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청 도서요약
   국내도서 요약 

레오나르도

Leonardo

저   자
마틴 켐프(역자 : 임산)
출판사
을유문화사
출판일
2006년 04월







  • 시대를 앞서간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흔적들을 살펴보는 책. 레오나르도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마틴 켐프 교수는 그의 예술과 과학, 그리고 숨겨진 진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여 한 인간으로서,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본질을 탐구하였다.



    레오나르도


    독특한 경력
    1452년 4월 15일 오전 3시경, 레오나르도는 토스카나 언덕에 위치한 빈치 마을에서 태어났다. 레오나르도의 아버지는 훗날 피렌체에서 저명한 법률가가 되었는데, 1469년에는 정부의 수석법률집행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후 레오나르도는 피렌체로 이사했고 이 즈음 조각가이자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예술가인 안드레아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간 듯하다.


    당시 피렌체는 생동감이 넘치는 콧대 센 도시국가로, 은행과 의류산업으로 경제활동이 활발한 곳이었다. 레오나르도의 경력은 대부분 피렌체 외곽의 귀족 궁정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프랑스 왕가에서 자신의 이력을 마무리했다. 당시 그는 상당한 보수를 받았으며 방대한 토지와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궁정에서는 레오나르도의 다양한 재능에 걸맞는 일감과 보수를 제공했다.


    만일 우리가 <동방박사들의 경배>가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 1478년 피렌체의 정부청사에 놓일 제단화로 주문받은 것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사실, 25년에 걸쳐 제작한 <암굴의 성모>가 최종적으로 그 값이 지불되기 전에 양도되었다는 사실, <최후의 만찬> 작업이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는 사실, 피렌체 의사당을 위한 <앙기아리 전투>가 완성되지 못했다는 사실, 그리고 레오나르도가 제작을 계획했던 기마상 모두가 미완성에 그쳤다는 사실들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마치 한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후원자들은 어째서 레오나르도를 전적으로 지원했을까? 그리고 작품이 후원자에게 전해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그는 다른 지역으로 떠날 수 있었을까? 남아 있는 기록들을 검토하다 보면 분명 그에게는 무언가 독특한 면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궁정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었다. 1478년 1월, 당시 25세였던 레오나르도는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에 있는 유명한 산 베르나르도 성당의 제단화를 의뢰받았다. 이후 그는 그 대가로 3월에 처음 25플로린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고, 결국 필리포 리피가 약 7년 후에 그 제단화를 보완했다. 레오나르도가 어떻게 그처럼 비중 있는 작업을 의뢰받을 수 있었을까? 당시 그의 부친이 정부 행정관이었던 덕을 본 듯하다.


    두 번째 주문은 1481년 7월 메모에 기록돼 있다. 주문에 대한 결과는 "미완성 <동방박사들의 경배>"라고 씌어 있다. 레오나르도는 24개월 혹은 최대 30개월 안에 그 작업을 마쳐야 하고, 그 대가로 프란체스코 형제의 대부 시모네가 수도사들에게 남긴 재산 중 3분의 1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수도사들은 3년 후에는 다시 자신들이 그 재산을 되찾을 수 있다는 조건을 달았다. 레오나르도는 그 계약으로 300플로린의 돈을 챙길 수 있었다. 보통은 100플로린 정도 받는 것이 관례였다. 1481년 이후로는 기록이 없다. 결국 작품을 완성한 사람은 이번에도 필리포 리피였다. 의뢰 받은 일감을 끝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피렌체를 떠날 수 있었던 걸까? 한 가지 가능성은 주문자들의 요구가 고위층에 의해 묵살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레오나르도는 루도비코 공작 밑에서 일하면서 정규적인 급여를 받는데, 레오나르도의 메모와 유언장을 보면 그가 큰 부자는 아니었어도 생애 대부분은 윤택한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는 체사레를 도와 피렌체에 요새를 구축하기 위한 실무 컨설팅도 제공했다. 피옴비노의 요새로 급파된 레오나르도는 산림지의 방화선을 개선하기 위해 작은 언덕의 꼭대기를 밀어버리는 방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지하에서 빠르고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터널을 기획했다. 이는 그의 소묘와 노트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것들을 보면 그를 방문 컨설턴트라고 표현해도 어색하지 않을 듯싶다. 군사설비에 관한 레오나르도의 연구 저작들은 그가 전쟁의 과학에 참여했음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많은 소묘들이 이른바 공학 논문 ― 작업 소묘로 쓰기보다는 업무상 대응 차원에서 후원자에게 자신의 견해를 설득시킬 목적으로 작성된 자료 ― 으로 불린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레오나르도가 민간시설과 군사설비 분야에서 건축과 공학을 통해 실제로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짐작컨대 그는 주로 컨설턴트로, 또 가끔은 현장 감독으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듯하다.


