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청 도서요약
   국내도서 요약 

위대한 패배자

Grosse Verlierer

저   자
볼프 슈나이더(역자 : 박종대)
출판사
을유문화사
출판일
2005년 09월







  • 역사의 무대 뒤에는 승리자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재능과 노력하는 자세를 갖춘 패배자들이 있었다. 승자들의 전유물로 간주되었던 기존의 역사관에 반기를 들고, 승자들의 그늘에 가려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패배자들의 삶의 진실한 모습을 세상에 알리는 책.



    위대한 패배자


    몇 사람을 제외하고 우리는 모두 패배자다
    승리를 원했고, 조금만 더 행운이 따랐다면 충분히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결국 세상 사람들로부터 수모를 당했거나 좀더 강한 자에 가로막혀 꿈을 접어야 했거나, 아니면 운명의 조화에 만신창이가 되었거나 지나친 요구를 스스로 감당하지 못했던 패배자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맞선 인상적인 패배자도 있고, 끝까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며 자신의 비운을 인정하지 않은 나쁜 패배자도 있으며, 권력에 빌붙거나 경쟁자의 뒤통수를 칠 정도로 비열하지 않았기에 실패했고, 그래서 절망하지 않은 훌륭한 패배자들도 있다. 우리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들을 대부분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이 패배자라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지구는 좌절의 별이다. 불운이 겹치고, 운명에 할퀴고, 로또 복권은 번번이 비켜가고, 이 사람에 속고 저 사람에 넘어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모차르트같이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지만, 서양 음악가의 아들이 아니라 중국의 한적한 시골의 농부 아들로 태어나는 바람에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사람들, 사랑하는 이에게 퇴짜를 맞거나 아예 말조차 붙이지 못하고 속으로 애만 태우는 사람들, 데뷔 무대에서 목에 이상이 생겨 가수로서 생명이 끝난 오페라 가수들, 부지런히 글을 쓰지만 출판할 곳을 찾지 못하는 작가들, 좀더 맵시 있는 자동차를 갖고 싶은 사람들, 스타나 기업체 임원, 아니면 자그마한 가게의 사장이라도 되고 싶지만 평생 그것을 꿈으로 알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일상의 고통으로 시름하는 익명의 다수들이 있다.


    위대한 패배자들과 이들 익명의 다수들은 이름이 알려졌느냐 아니냐의 차이로 구별된다. 하지만 이름이 알려졌다는 이유만으로 더 많은 동정과 공감을 얻을 수는 없다. 만일 화를 내고 인정할 줄 모르는 패배자라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건방을 떠는 승리자들과 마찬가지로 취급을 받는다. 오로지 정상에 오르는 데만 혈안이 된 사람보다는 승복할 줄 알고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더 호감이 간다.


    좋은 패배자란 느긋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즐겁게 웃지만 승리자는 음흉하게 웃는다. 예전에 공화주의자 마르쿠스 포르시우스 카토(Marcus Porcius Cato : 기원전 234~149년 로마의 정치가이자 웅변가)는 카이사르와 벌인 싸움에서 패한 뒤 뭐라고 했던가? “승리는 신들의 것이고, 패배는 카토의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깨끗하게 승복할 줄 아는 아름다운 패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위대한 패배자들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을 깨닫는다. 그들은 우리들 대부분이 겪는 좌절의 아픔을 겪었지만, 그 운명을 비극으로 승화시킬 줄 알았다.


