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청 도서요약
   국내도서 요약 

글렌 굴드

Glenn Gould

저   자
피터 F. 오스왈드(역자 : 한경심)
출판사
을유문화사
출판일
2005년 11월







  • 생을 우울증에 시달렸고 청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건반 위의 마술사 글렌 굴드의 삶과 예술세계를 소개하는 평전. 그는 캐나다 출신으로 모든 작품을 자기 스타일로 변주한 진정한 천재였다. 풍부한 이야기와 일화를 들려주며, 화려한 명성 뒤에 숨은 그의 에너지와 모순을 파헤치고자 한 이 책은 불안했던 굴드의 정신적인 면과 병적인 증세를 비중 있게 다룸으로써, 글렌 굴드의 다른 전기들과 구별된다.



    글렌 굴드


    1. 글렌 굴드와 만나다


    연주회
    글렌 굴드와 내가 처음 만났을 당시 굴드는 1955년 워싱턴 D.C.와 뉴욕에서 화제의 연주회를 마친 뒤 미 대륙 횡단 순회연주를 하던 중이었다. 내가 그를 만난 저녁은 캘리포니아 데뷔 무대가 있던 날로, 굴드는 바흐의 바(F)단조 협주곡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부를레스케(Burleske)〉를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로 되어 있었다. 당시 나는 뉴욕에서 정신과 수련을 마치고 캘리포니아 의대에 자리를 얻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유명 피아니스트인 친구가 내게 굴드를 꼭 들어보라고 강력히 권한 바 있었기에 나는 굴드의 연주회에 가보았다. 그는 정말 대단한 연주자였다! 음악을 극히 지적으로 이해하면서 그토록 멋지고 당당하게 몸으로 녹여 보여주는 마술과도 같은 솜씨를 지닌 피아니스트를 나는 떠올릴 수 없었다. 그는 화강암 같은 육중한 몸뚱이를 건반 위로 꾸부정하게 구부리고서 견고한 자세로 거의 움직이지 않는 대신 대신 잽싼 손가락으로 소름이 끼칠 만큼 섬세한 음을 뽑아내곤 했다.


    나는 연주가 끝나자마자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해준 굴드에게 찾아가 오랫동안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1957년에 시작된 우리의 교우관계는 향후 20년 동안 여러 차례 굴곡을 거치면서 지속되었고, 1982년 글렌이 쉰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5년 전에야 끝을 맺었다.


    천재의 어린 시절
    글렌의 어머니 플로렌스 E. 그레이그는 글렌의 아버지보다 아홉 살 많은 여성으로 보통 ‘플로라’로 불렸다. 플로라는 음악에 재능을 타고난 사람으로, 수세인트마리에서 피아노와 성악 공부를 했다. 러셀 허버트라는 이름 대신 버트 골드라고 불리던 글렌의 아버지는 타고난 가수였고, 사고로 바이올린을 더 이상 켤 수 없게 되기 전까지는 바이올린 연주도 즐겨했다.


    1925년 두 사람은 혼인했고, 글렌은 1932년 9월 25일 태어났다. 음악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글렌의 부모는 새로 태어난 아들이 지닌 음악적 재능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글렌이 세 살이 되어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글렌이 절대음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글렌의 부모는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글렌은 글 읽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악보를 읽었다. 게다가 음악적 기억력도 대단해서 방금 들었거나 연주했던 작품은 다 머리에 담을 수 있었고, 심지어 악보로 흘깃 본 것까지도 다 외울 정도였다.