    신체와 기계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에게 주어진 중요한 의무는 인간을 표현하는 뛰어난 기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뛰어난 기술이란 신앙을 표현하는 데 필요한 주제들을 찾아내고 내러티브를 표현하는 면에서 적절한 제스처와 표정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를 위한 주요 특성들은 영성, 아름다움, 그리고 데코룸이었다. 데코룸(예술에서 인물, 행동, 말, 장면 등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에 대한 이해는 화가에게 중요했다. 왜냐하면 알베르티가 강조했듯이, 그것은 기능에 맞는 형식의 적합성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 모든 형상은 그것의 성격, 사회적 위치, 성, 나이 등에 적합한 방식으로, 그리고 주어진 상황에서 비롯되는 감정에 적합한 방식으로 옮겨져야 했다.


    레오나르도는 이런 규칙이 위반됨으로써 야기된 불편했던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최근 수태고지 작품 한 점을 보았다. 거기에 그려진 천사는 마치 성모를 방 밖으로 던져 내쫓으려는 것 같았다. 성모가 천사의 혐오스러운 적이 된 듯했다. 성모는 자신이 마치 창 밖으로 내던져질 것을 아는 듯 절망에 빠져 있었다." 이 무명의 위반자는 아마도 보티첼리였을 것이다. 이후 화가들은 점점 세속적인 주제의 그림을 그렸지만 모두가 데코룸이라는 기본적인 약속을 이행하는 데 충실했다. 고대 신화와 근대 역사에 등장하는 영웅들과 악인들은 모두 전형적인 인물로 그려져야 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는 해부 예술가로 유명했다. 전해지는 일화들에 따르면, 그는 해부 과정에 여러 가지 혐오스러운 면들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부패된 시체들을 이용하여 금지된 비밀들에 접근했다고 한다. 인간의 몸을 전체적으로 해부한 결과에 대한 완벽한 기록이 있다. 해부 대상은 100세로 추정되는 노인이었다. 레오나르도는 1507~1508년 겨울 산타마리아 누오바 병원에서 그 노인의 행복한 죽음을 직접 목격했다. 그 노인은 아마 병원을 포함한 동의의 시스템 하에 레오나르도에 의해 해부되었을 것이다. 물론 해부 뒤에는 적절한 매장이 뒤따라야 했고, 해부 절차에는 여러 가지 규제들이 있었다. 레오나르도가 인간을 해부한 다른 기록들도 있지만 그것은 몸의 특정 부위나 시스템을 대상을 한 것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본다는 것은 매우 직접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레오나르도에게 해부는 근대적인 의미에서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기능적인 것이었다. 그는 항상 자연의 법칙이라는 틀 안에서 기능적인 관점에 따라 형태를 바라보았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그 기능을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그에 상응하는 구조가 존재할 것이라고 추론했다.


    레오나르도의 포부는 단순히 해부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온 인체와 각 세부 기관의 놀라운 형태와 기능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몸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원래의 형태로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분해도를 이용해 그것들을 분리해놓거나, 가끔은 내부를 투사하는 방식으로 그리곤 했다. 또한 요소들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선 다이어그램으로 표현했다. 레오나르도는 19세기까지 교과서에 사용되었던 모든 해부학 삽화 기술들을 시험했다.


    기능과 형태에 관한 신의 섭리에 직면했을 때 공학자가 할 일은 무엇인가? 명확한 기준이 마련된다면 누구도 신이 인체의 완전성 면에서 이룬 성과와 경쟁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 공학자는 필연성의 원리를 따르는 장치를 고안해내고, 자연의 계시에 따라 모든 구상된 형태들이 모자람이나 넘침이 없이 제 기능을 수행하는지를 확인하며 자연의 깨우침에 순종한다. 그러나 분명 인간의 발명은 자연을 흉내내는 차원을 넘어섰고, 자연이 만들지 못한 기계 구조를 만들었다.


