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청 도서요약
   국내도서 요약 

한반도

저   자
윤호근
출판사
을유문화사
출판일
2006년 04월







  • 이산가족의 아픔과 초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흔들리는 분단국가, 한국의 외교관이 겪은 삶과 애환을 그린 윤호근 자전적 에세이집.



    한반도


    소년, 청년 시절의 추억
    나는 한일병합 후 15년 뒤인 1925년 함경남도 홍원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해에 독립운동 용의자로 투옥되어 내가 세 살 되던 해에야 풀려나셨다. 어머니는 교육열이 뛰어나신 분으로, 다섯 살이 된 나를 서당에 보내 한문을 배우게 하셨고 홍원에 유치원이 생기자 유치원으로 옮겨주셨다. 여섯 살이 됐을 땐 전진소학교에 입학했는데 5학년 때부터 모국어를 쓰면 안 된다는 사실에 불편함과 서먹서먹함을 느꼈다. 교실에서는 한국말을 쓰면 벌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말만 써야 했지만 운동장에서는 모두가 우리말을 썼다. 1930년대 말에는 고유의 이름을 버리고 일본식 이름을 써야 했는데 나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모님은 히라누마 히로요시라는 새 이름을 붙여주셨다.


    아버지는 홍원군 일대를 두루 다니며 약과 일용품을 팔았고 어머니는 조그마한 과자가게를 운영하셨다. 어려운 살림이지만 호숙 누님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고 누님은 교원시험에 합격하여 공립 소학교 교사가 되었다. 우리 가족의 주된 수입원은 누님의 월급으로 메워졌다. 나는 1937년에 전진소학교를 졸업했지만 성적은 그저 그랬다. 함흥으로 가서 영생중학교의 입학시험을 보았으나 1939년, 세 번째에야 간신히 입학할 수 있었다.


    일본 전투기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에서 전쟁이 시작된 것은 1941년 12월 8일이다. 나는 등교하면서 건물 벽면에 이 뉴스를 보도한 특별 게시판을 보았다. 학교에서는 교장 선생님이 상기된 얼굴로 일본이 미국,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노라고 발표했다. 일본군은 즉각 파죽지세로 승리할 것이라고 했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우리들은 선전조직이 떠드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 당국은 각 중학교마다 다섯 명씩 묶어 소대를 만들어 훈련시켰다. 1943년에 들어서자 물자와 병력 부족이 심각해져 일본의 확실한 패전 조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정상적으로 졸업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일을 하기 위해 졸업을 1년 앞당길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었다.


    나는 홍원으로 돌아가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매부의 소개로 홍원상업조합에서 일하게 됐다. 그렇지만 사실 소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나는 도청에서의 자격시험에 합격해 2주간의 엄격한 지도교육을 받았다. 우리 가족은 내가 월급도 전보다 많이 받고 존경받을 수 있는 직업인 교사가 된 것을 매우 기뻐했다. 19세 때, 나는 모교인 전진소학교로 발령받았다. 나는 아이들을 산으로 데려가 우리나라 노래를 가르쳤다. 엄격히 금지된 일이었지만 학교에서는 우리말을 못 쓰게 했고, 봉숭아는 민족주의적이고 반식민지적인 뜻을 담은 노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1944년 겨울에 돌아가셨다. 폐렴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나는 호주로서 6명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병역 면제판정을 받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고 우리나라가 해방되었다. 나는 10월에 동료교사 한 명과 서울로 왔다. 소련군의 감독 아래 법과 질서 유지를 맡은 공산주의자들은 38선을 넘어 남쪽 미군 점령 지역으로 넘어가는 자들을 모두 배신자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계획도 비밀리에 추진해야 했다.


    서울
    살아가려면 일자리가 있어야 했다. 마침 미군정청에서 통역을 모집 중인 사실을 알고 응시하기로 했다. 미군정 당국은 한국의 정치 무대에서 우익과 좌익의 협력을 강화시켜볼 속셈으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중간파 사회주의자 등 지도자 간의 대화를 촉진시키기 위해 그들의 차량에 휘발유를 대주었는데 나는 정치 지도자들 가정에 휘발유를 운반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거기에는 보수파를 대표하는 이승만 박사, 공산당의 박헌영 당수, 망명 정부의 주석이며 민족주의자인 김구, 중간파의 김규식, 사회주의자인 여운형 등 많은 인사들이 포함돼 있었다. 특히 이 박사의 상급 참모들과 안면을 익히게 되었다. 미군정청의 윌버 대위는 내가 소학교 교사였다는 것을 감안해 자신이 귀국하기 전인 12월에 내가 문교부에 일자리를 얻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영어학원의 2년 과정 강습반에 등록했다. 미군 군정에서 경영하는 학원이었는데, 강사진은 모두 군인이었다.