    롬멜 - 경탄과 환호, 그러나 결국엔 죽음
    1941년 2월 히틀러는 육군대장 에르빈 롬멜(Erwin Rommel, 1891~1944)을 불렀다. 1차 대전 때부터 혁혁한 공을 세웠던 장군 롬멜에게 히틀러는 영국군을 리비아에서 몰아내라는 특명을 내렸다. 리비아는 원래 이탈리아의 북아프리카 식민지였지만, 1941년 1월쯤에는 이집트에서 밀고 들어온 영국군이 그 절반을 장악하고 있었다. 독일의 그리스 기습 공격은 지중해 동부를 독일의 통제권에 넣음으로써 영국의 생명선에 해당하는 수에즈 운하를 끊으려는 것이었다. 롬멜은 3월에 공격을 개시하여 군인이라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단숨에 동쪽 방향으로 650킬로미터를 진격해서 영국군 2개 기갑여단을 포위하였고, 적군의 장군 한 명을 생포하였으며, 4월 11일에는 영국의 마지막 요새 토브루크(Tobruk)만 남기고 영국군을 모두 이집트로 몰아냈다. 처칠은 이 전투를 가리켜 ‘1급 재앙’이라 불렀고, 영국 언론들은 롬멜에게 ‘사막의 여우(desert fox)’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1941년 6월 15일 처칠의 명령을 받은 영국군 총사령관 아치볼드 퍼시 웨이벌(A. P. Wavell)이 반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사흘 만에 전차 91대를 잃고 다시 이집트로 퇴각하고 말았다. 처칠은 당시 절망적인 심정으로 혼자 몇 시간 동안 공원을 산책했다고 한다. 이후 영국군은 적에 비해 월등하게 보강된 전력을 갖추고, 롬멜의 쉰번째 생일 사흘 전인 11월 18일 독일군의 진지를 향한 대공세를 벌였다. 그러나 영국의 전차들이 밀고 들어간 적진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독일군은 땅에서 솟은 것처럼 갑자기 나타나 영국의 비행장들을 깔아뭉갠 뒤 영국 4여단의 전차들을 탈취하였다. 전투 닷새째 되던 날 롬멜의 전차들이 새벽 안개 속으로 나타나 영국과 남아프리카 연합군의 진용을 송곳처럼 돌파해서 정신없이 휘저었고, 적군은 혼비백산해서 이집트 쪽으로 30킬로미터나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롬멜은 늘 적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 나타나 상대를 놀라게 했다. 도주하는 적들은 어느새 자기들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롬멜의 기갑부대를 보고 기가 꺾였다. 그는 리비아 사막의 모래 바다를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유자재로 휘젓고 다녔다. 적의 공중 시찰도 달이 없는 한밤중이나 모래 폭풍, 혹은 새벽녘의 안개 속에서 군대를 이동하는 것으로 무력화해 버렸다. 롬멜은 기민하고 영악하고 속임수를 잘 썼을 뿐 아니라 속도와 위험과 승리에 대한 집착이 누구보다 강했다. 항상 선봉에서 지휘하는 롬멜의 신조, 그와 함께 하면 승리한다는 자신감으로 병사들은 그에게 환호했다.


    반년 가까이 전투가 중지된 기간, 독일군이 보급 체계 정비, 전차 수리와 함께 휴식을 취하는 동안 영국군은 그 사이 전차 수를 적에 비해 3:1의 비율로 높이고 제공권까지 장악했다. 롬멜에게는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1942년 6월 21일 독일군은 미친 듯이 쏟아붓는 폭격의 지원을 받으며 영국군을 몰아 부쳤고 그 결과 3만 5천 명의 포로, 엄청난 양의 연료와 탄약 그리고 생필품, 독일 아프리카군단의 80퍼센트를 수송할 수 있는 전차와 군용 트럭까지 노획할 수 있었다. 영국은 망연자실했다. 그리고 이틀 뒤 롬멜은 세 배나 많은 전차를 갖춘 영국 기갑부대를 향해 진격했다. 처칠을 특히 분노케 했던 것은 독일군이 영국의 실탄을 쏘고 영국의 장비와 물자를 이용해서 진격했다는 사실이다.


    9월 30일 요양차 독일에 간 롬멜은 히틀러와 언론, 전 독일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3주 뒤, 그러니까 1942년 10월 23일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은 1천여 문의 포를 동시에 발포하면서 그 사이 독일군에 비해 여섯 배나 증강된 전차들을 힘차게 돌진시켰다. 롬멜은 즉시 전장으로 떠났다.