    공학자 레오나르도에게 최고의 목표는 비행이었다. 그는 거대한 새, 즉 우첼로를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레오나르도는 처음부터 성공의 관건이 힘과 무게 간의 비율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해박한 해부학 지식으로, 인간의 팔이 새의 날개와 똑같은 구조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우선 그는 새의 비상에 대해 연구했다. 인간의 힘만으로 비슷한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연구를 진행하는 데 기초가 되는 원리들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이다. 1490년대 이전에 이루어졌던 비행 기계 설계에 대한 최초의 시도들 가운데 그는 새와 비슷한 골격을 가진 날개를 구상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다른 근육들, 특히 다리에 움직임을 부여하려 했다. 페달을 밟는 그의 발은 그가 바라던 비상을 이루어낼 만큼 충분히 팔과 가슴 근육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날개들은 나무로 된 뼈, 끈으로 된 힘줄들, 그리고 가죽으로 된 인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소중히 여겼던 설계물들이 비행에 필요한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제 적극적인 글라이딩 전략을 채택했다. 즉 아무런 도움 없이 이륙하기보다는 활주의 경사도, 횡경사, 폭을 통해서 날개와 꼬리에 움직임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날개 설계는 여전히 자연에서 관찰한 것들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는 정밀한 모방이 아니라 원리와 일반적인 배치의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비록 레오나르도가 근대적 의미에서의 날개 설계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을지라도, 그리고 압축되고 희석된 공기에 의해 발생하는 서로 다른 압력에 대해 모호하게 이해하는 수준이었다 할지라도, 자연공학에 대해서는 그의 주장이 어느 정도 타당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훗날 그의 날개 설계도들 중 하나는 영국 베드포드셔의 스카이스포트에 의해 만들어졌고, 쥬디 레든(세계 행글라이더 챔피언)에 의한 시험에서 훌륭한 성공을 거두었다.


    레오나르도가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묘사하고 분류했던 그 설계도들의 핵심적인 특징은 날개의 윗면을 덮고 있는 천에 있는데, 그 천은 날개의 앞쪽 언저리를 감싸고 하부의 뒷부분을 잘 보호하고 있다. 이런 구성은 날개 골격의 모양새, 그리고 그 구조적 완결성과 더불어 1900년 라이트 형제가 시도했던 최초의 비행을 뛰어넘는 성공을 보장할 만했다.


    작품 이야기
    20세기에 레오나르도의 유산에 대한 해석의 초점은 그가 예언적인 과학자이자 기술자였다는 데 맞추어졌다. 따라서 그가 스스로 중요하게 여겼던, 그의 회화 작품들에서의 과학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한편 그가 116권의 도서(당시 아주 부유한 애서가를 제외한 일반인으로서는 상당한 양이다)를 소유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놀라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레오나르도가 기록했던 동물 이야기들은 대부분 플리니우스의 저서와 동물 우화집에 나오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우의적인 연극에서나 실제로 상징적인 암시가 필요할 때 등장시킬 수 있는 캐릭터들의 풍부한 레퍼토리를 제공했다. 레오나르도와 그의 동료들에게 자연이라는 책은 도덕적 함양을 위한 풍부한 학식과 교훈을 담은 것이었다. 레오나르도의 상상력에서 과학과 상징의 영역은 서로 공존했다.


    레오나르도는 작품을 구상하는 첫 번째 과정에서 마구 갈겨 쓰고, 엉켜 있는 복잡한 것에 또 무언가를 덧쓰고, 여기저기 밑줄을 긋고, 종이에 아이디어를 쏟아내면서 브레인스토밍을 했다. 레오나르도는 유연하면서도 도발적인 검정색 초크로 그림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거대한 에너지를 품은 붓에 의해 그려진 선들로 새로운 형태의 동작을 그려나갔을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창조적 과정들 속에는 정확성과 카오스가 공존하고 있다. 이런 소묘들은 결국 물리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역동적인 감정의 차원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인물의 이미지들을 만들어놓았다.


    피렌체 의사당 벽에 거대한 전투 장면을 그리는 것은 일반 가정집에서 사랑스러운 숙녀의 모습을 그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초창기부터 공적인 업무를 자주 맡았다. 그가 체결했던 최초의 주요한 계약들은 피렌체의 팔라초 또는 델라 시뇨리아의 산 베르나르도 예배당 제단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정부 관리들은 그 제단화 앞에서 헌납을 하거나 전시와 평시에 신의 인도를 받기 위해 기도를 올렸다. 결국 레오나르도는 1478년에 계약한 작품을 완성된 채로 넘기지 못했다. 훗날 필리포 리피가 보강한 그림은 필연적으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한 성 베르나르도와 함께 성모, 아기 예수, 성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제단화는 르네상스 시대 주요 공방에서 흔하게 거래되는 예술 품목이었으며, 레오나르도는 그 계약을 따내는 과정에서 선배나 동료들과 경쟁했다.