    미국 정부는 소련과 아무런 합의도 이루지 못한 채, 1947년 가을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넘겼다. 유엔은 소련이나 그 외 위성국가들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유엔의 감시 아래 한국에서의 자유선거를 실시할 것을 승인했다. 북한의 선거 거부로 선거는 38선 이남에서만 실시되었고, 남한에서 새로운 독립국가가 탄생했다. 이어서 1948년 5월에는 이승만 박사가 제헌국회의 의장으로 뽑혀 한국의 헌법을 기초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 의장은 나에게 외국 기자단과 섭외하는 일을 맡기고 싶어하셨다. 나는 문교부를 그만두고 제헌의회에서 일하기로 했다. 국회업무를 통해 정치계의 유명인사들과 아는 사이가 된 것은 내게 행운이었다. 1948년 8월 15일, 한국의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축하하는 기념식이 중앙청 광장에서 열렸다. 스물셋이었던 나도 이 광경을 보며 큰 감명을 받았다. 이 대통령이 시행한 최초의 일은 유망한 젊은이들을 미국 대학에 보내 교육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정부 각 부처에서 열다섯 명이 후보로 뽑혔다. 나는 대통령 덕분에 선발되었다. 나는 캘리포니아대학에서 국제관계에 대해 공부하기로 했다.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나의 꿈은 부풀어올랐지만 결핵 때문에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1949년 가을, 나는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현재의 청와대)에서 외무부로 발령받고 외무장관 수석 비서관이 되었다. 임병직 외무장관은 1950년 봄, 나를 도쿄 주재 외교대표부에 보냈다. 나는 외교에 대한 개인적 훈련도 마치지 못한 상태여서 당황했지만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일본에 와 있을 때 6.25전쟁이 발발했다. 서울에 있는 가족과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한국 정부가 계속 후퇴해 대구까지 밀려오자 일본 적십자사에 의료장비를 요청하고, 도쿄역에 나가서는 한국인 학생의용군을 전선에 내보냈다. 요코하마항에 가서 일본조폐공사가 찍어 부산으로 보내는 한국 통화 적재화물을 확인하기도 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9월, 이승만 정권은 부산으로 쫓겨내려갔다. 그 와중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나를 다섯 명의 젊은 외교관 중 한 사람으로 뽑아 워싱턴으로 보내 국무성 외무연수원에서 3개월간 외무훈련코스에 참가시키기로 결정했다. 나는 2주일 이내에 짐을 꾸려 워싱턴으로 떠나야 했다.


    미국에서의 모험
    외무연수원에는 7개국에서 온 14명의 젊은 외교관이 있었는데, 그 중 한국 출신이 5명으로 제일 많았다. 나는 여기에서도 또 한 번 좌절을 맛보았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로 인한 폐질환에 걸렸던 것이다. 나는 즉시 격리 병동으로 이송되었다. 전쟁은 쉬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고 내 병원비는 대사관 재정에도 부담이 되었다. 나는 자선 요양원을 물색하기 시작했고 결국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의 장로병원이 나를 무료로 받아주기로 했다. 1952년 봄에는 제법 건강을 되찾았다. 나는 반 아주머니와 주치의가 모아준 장학금으로 8월부터 켄터키주 모어헤드대학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공부에는 재미가 붙었으나 한국에 남은 가족의 안부가 걱정되어 마음은 늘 무거웠다.


    1953년 5월 말, 휴전회담과 교섭이 진전되어 머지않아 전쟁이 끝날 것 같다는 한국의 소식이 나를 희망에 부풀게 했다. 나는 이곳에서 학업을 계속할지, 아니면 한국의 가족들에게 돌아갈 것인지를 고민했다. 결국 나는 모어헤드를 떠나 워싱턴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워싱턴을 거쳐 뉴욕으로 가서는 박물관과 공립도서관을 다니며 방랑자로 살았다. 7월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나는 부산 피난민촌에 가서 가족들과 재회한 후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남동생 호일은 전쟁 중에 행방불명이 되어 볼 수 없었다.