    독일 아프리카 기갑군단은 월등한 적의 공세에 맞서 10일간을 버텨냈다. 롬멜은 마침내 11월 3일 적의 포위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퇴각을 지시했다. 독일군의 전차 수는 22대로 줄어 있었고, 그마저도 일부는 취사장에서 구한 에틸알코올로 간신히 움직이고 있었다. 패배는 4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중간에 기습 공격으로 적의 전차 40대를 파괴하기도 했지만, 롬멜은 히틀러에게 시간이 있을 때 아프리카에서 철수할 것을 간곡하게 제안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탈리아가 예상되는 연합군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히틀러는 격분했다.


    1943년 5월 독일과 이탈리아의 마지막 아프리카군단은 결국 튀니지에서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롬멜은 연합군의 공격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수많은 독일인들에게 작은 희망이었다. 롬멜은 히틀러에게 연합군이 상륙하기 전에 저지해야 한다고 설명했지만, 6월 6일 연합군은 마침내 노르망디에 상륙하였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교두보 마련을 저지할 수 없을 정도로 전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6월 17일 롬멜과 서부전선 총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Gerd von Rundstedt)가 장성 모임에서 만나, 독일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의견일치를 보았다. 히틀러에게 전화를 걸 사람으로 롬멜이 선정되었다. 히틀러는 노발대발했다.


    1944년 7월 17일 롬멜의 차가 프랑스에서 미 전투기의 공습에 명중되어 전복되었고, 롬멜은 중상을 입은 채 급히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로부터 3일 뒤 총통 지휘본부에서 히틀러의 목숨을 노린 폭탄이 터졌다. 거사 세력은 사전에 대중적 인기를 받고 있던 롬멜을 포함시키려 했지만 롬멜은 그 일에 적극 가담하지 않은 듯 보인다. 하지만 공모자들 가운데 하나가 고문을 받다가 롬멜의 이름을 댄 것이 화근이었다. 히틀러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다. 하지만 수많은 독일인의 사랑을 받는 롬멜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여기에서 간악한 음모가 꾸며졌다. 1944년 10월 14일 두 명의 장성이 올름에 있는 롬멜의 집을 찾았다. 그들은 부상중인 롬멜에게 양자택일을 종용했다. 군사법정에 서는 수모를 당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이 건네는 청산가리를 먹고 국립묘지에 묻힐지 선택하라는 것이다. 전자를 택하게 되면 가족도 재산도 몰수당한 채 평생을 수치스럽게 살아야 하지만, 후자를 택하게 되면 가족에게는 명예와 영화가 보장될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여졌다. 롬멜은 독약을 선택했다. 일반 대중에게는 7월 17일에 적의 공습을 받아 죽은 것으로 발표되었다.


    독일의 육군원수 롬멜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영국의 위대한 전쟁사학자 바실 리델-하트(Basil Liddell-Hart)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승리를 거둔 장군이 오히려 패장보다 뒷전으로 밀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한니발과 나폴레옹, 로버트 리, 그리고 에르빈 롬멜이 바로 그러한 패자들이다.”


    지금도 토브루크와 엘알라메인에 가면 퇴역한 영국 병사들이 롬멜의 묘지 앞에서 거수 경계를 붙이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렌츠, 괴테에게 발길질당한 천재 작가 - 미워하기에는 너무 재능이 뛰어난 사람
    세상에는 처음부터 패배자의 운명을 안고 태어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더구나 그런 사람이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다면 비극적인 길은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사람들 중 하나가 야콥 미하엘 라인홀트 렌츠(Jakob Michael Reinhold Lenz, 1751~1792)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설상가상으로 괴테와 경쟁까지 벌였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한마디로 비극적인 코미디였다. 렌츠가 젊은 괴테에 버금갈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과시한 것이 괴테에게는 모욕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1771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처음 만난 뒤로 차츰 우정을 키워 나갔다. 그런데 바로 이 우정이 훗날 쾨테에게는 분노로, 렌츠에게는 불운으로 변했다.