    벽화 <최후의 만찬>을 감상한 관람객 중에는 이른바 일반 대중들도 있었다. 벽화가 완성된 후 얼마 동안이나 관람이 허락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것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벽화는 즉각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복제되었다. 모사품들의 크기는 다양했으며, 실제 규모와 맞먹는 것도 있었다. 그중에는 롬바드리다 지방에 있는 벽화들과 실물 크기대로 캔버스에 베낀 유화들도 있었는데, 그중 최고의 작품은 현재 옥스퍼드 대학 맥덜린칼리지의 소예배당에 자리해 있다. 벽화 그림을 찍어낼 수 있는 판화가 한 점 제작되었고, 이에 따라 벽화의 본질적인 요소들은 피렌체와 그 외 르네상스 미술의 중심지들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레오나르도의 초상화들 중 오직 한 작품, <모나 리자>에서만 인물이 감상자를 직접적으로 바라본다. 이 사실만으로도 <모나 리자>는 특별하다. 우리는 레오나르도가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부인인 리자 게라르디니에게 빠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모나 리자>의 전체 구성은 비범하다. 우리 눈앞에 있는 여인의 풍만한 몸은 발코니와 그림의 전면 사이에 있는 좁은 공간을 매혹적으로 점유한다. 발코니는 눈에 띄는 은 기둥과 함께 언덕 꼭대기 궁전이나 빌라에 지어지는 위엄 있는 로지아를 암시한다. 저 멀리 내다보이는 경치는 매우 인상적이다. <모나 리자>의 풍경 안에서 이 그림을 인간의 특정 시기로 소급되는 것으로 규정하는 사물은 다리뿐이다. 이 그림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요소들은 뼈를 드러내는 발가벗은 몸처럼 어떤 기본적인 상태로 존재하며, 세계의 모습을 다듬어나가는 날것의 과정들 속에서 자신들의 무정한 길을 따라간다.


    이 그림은 우리 눈앞에 나타난 구체적 인간의 존재에 몰입하게 만든다. 이런 면에서 이보다 더 특별한 이미지는 없었다. 한 개인을 묘사한 그림 중에서 우리의 삶과 다른 사람의 삶이 서로 용해될 수 없다는 진리를 이 그림만큼 보편화한 작품은 없다.


    리자의 방, 레오나르도의 사후
    레오나르도가 사망한 이후 그의 명성은 전문 문필가들의 언어를 통해 전달되었다 ― 아이러니하게도 그 언어들은 각각 다른 관점에서 씌어진 것이었다. 인상적이면서도 매우 읽기 쉬운 예술가 전기인 조르조 바사리의 『가장 저명한 화가들, 조각가들, 건축가들의 생애』는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주요 참고문헌이 되었다. 바사리는 리자, 프란체스코 멜치와 잘 아는 사이였다. 바사리는 다양한 여행을 통해 멜치를 비롯해 레오나르도를 잘 아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바사리는 레오나르도의 생애에 관해 쓰면서 그의 존재가 피렌체 예술의 제3기이자 성숙기 ― 이른바 전성기 르네상스 ― 를 이룩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했다. 그리고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와 더불어 레오나르도가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쟁하고, 고대의 장인들을 넘어서는 면에서 예술이 이룰 수 있는 정점에 섰던 신적인 존재라는 점도 인정했다.


    바사리는 레오나르도의 생애에 나타나는 비예술적 활동에 대해 별다른 이견을 달지 않았다. 바사리는 예술가를 최고의 지성인으로 옹호했던 사람이었고 해부학, 광학, 그리고 다른 관련된 과학들을 배우려는 열정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레오나르도가 학습했던 것들을 비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레오나르도가 실현 불가능한 완벽성과 불가해한 지식을 추구했던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작품의 주제를 조명하기보다는 작가를 칭송하기 위한 말들만 난무하는 예술 비평이 존재한다. <모나 리자> 같은 작품에서 받은 느낌들을 제대로 표현하려 애쓰다 보면 그런 경향으로 빠져들기 쉽다. 그러다 보면 영국의 풍자잡지 「프라이빗 아이」에 등장하는 잘난 척하는 사람을 위한 코너의 소재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나 역시 이쯤에서 글을 맺어야 할 것 같다. 적어도 나는 레오나르도가 자신의 마력을 계속 행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미술사학자로서 내가 할 일을 잘 해왔든 그렇지 못했든 간에 말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