    2. 굴드 사운드의 탄생과 비밀


    새 스승과 도약
    글렌은 일곱 살에 토론토 음악원의 테스트와 시험을 좋은 성적으로 통과했고, 열 살이 되자 그의 어머니는 음악원에 글렌을 등록시켜 수업을 듣도록 했다. 글렌의 음악이론 지식은 매우 초보적인 상태였지만 피아노 연주 실력과 절대음감, 악보를 보고 즉시 연주하고 외우는 신비한 능력, 그리고 열성적으로 부르는 노래는 뛰어났다. 이러한 글렌의 능력은 음악원에서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대중 앞에 지나치게 노출되는 것을 피하고 싶어하는 부모의 보호 때문에 글렌의 일반 공연은 매우 드물었는데 글렌과 그의 가족이 진정한 의미에서 공식 데뷔 무대로 중요하게 손꼽는 공연은 글렌의 나이 열세 살이던 1945년 12월 12일에 토론토의 이튼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연주회로, 이 공연은 언론에서 확실한 호평을 얻었다. 그리고 이듬해 글렌은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느낀 중요한 발견을 했다. 글렌이 모차르트의 푸가 작품 394번을 연주하고 있을 때 집안일을 하는 아주머니가 피아노 가까이에서 진공청소기를 켜는 순간 그의 연주는 기계 소음에 갑자기 파묻히게 되었다. 진공청소기의 소음이 음악을 덮어버리면서 글렌은 자기의 연주를 들을 수 없게 되는 대신 그의 집중력은 몸의 움직임을 내면적으로 감지하는 데로 쏠리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지신의 내부에서 추상적으로 들리는 음악과 실제 악기에서 나오는 구체적인 음악 사이의 차이를 더욱 날카롭게 감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글렌은 급히 외워야 할 악보가 있을 때는 피아노와는 완전히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을 피아노 가까이에 두었으며, 실제 음악 소리에 만족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게 되었다.


    스스로 택한 고독 속에서 빚어낸 굴드 사운드
    열아홉 살이 되자 글렌은 맬번 칼리지에이트 인스티튜트를 그만두고 부모의 오두막에서 혼자 지냈다. 이십대 초반에 보낸 이 은둔의 세월 동안 굴드는 자신만의 독특한 피아노 스타일을 완성해냈다.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뚜렷한 대비, 보통 이상으로 빠르고 느린 템포, 생동감 넘치는 뛰어난 리듬감, 지극히 투명한 터치, 대위법적 특징을 누구보다도 잘 살려내는 능력, 그리고 음악 속에 숨어 있는 내면의 소리를 의식적으로 끌어내는 힘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그의 연주를 독특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행동 습관도 생겨났다. 손가락이 건반 위를 민첩하게 내달릴 때 입술과 치아로도 음악을 따라가느라 그의 입은 쉴새없이 움직였으며, 그의 어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늘 허밍을 하거나 노래를 불렀다. 글렌은 늘 자신의 ‘태도’가 연주의 질을 음악적으로 높여준다고 항변하곤 했다.


    사회적으로 굴드를 ‘괴짜’로 보이게 만든 특성 역시 이때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옷을 많이 껴입고, 유머와 농담을 과하게 드러내며, 병의 징후라고 느껴지는 몸 상태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굴드의 ‘신경증적’ 태도 역시 그의 예술적인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언제나 뛰어난 존재가 되기 위해 애를 쓰며,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했던 글렌은 사람들이 자신의 천재성뿐만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다치기 쉬운 사람인지도 알아주기 바랐다.


    글렌은 이십대에 접어들면서 수련기를 끝내고, 게레로에게 받는 레슨도 중단했다. 그는 점차 자신을 교정해줄 다른 음악가들의 영항권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극단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게 되었다. 그는 항상 자기 식대로 일을 해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미국 정복에 성공하다
    매니저 월터 홈버거가 글렌의 미국 데뷔 무대로 기획한 워싱턴 D.C.와 뉴욕에서의 연주회가 비평가들의 호평을 얻고 이것이 널리 퍼지면서 점차 글렌의 연주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데뷔 무대 자체는 실제로 그의 경력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글렌 굴드가 국제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된 계기는 뉴욕 데뷔 무대가 있기 바로 전날인 1월 10일에 일어난 사건에 있었다. 컬럼비아 음반사의 녹음부 책임자였던 데이비드 오펜하임은 글렌의 연주회에서 그의 연주를 듣고는 월터 홈버거에게 연락하여 컬럼비아 음반사와 계약하도록 했다. 글렌은 고심 끝에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하겠다고 했고, 1955년 6월, 뉴욕이스트 30번가에 있는 오래된 교회에서 녹음을 할 때 기자들이 녹음실에 초청되어 글렌을 지켜보았고, 그는 기분 내키는 대로 인터뷰를 해서 기자들에게 보답했다. 이 인터뷰로 글렌은 단박에 유명인사가 되었고 1956년 음반은 출시되자마자 곧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이후 오늘날까지 잘 팔리고 있다. 이렇게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둠으로써 갑자기 연주해 달라는 요청이 전 세계에서 쏟아져 들어왔고, 그는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했다.