    당시 스물두 살이던 쾨테는 유복한 부모 밑에서 아무 걱정 없이 자란 풍채 좋은 법학석사였고, 그보다 1년 6개월 어린 렌츠는 신학공부를 중단한 뒤 가정교사로 근근히 살아가는 산만하고 왜소한 청년이었다. 괴테는 상당히 수다스러웠던 반면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렌츠는 천천히 말을 하는 유형이었다.


    1771년 8월 렌츠는 제젠하임의 아름다운 목사 딸 프리데리케 브리온(Friederike Brion)을 연모했는데, 너무나 소심하고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생각하면 결혼 같은 건 아예 가당치도 않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괴테는 렌츠가 자신보다 먼저 프리데리케를 사랑한 것을 평생 불쾌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쾨테가 연애편지를 보내는 바람에 자기가 렌츠에게 양다리나 걸치는 몹쓸 사람으로 취급받았다는 프리데리케의 싫은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괴테는 렌츠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늘 자기 방식대로 사랑했고, 프리데리케가 그런 그를 알아주지 않자 유치하게도 자살 소동까지 벌였다. 게다가 이런 소동의 배경에는 나에게 피해를 주고, 주위의 동정을 끌어 나를 파멸코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괴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참으로 이상할 정도의 거친 반응이었다. 괴테가 한동안 렌츠를 위험한 경쟁자로 생각했던 것일까? 실제로 그런 증거도 있다. 괴테 사후 『제젠하임 시가집』이 출간되었다. 이 중에서 프리데리케에게 보낸 연애시 11편이 프리데리케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는데, 모두 괴테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 사이 최소한 다섯 편은 렌츠의 작품으로 증명되었다.


    쾨테는 1773년에 희곡 『괴츠 폰 베를리힝겐』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이듬해에 렌츠는 『연극에 관한 주석』 서문에서 자신이 벌써 1771년에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책의 내용을 낭독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쾨테의 불쾌감이 얼마나 컸던지 수십 년이 지난 1813년 『시와 진실』에서도 렌츠 때문에 야기된 일종의 ‘정신적 저작권’ 시비를 거론하며 렌츠를 강한 어조로 비난하였다.


    “아마 나만큼 그 사람에게 가상적 증오의 대상이 되겡 적합한 인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추구해야 할 위험하고 망상적인 목표로 나를 선택했다.”


    1776년 렌츠는 무일푼으로 스트라스부르를 등졌다가 그해 3월 바이마르에 모습을 나타냈다. 당시 쾨테는 작센-바이마르 공국의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 공작의 외교참사관으로 임명되어 있었는데, 렌츠가 같은 궁정에 함께 있는 것이 몹시 불편했다. 더군다나 자신이 흠모하던 슈타인 부인이 9월에 렌츠를 자신의 영지로 불러 일곱 자녀에게 영어를 가르치게 한 것도 상당히 신경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1776년 11월 렌츠가 ‘미련한 짓(쾨테의 표현이다)’을 저질러 걷잡을 수 없는 사태를 불렀다. 어떤 일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궁정 사람들을 조롱하는 시를 쓴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괴테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렌츠를 24시간 안에 여기서 떠나게 하라는 공작의 명령을 받아냈다.


    한편으로는 괴테의 심정이 이해가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척 비정하고 매몰찬 행동으로 느껴진다. 현실 논리에 어둡고 현실을 타개할 재주도 없는 옛 친구를 이런 식으로 내팽개치는 행동은 자칫 파멸의 구렁텅이로 내모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괴테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승리자가 패배자에게 발길질까지 한 셈이다.


    렌츠의 파멸에는 천차만별의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하지만 그중 상당 부분은 괴테 때문이었다. 렌츠는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고, 자신의 작품을 선전하고, 자신을 상품화할 줄 아는 기술이 없었다. 자신의 책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거부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런 예정된 실패 위에 괴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는 바람에 렌츠가 겪은 좌절은 더 한층 가속화되었던 것이다.