    기자생활
    외교부의 가건물 청사를 방문했다. 친구 이수영은 정보국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내게 외무부로 복귀해서 문화 부문을 맡아 일해보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 몇 주일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예상한 대로 그의 제안은 벽에 부딪혀 있었다. 어느새 나는 경무대의 기피인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예전에 일하던 조선호텔을 찾았다. 외신기자 한 사람이 나를 칵테일파티에 초대했다. 이 파티에서 「뉴욕타임스」의 빌 조던 기자를 만났다. 조던은 마침 「뉴욕타임스」 서울지국에서 일할 한국인 통역관을 구하고 있었다. 나는 여지껏 생각하지도 못했던 신문기자, 그것도 「뉴욕타임스」의 특파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나는 「뉴욕타임스」로부터 고정급으로 매달 700달러를 받게 되었다. 당시 한화로 취급하면 상당한 금액이었다. 1956년부터는 내 이름이 들어간 기사를 쓰기 시작했고 기자로서의 이력도 다져나갔다.


    1960년 대통령 선거 때 투표 과정에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비난이 이는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이 제4대 대통령에 재선됐다. 그 뒤 대학생 데모가 전국으로 퍼졌고, 고등학생까지 참가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데모에 가담하는 가운에 사회질서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열일곱 살의 김주열 군이 산탄에 맞은 채로 마산항에 떠올랐다. 나는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마산으로 내려갔다 올라오는 길에 경찰을 지휘하고 있던 홍진기 내무장관을 만나러 갔다. 내가 보고 온 것을 알려주려고 했지만 그는 현지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4.19혁명으로 12년 동안의 이승만 독재정권은 붕괴되었다. 대통령은 그때 이미 여든다섯 살이었다.


    1961년 5월, 쿠데타가 일어났다. 박정희 소장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수천 명의 부대원이 시내로 돌입해 정규군 부대와 충돌했다. 방송 프로그램이 중단되고 "군사혁명에 의해 부패하고 무능한 장 정권이 타도되었다"는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집을 뛰쳐나와 지국으로 향했고 경무대에서 이 사건을 취재했다. 장 정권 붕괴와 동시에 국회가 해산되고 박 장군이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을 총리 겸 외무장관에 임명했다. 쿠데타 지도자들은 즉각 국가재건회의를 설치하고 이 최고회의가 입법기관에 준하는 역할을 하게 했다.


    신출내기 대사 시절
    7월 초 어느 날, 외무부의 친구 방덕희 차관에게 연락이 왔다. 새로 들어선 정권은 미국에 정통하면서 그곳의 많은 인맥과 통하는 사람을 워싱턴에 보낼 필요를 느꼈다. 방덕희는 내게 외교관을 제의했다. 내 평생 소원이 이뤄질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내 나이 벌써 서른여섯이었다. 외무부는 나를 참사관급 촉탁으로 워싱턴 대사관에 파견했다. 나와 아내는 8월 초에 두 아이를 데리고 워싱턴으로 향했다.


    주미대사의 임무는 박정희 장군과 케네디 대통령의 회담을 주선해 양국 간의 전통적 우호관계를 회복하는 데 있었다. 나는 박 장군의 워싱턴 방문의 세부사항을 결정하기 위해 미 국무성과 교섭하는 역할을 맡았다. 박 장군은 국가원수는 아니었지만 실질적인 정부의 수반이었으므로 의전 문제가 큰 걸림돌이었다.