    캐나다의 한 젊은이를 소수의 위대한 세계적 예술가의 반열로 밀어올린 것은 이처럼 바흐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특별하게 녹음하고 잘 홍보한 미디어 이벤트였다. 이로 말미암아 글렌의 생은 주술에 걸렸고, 그가 죽기 바로 전에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마지막 버전을 녹음할 때까지 이 주문은 계속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이 작품은 또 하나의 목적을 완수하게 되었으니, 그를 불멸의 피아니스트라는 영역으로 이끌어 준 것이다.



    3. 연주 생활이 그를 병들게 하다


    서로 충돌하는 요구들

    미국 데뷔 이후 글렌의 무대 공연 횟수는 급속도로 늘어나 1955년에는 열네 번에서 1957년에는 서른여섯 번으로 증가했다. 최고치를 이룬 1959년에는 쉰한 번이나 연주회를 열었다. 자주 연주 여행을 다녀야 했던 여덟아홉 해 동안 글렌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본래 공개 연주에 반감을 갖고 있는데다 글렌은 지휘도 하고 녹음도 하고 고독한 생활도 유지하고 싶어했다. 또한 작곡도 하고 글도 쓰고 싶었으니 이런 다양한 야망에서 나온 욕구들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글렌의 가장 큰 고민은 연주회라는 방식이 자신에게는 기본적으로 안 맞으며 가치도 없는 음악 활동이라고 느끼면서 연주회를 계속 열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근본적으로 글렌은 청중을 믿지 않았다.


    공개석상에서 연주하던 갈등의 세월 동안에도 글렌은 토론토에서 캐나다 방송국을 위해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으며, 뉴욕에서는 컬럼비아 녹음부에서 녹음 작업을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글렌은 이후 자신의 창조적인 활동 무대가 될 매체에 관한 전문지식을 얻었고, 이 분야의 전문가들과 우정을 다져 나갔다. 이 분야에서 글렌이 깊은 우정을 맺은 존 P. L. 로버츠에 따르면 “나중에 그의 부모님을 알고 나서 나는 연주회를 싫어하는 글렌의 태도가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글렌이 어렸을 때 어머니는 병균에 감염되지 않도록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행사나 전시회 같은 데는 절대로 구경 가지 말라고 계속 경고했던 거예요. 글렌은 어쩔 수 없이 연주하러 갈 때를 빼고는 연주회에도 거의 가지 않았습니다.”


    한편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글렌의 공연이 끝나자 비평가들은 무대에서 안정되게 처신하지 못하는 그를 두고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한 신문은 “산발한 굴드의 머리와 건반 위에 수그린 자세, 그리고 독주 부분이 끝날 때마다 엎어지는 자세를 취하는 습관은 완전히 쇼 비즈니였다.”라는 기사를 냈다. 이에 대해 몇 년 후 글렌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절대로 괴짜가 아니다. 친구들이 놀리듯이 피아노를 코로 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내가 개인적으로 유별나게 굴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주관적으로 몰두하다 보니 생긴 일일 뿐이다.” 이후 공연이 계속되면서 글렌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연주 여행을 다닐 때면 갖가지 약들을 갖고 다녔는데, 보통 무대에 오르기 전이나 녹음 스튜디오로 들어가기 전에 약을 먹었으며, 매일 잠자리에 드는 것도 약에 의지해야 했다.



    4. 연주보다 녹음에 열정을 쏟다


    작곡과 연주 사이에서
    글렌은 이십대가 끝나갈 무렵, 작곡하고 싶다는 갑작스런 충동에 휩싸였다. 작곡가로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는 것, 그것이 아마도 굴드가 최종적으로 내놓은 현악 사중주가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작곡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 대부분을 피아노 협주곡을 녹음하고, 음악 작품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라디오 방송에 참여하는 데 쏟았다. 연주회도 계속하고 있었지만 연주회는 점점 재미없는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연주는 정말로 뛰어났다.


    그리고 석 달 뒤 레너드 번스타인에겐 당황스럽고 글렌에게는 상처가 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4월 6일과 8일, 글렌은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라(D)단조 작품 15를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레너드 번스타인을 가장 골치 아프게 한 것은 템포에 대한 글렌의 태도였다. 첫 악장은 8분의 6박자로 ‘장엄하게(maestoso)라고 표시되어 있었고, 브람스 자신이 직접 자기 악보에다 메트로놈 표시를 반 마디당 56으로 표시해놓았다. 그러니까 지휘자는 통상적으로 한 마디에 두 박을 쳐주면 되지만 글렌은 레니가 마디당 6박을 쳐주기 바랐다. 그렇게 하면 박자는 엄청나게 느려지게 될 터였다. 번스타인은 굴드의 음악관을 대단히 존경했으므로 청중에게 미리 굴드와 자신의 시각차를 알려주고 연주를 시작했다.


