게 돌아갔다.


    1949년과 1950년에 맥아더는 본국 정부와 함께 권위의 허구를 떠받치긴 했지만 어느 정도 명목상의 대표성만 가진 채 도쿄에 머물렀다. 맥아더가 정부의 지시를 따르는 한, 그냥 그 자리에 내버려두는 게 양쪽 모두에게 제일 편한 것처럼 보였다. 도쿄에서 할 일이 점점 줄어들게 되자 맥아더는 아시아의 다른 지역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혼돈의 경계 ― 아시아의 냉전
    1950년 6월 이후 맥아더는 한국과 거의 동의어가 되었다.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일본의 식민지인 한국에 점령군을 파견할 계획이 없었다. 워싱턴 당국은 전후의 신탁통치 문제를 놓고 소련과 결혼에 이르지 못한 논의를 벌였지만 소련군이 한반도를 해방시키는 데 대해서는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945년 8월에 이르자, 소련의 동북아시아 구상에 대해 우려하게 된 트루먼은 서둘러 일본에 제시한 평화협정 조건을 완화하고 한반도의 38도선 남쪽을 점령지역으로 요구했다. 스탈린은 한국에 관심이 없었던지, 아니면 자신이 유연한 태도를 보이면 트루먼도 일본에 대해 소련에 비슷한 권리를 줄 것이라고 기대했든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워싱턴 측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한국 남부는 맥아더의 점령지역으로 편입되었다.


    한국전쟁 시작되다
    1950년 6월 25일, 훗날 맥아더가 한국의 충돌을 표현한 바에 따르면, “마르스(Mars, 전쟁의 신)가 옛 전사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 70세의 장군을 정치와 전쟁의 무대로 다시 이끌어냈다. 7월에 북한군은 한국군의 저항을 산산이 짓밟으면서 남쪽으로 꾸준히 전진했다. 일본에서 제한된 병력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맥아더는 부산항 주변에 방어선을 세우는 데 열중했다. 지상은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극동공군은 신속하게 공중에서 우위를 잡았고 이 제공권은 이후 한번도 심각한 도전을 받지 않았다.


    9월 15일, 거대한 규모의 함대와 해병대가 부산 방어선으로부터 북쪽으로 거의 2백마일, 서울로부터는 20마일 거리에 불과한 서해안의 인천항을 급습했다. 동시에 제8군이 부산에서 공세를 벌였고, 며칠 만에 적군은 전속력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공산군은 38도선을 향해 달아났고, 9월 28일에 미군 부대가 서울을 탈환했다. 이런 군사정세의 갑작스러운 반전은 맥아더에게나 트루먼 행정부에게나 극적인 파급효과를 미쳤다. 인천상륙작전은 모든 군과 민관관리들이 반대한 계획이었다.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대단히 크고 개펄이 넓은 데다 높은 방파제가 있어서 상륙작전을 하기에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 맥아더는 이런 요인들 때문에 오히려 기습공격이 가능하다고 반박했다. 불행하게도, 11월 25일에 중국인민지원군 병사들이 한국 산악지역에 떼를 지어 나타났고, 이로써 전쟁의 추이와 미국의 정책, 그리고 맥아더의 인생이 뒤바뀌게 되었다.


    완전히 새로운 전쟁
    1950년 11월 25일, 30만에 이르는 중국군과 약 6만 5천 명의 북한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했다. 11월 27~28일에는 워싱턴의 관리들도 전투의 규모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고, 12월 1일까지 유엔군은 총 11,0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이로써 맥아더의 사령부가 괴멸되거나 한반도 밖으로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무시무시한 우려가 제기됐다. 미국의 목표는 거의 즉각적으로 수정되어 한국 통일안은 사라지고 38도선 부근에서 휴전을 모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맥아더는 한국과 동아시아에 대한 정부의 우선순위가 자기와는 급격하게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맥아더는 전쟁을 확대해야 한다고 워싱턴을 압박했지만, 다음해 3월 중순에 이르면 군과 민간을 망라한 트루먼의 조언자 대부분은 대통령이 중국에게 평화회담을 직접 호소하는 내용을 발표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맥아더가 사사건건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에 불만을 표하고 지시를 따르지 않자 트루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트루먼은 “극동장군과 관련된 상황은 이제 정치적인 문제가 되었다”라고 집무실 탁상달력에 끄적였다. 대통령은 이미 “극동의 거물장군을 소환해야 한다”고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사라지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소환한 일로 격렬하게 공격 당했다. 일부 성난 시민들은 트루먼의 꼭두각시 인형을 만들어 불태웠고, 십여 개 주의 주의회에서는 맥아더를 지지하거나 대통령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보수적인 신문과 정치인들은 정부와 민주당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에 유약한 태도를 보인다고 여겨지는 사람들까지 극렬하게 비판했다. 많은 상원의원들 역시 트루먼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믿었다. 갤럽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3분의 2가 소환에 반대했고 트루먼을 지지하는 쪽은 4분의 1에 불과했다. 맥아더가 도쿄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는 동안 거친 공항마다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장군의 얼굴을 보기 위해 운집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는 50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공항에서 호텔까지 가는 길을 따라 모여들었다.


    맥아더는 화려한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군대에서 52년을 복무한” 장군은 젊은 날 막사에서 부르던 구슬픈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 이 노래에 나오는 노병처럼 저는 이제 군인의 삶을 끝내고 사라질 뿐입니다 ―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자기의 임무를 완수하려고 노력했던 한 명의 늙은 군인으로서 말입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맥아더가 모습을 드러내는 곳마다 인상적인 애정 공세가 쏟아졌지만 그렇다고 장군의 전쟁전략이나 아시아 정책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맥아더의 해임과 극동의 군사적 상황에 대한 청문회가 있었고 청문회는 조용히 끝났다. 맥아더는 전국 순회연설을 시작해 1952년 공화당 전당대회까지 전국을 돌았다. 제복을 입으면 여전히 위풍당당한 인물이었던 맥아더는 아시아에 대한 유화정책, 뉴딜 자유주의, 해리 트루먼, 높은 연방세 등을 공격했다.


    어쩌면 맥아더는 여전히 대통령 자리를 노리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1944년과 1948년에 그러했듯이, 후보지명을 얻기 위해 조직적으로 노력하지는 않았다. 과거에 실패로 돌아간 선거운동처럼, 맥아더는 전당대회가 교착상태에 빠져 자기를 후보로 내세워주기를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맥아더는 생의 마지막 10년 동안 대외정책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고 그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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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