    나는 5.16군사쿠데타 1주년 기념일에 군사정권의 의미에 관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워싱턴과 필라델피아, 뉴욕, 보스턴을 연결하는 공영방송으로서 나 이외에도 미국 사회의 저명 인사들이 함께 했다. 나는 1시간 반 동안 진행된 이 프로그램에서 여러 번 신랄한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특히 군사정권이 헌법에 따라 탄생한 장면 정권을 쓰러뜨린 일이라든가 군사정권에 의한 인권의 무시를 강렬히 비난했다. 나는 정권의 근본 정책을 대변해야 했기 때문에 곤란한 입장에 처했다. 나는 군사쿠데타??가 사회질서의 붕괴와 혼란의 결과로 불가피하게 일어났다고 강조했다. 현재 한국은 우선 빈곤부터 벗어나야 하는 상황이며 생활수준이 향상되면 민주적 참여에 입각한 정치가 강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62년 가을,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정부기구의 개편으로 공보담당 업무가 공보부 소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국가고등전형 시험을 치르고 외무이사관직을 얻게 됐다. 1963년 봄 대사관 차석 참사관으로 멕시코시티의 대사관으로 발령받았다. 그리고 2년 후, 박정희 대통령의 워싱턴 국빈 방문을 준비하게 됐다. 대통령이 미국에 도착했을 당시 「타임」지가 대통령에 대한 커버스토리를 실었다. 뉴욕에서는 오픈카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대통령이 베트남전에 동맹국으로서는 최대 규모인 5만 명의 파병을 결정한 것이 미국 시민에게는 대단히 환영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대통령의 말레이시아, 타이, 타이완 국빈 방문을 준비했다. 그러던 1966년 초, 외교 경력상의 위기를 맞았다. 주한미국사령관의 오만한 태도를 참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지위가 강등된 채 스웨덴의 스톡홀름으로 발령이 났다.


    스톡홀름에서 뉴욕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다
    스톡홀름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지낸 4년간의 생활은 외롭고 음울했다. 1969년 12월에는 레바논의 베이루트, 72년에는 핀란드로 발령받아 통상대표부를 설치했고, 핀란드에서는 드디어 핀란드 대사가 되었다. 1974년 초, 매부가 핀란드로 찾아왔다. 매부는 누님이 내가 중학교를 다녔던 함흥에서 교육위원이 되어 공산주의 교육 지도를 담당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자신은 함흥의 과학기술대학 학장이며 해외에서 각국의 교육사를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 북한의 고관이었다. 그러나 매부가 이런 돌연한 방문으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는 의문이었다. 며칠 뒤 나는 매부와의 만남에 대해 외무부로 상세한 내용을 보고했다. 대사관의 정보부 요원은 매부의 방문을 즉시 자신에게 알리지 않은 데 대해 불쾌함을 표시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북한이 남한 대사를 접촉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매부와 저녁을 먹은 지 이틀 뒤에 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북한으로 돌아가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매부의 목소리는 필사적인 애원처럼 들렸다. 나는 누군가 내 전화를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도 의식하고 있었다. 마음 아팠지만 매부에게 이제 다시 만날 필요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외교관으로서 북한과 거래를 하는 것은 반역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 일로 나는 중앙정보부에서 몇 시간 동안 심문을 당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공관장 회의가 있었고 2주일 뒤에 외무부에서 전신이 왔다. 나를 포르투갈로 이동시켜 리스본에 한국 대사관을 설치한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파리 주재 대사가 포르투갈 대사를 겸임했었다. 임무를 달성하고 1977년 8월에는 뉴욕으로 건너갔다. 나의 임무는 한국인에 의한 로비활동이 광범위하게 폭로되어 미국의 언론에 퍼진 한국 정부의 안 좋은 이미지를 바로 잡는 일이었다.


    1978년 가을, 딘킨슨 뉴욕 시장이 한국 커뮤니티가 확대되었음을 인정하여 뉴욕시 역사 이래 최초로 한국의 날을 선포했다. 나는 총영사 자격으로 참가했고 대규모 퍼레이드의 선두에 서서 시장과 나란히 미드타운에서 메이시 백화점 앞까지 브로드웨이를 누볐다.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뉴욕에서의 3년 반의 근무를 마치고 1980년 12월 중순쯤 서울로 돌아왔지만 한국의 정세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15년 만의 귀국이라 아내는 흥분했다. 1981년 2월 말까지는 외무부 본부 대기 대사로 임명한다는 통지를 받았으나, 전두환 장군이 스스로 대통령이라고 공식 선언하기 바로 전날, 수십 명의 직업외교관들과 함께 사실상 해임되었다. 정부의 공식 통지로는 나는 동료들과 함께 내가 의원면직(스스로 칭하여 사임)한 것으로 되었다. 나의 기나긴 외교관 생활은 이렇게 종지부를 찍었다. 당장 가족의 뒷바라지가 문제였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두 아이들에게 돈을 송금하기 위해서는 기를 쓰고 일을 찾아야 했다. 나는 생각한 끝에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나는 미국에 있는 옛 친구들에게 어렵게 편지를 적어 내 처지를 설명하고 도와달라고 했다. 몇 주일이 지나 몇몇 친구들로부터 성의 있는 답장이 왔다. 애틀랜틱리치필드사의 로버트 앤더슨 회장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회사 본부의 국제관계컨설턴트직을 맡아달라고 했다.