    연주는 정말로 느리게 진행되었다. 그런 속도 덕택에 글렌은 사람들이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협주곡의 새로운 면을 부각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연주에 대해 전문 비평가들은 예외적으로 모진 비판을 해댔다. 이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연주 생활 특유의 ‘경쟁성’과 ‘파괴성’에 신물이 나 있던 굴드의 시각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글렌은 되도록 빨리 대중 공연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무대에서 물러나다
    글렌이 1964년, 무대에서 물러난 것은 그렇게 갑작스런 은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글렌은 정말로 무대 생활을 좋아하지 않았고, 은퇴하기 몇 해 전부터는 여러 가지 분란도 자꾸 생겼으며, 건강도 점점 나빠지고 있었으므로 은퇴는 자연스러운 결말이었다. 그래도 라디오와 음반 녹음 작업, 그리고 텔레비전 일은 여전히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일들이 연주회보다 더 글렌의 관심을 끄는 중요한 일이 되어 버렸다.


    글렌이 대중 연주를 그만두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서른하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의 활동 중지가 일시적인 것인지, 아니면 영구적인 ‘은퇴’를 뜻하는지 확실치가 않았다. 월터 홈버거는 예약을 계속 받고 있었고, 글렌 자신도 때에 따라 가끔은 무대에 설 수도 있다는 암시를 내비쳤다. 그렇지만 실제로 글렌은 다시는 대중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았다. 은퇴한 첫 해(1964~65) 글렌은 컬럼비아 녹음부에 녹음하러 가기 위해 자주 뉴욕을 찾았고, 엄청나게 많은 양의 아놀드 쇤베르크 음악을 테이프에 담았다. 그리고 자신이 제작한 〈녹음 전망에 관한 대화(Dialogue on the Prospect of Recording)〉 등을 방송으로 내보냈다. 1965년 10월, 글렌은 예후디 메뉴인과 함께 CBC 스튜디오에 함께 출연하면서 아주 뛰어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탄생하기도 했다.



    5. 피아니스트에서 프로그램 제작자로


    배우, 철학자, 그리고 기술자
    음반을 판매해야 할 때가 오면 글렌은 원본 테이프를 다시 찾아 매우 주의 깊게 들어본 다음 어디서 떼고 붙일지 또 무엇을 바꾸고 끼워넣을지를 구체적으로 정했다. 글렌이 원하는 연주를 만들어내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전에는 한번도 들어보지 않았던 새로운 소리가 나와야만 하는 것이었다. 재치 있는 솜씨와 엄청난 인내, 그리고 글렌의 예술적 능력에 대한 존경심을 지닌 앤드루 카즈딘과 함께 일하면서 자극을 받은 글렌은 그 자신이 훌륭한 기술자가 되었다. 꽤 큰 돈을 들여 필요한 장비를 구입한 글렌은 자신을 위해 전문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연주회를 여는 피아니스트에서 라디오 제작자로 변신한 그는 이제 전천후 기술자가 되어 있었다.


    글렌은 음반 녹음을 하거나 라디오, 텔레비전 일을 하고 있지 않을 때는 글을 쓰고 편집하면서 온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리고 1971년 영화감독 조지 로이 힐의 영화 〈제5도살장(Slaughterhouse-Five)〉의 배경 음악 작업을 시작으로 몇 편의 영화음악 작업에 참여했다. 그리고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글렌은 작가, 평론가, 그리고 수필가,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자(예술가)로서 활동했다.


    중년에 접어들며
    서른여덟 살 때인 1971년 2월 글렌은 내과의사 존 A. 퍼시벌 박사에게 찾아갔다. 퍼시벌 박사는 “글렌은 무엇보다 심리적인 도움이 필요했던 사람이었다.”라고 내게 말했다. “자신의 손을 잡아줄 누군가가 필요해서 진료실을 찾아올 때가 많았습니다. 용기를 북돋아주고 안심시켜주는 말, 결국 모든 것이 정상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온 거였습니다. 그가 호소한 증상 대부분은 실제 치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어요.”


    1971년 이후 몇 년 동안 글렌은 앤드루 카즈딘의 도움을 받았으며 점점 더 녹음을 많이 하게 됐다. 이렇게 강도 높게 일하는 가운데 글렌에게 또 다시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특이한 느낌은 현기증에 가까웠으며 균형 감각마저 조금 잃어버리는 증상이었다. 퍼시벌 박사는 이를  ‘내이염’이라고 진단했다. 이 와중에 심장혈관 질병으로 인한 어머니의 죽음은 글렌의 전 생애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깊은 고통과 아픔에 겨워했지만 겉으로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세상을 뜬 지 1년도 채 안 되어 글렌 자신도 고혈압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이후 글렌은 평소 습관대로 다른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약을 처방받았다. 이런저런 병을 치료하기 위해 글렌이 먹은 약은 물론 치료에 효과적인 약들이기는 하지만, 부작용도 초래할 수 있는 약들이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1975년 당시 글렌은 손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빠져 고통을 겪고 있었다. 글렌은 평소 자신의 손과 손가락이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 전혀 생각할 마음이 없다고 공언해왔지만 마비를 겪고 있는 지금은 마비 증상을 조금이라도 개선해볼 요량으로 손가락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데 몇 시간씩 보내곤 했다.


    1981년 초, 글렌의 혈중 요산 수치가 높아졌다. 요산 수치가 높아지면 관절에 요산 결정체가 쌓여 통풍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통풍에 걸리면 발과 다리가 붓고 통증도 심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1981년 글렌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영상으로 담고 재녹음한다는 가장 큰 계획을 진행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글렌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과 그 녹음 작업을 담은 영상물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최종 편집본에 들어가지 않은 삭제본을 보면 글렌이 이 녹음에 쏟아부은 엄청난 노고와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온갖 병에 시달려 심신이 황폐해진 가운데서도 그의 연주는 창조의 즐거움과 열정으로 빛나고 있다.
        
    몸이 온전치 못했음에도 글렌은 본격적으로 지휘에 헌신해볼 작정을 하고 있었다. 관현악단을 조직해 녹음도 남기고, 마지막으로 1982년 9월(그가 발작을 일으킨 달), 뉴욕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초기 피아노 소나타 나(B)단조 작품 5를 녹음하기도 했다. 하지만 9월 25일 쉰번 째 생일을 맞았을 때 글렌은 자신의 건강이 얼마나 나쁜지 알고 있었다. 그는 의사들을 자주 찾아가 고혈압 약과 두통 약, 통풍 약, 그리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안정제를 듬뿍 받아왔고 처방전이 필요 없는 약들도 사서 먹었다.


    글렌의 쉰 번째 생일 이틀 뒤인 9월 27일 월요일, 머리가 터질 듯한 두통으로 찾아간 응급실에서 검사를 받은 결과 얼굴을 비롯하여 몸 왼쪽 근육이 전체적으로 약해져 있었고, 반사 능력도 일정치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목요일이 되자 글렌은 완전히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들었고, 합병증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일요일, 혈압은 220/125까지 올라갔고, 코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이제 더 이상 회복할 가능성은 없다는 의견이 나왔고 10월 4일 월요일, 글렌에게서 생명 유지 장치를 걷어냈다. 오전 10시, 그의 심장은 박동을 멈추었고 그의 죽음이 선고되었다. 검시 뒤 병리학자는 오른쪽 공동 안에 있는 경동맥에 피가 엉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동맥에 피가 엉김으로써 글렌의 오른쪽 뇌는 금방 순환성 손상을 입고 마비와 혼수상태 그리고 결국 죽음으로 나아간 것이다. 동맥의 피가 엉긴 것은 공동의 혈전증이 확대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병리학자는 결론지었다.


    그의 변고는 그동안 언론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죽기 이틀 전 처음 알려졌다. 글렌의 시신은 어머니 묘지 곁에서 영원한 휴식에 들어갔다. 공식적인 추도 예배는 10월 15일, 토론토 성 바오로 성공회 교회에서 열렸다. 예배가 끝나갈 무렵 글렌이 최근에 녹음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아리아가 교회에 설치한 스피커를 통해 나지막이 울러 퍼졌다. 아리아와 함께 간간이 들려오는 그의 흥얼거림은 그가 우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인 동시에 자신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다는 환상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바흐의 영묘한 음악이 끝나면서 무서운 죽음의 유령과 필연적으로 따르는 소멸에 대한 공포 역시 글렌의 의식 속에서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