    미국 영주권을 얻다
    아내와 나는 1982년 초 로스앤젤레스로 옮겨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1982~1985년에는 한 해에 두서너 번씩 한국에 와서 가스나 석탄, 화학 등 그 방면의 합작투자 가능성을 타진했다. 알래스카의 액화 천연가스를 일본과 한국에 나르는 운송 프로젝트를 놓고 그 타당성을 시험하는 연구에도 참여하고, 일본과 한국 당국자들과 함께 북극해의 프루도베이도 방문했다.


    1983년 5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누이동생에게 처음으로 1950년에 남동생 호일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때 스무 살이었던 호일이는 전쟁이 시작되자 친구와 남쪽으로 내려와 당시 내가 있던 일본 도쿄로 가고자 했다. 호일이는 그 뒤에 아무 소식이 없었고 우리들은 그가 죽은 것으로 생각했다. 어머니만이 호일이가 살아있을 것이라 생각하셨다. 누이동생 말에 따르면 호일이와 친구는 7월경 대전 부근에서 북한군에 붙잡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친구는 호일이를 배반하고 북한군에게 호일이의 형인 내가 도쿄에서 대한민국의 외교관으로 있다고 폭로했다. 호일이는 적으로 몰려 즉결처분으로 사살되었다. 누이동생은 이 비극적인 비밀을 30년 동안이나 어머니와 내게 알리지 않았다. 나는 누이동생의 이야기로 호일이의 비극적인 죽음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아코사는 1984년에 나를 상근직원으로 발령하려고 나에게 미국 영주권 자격을 취득하라고 말했다. 회사의 담당변호사는 내가 과학, 예술, 문학 등의 저명한 인사가 아니니까 특별취급이 안 될 거라고 하였다. 그린카드(영주증서)를 취득하는 데 2년 정도 걸리니 나에게 미국의 저명한 친구들의 추천서를 되도록 많이 모아보라고 제안했다. 추천서 내용은 내가 미국과 한국의 관계를 긴밀하게 하는데 공헌한 점을 강조하라고 조언했다. 애스펜연구소의 조 슬레이터 소장, 의교평의회의 윈스턴 로드 회장, 프랭크 칼루치 국방차관, 유엔 사무국에서 미국 측 수석 직원인 윌리엄 버펌 사무차장 등 여러 사람이 이민귀화국 앞으로 추천서를 써주었다. 내가 영주 허가를 신청했을 때 일본 고배의 미국 영사가 나의 서류를 보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오버 킬, 다시 말해 넘친다고 했다. 몇 달 뒤, 영주 허가를 얻었다.


    에필로그 ― 대한민국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나는 75년의 인생살이를 겪으며 폭풍 속에서 여러 번 살아도 보았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행운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외교 일을 하면서 다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팔자에 있는 행운과 조상들, 그중에서도 부모님의 은덕이었다.


    한국 사람들 모두가 그러하듯이 나 역시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 속에서 쓰라린 고통을 겪어온 동포들을 위해 긴 세월 동안 인간적인 사회를 마음속 깊이 희망해왔다. 나는 지난 20여 년 동안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1981년 봄, 애정이 깊게 배어있던 외무부를 떠난 뒤 정치적으로 질식할 것 같았던 그해, 또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그때 미국은 나에게 안식처를 제공했고 오늘날까지 자유를 누리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한민국의 외교관으로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던 내게 미국에 충성하면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2003년 9.11뉴욕테러 이후 미국이 시민권자와 영주권자 간의 차별을 시도한다면, 나는 그때 가서 내가 미국 시민이 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죽기까지 대한민국 국적으로 살고 싶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