    괴테만 탓할 수는 없지만 괴테는 자신과 동등한 자리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을 참지 못하는 성향이었다. 실러가 문학적 천재라고 한 프리드리히 휠덜린를 두고 괴테가 실러에게 한 말을 보자.


    “나는 그(휠덜린)에게 좀더 짧게 시를 쓰고, 인간과 관계되는 개별적인 것에 관심을 가져보라고 충고했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19세기 독일의 가장 위대한 극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일부 동봉해 공연 타진을 물었을 때 괴테는 그에게 뭐하고 썼던가?


    “나는 자신의 작품이 반드시 상연되리라고 생각하고 극장을 기다리는 총명하고 유능한 젊은이들을 보면 우울하고 걱정스럽네.”


    베티나 브렌타노(Bettina Brentano,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누이)는 이러한 쾨테를 가리켜 ‘자기보다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지적하였다. 스위스 작가 헤르만 부르거는 1987년에 이렇게 썼다.


    “괴테가 클라이스트에게 내뱉은 그 교만하기 짝이 없는 말들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파우스트 2부를 포기하겠다.”


    1776년 바이마르에서 쫓겨난 렌츠는 스위스에서 힘들게 살아갔고, 때로는 통제력을 상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다행히 고향집에서 건강을 회복한 렌츠는 1781년에 모스코바로 떠났고, 거기서 한 문학회에 가입하여 셰익스피어 작품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였다. 그러던 1792년 5월 렌츠는 일정한 거처도 없이 거리를 방황하다가 빈민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향년 마흔한 살이었다. 누구에게도 따뜻한 사랑 한 번 받지 못한 외로운 죽음이었다.


    그해 렌츠의 재능을 기리는 일이 있었다.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카람진(Nikolay Karamzin)은 『러시아 여행자의 편지 Pisma russkogo puteshestvennika』에서 렌츠에 대해 이렇게 썼다.


    “깊은 우울증이 그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그러나 이런 상태에서도 그는 탁월한 문학적 착상으로 우리는 놀라게 했고, 선량한 정신으로 우리를 감동시켰다. … 셰익스피어를 위대한 문호로 만들었던 그 깊은 감성의 바다가 렌츠에게는 오히려 몰락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아마 상황이 조금만 달랐더라도 렌츠는 불멸의 작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렌츠의 문학이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데이는 괴테의 『시와 진실』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문화 권력의 핵심에 있던 쾨테의 말 한마디는 곧 진리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1828년 루트너 티크(Ludwig Tieck)에 의해 3권짜리 렌츠 전집이 발간되었다. 렌츠가 쓴 글 중에 이런 시구가 있다.


    “파괴하는 삶이여, 너울 너울 날아라!”


    대부분 다른 시처럼 이 시구에도 날짜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 렌츠처럼 그렇게 한 점 희망 없이 철저하게 무너진 사람도 없을 것이다.


    리제 마이트너 - 노벨상을 빼앗긴 물리학자
    승리와 명예는 늘 상대보다 더 끈질기고 비정한 사람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여성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 1878~1968)는 어느 정도 이름은 얻었지만 절친한 친구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사기당했다. 스스로 “불쌍한 존재”라고 부른 마이트너는 자그마한 체구에 수줍지만 야심이 크고 자의식이 강한 예쁘장한 여인이었다.


    1878년에 태어난 마이트너는 여자로서는 두 번째로 빈 대학에 입학한 여대생으로, 1906년에 이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마이트너는 이듬해 당시 자연과학 분야에서 세계적 아성이었던 베를린으로 갔다. 1911년 이 도시에 ‘카이저 빌헬름 과학진흥재단’이 세워졌고, 아인슈타인도 1913년부터 1933년까지 여기서 연구를 했다.


    베를린에서 마이트너는 훗날 자신의 인생에서 오랜 연구 파트너이면서 액운이 될 동갑의 화학자를 만나게 된다.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오토 한(Otto Hahn) 박사였다. 그들은 공동 연구로 1908년에 핵분열 때 발생하는 두 가지 방사능 물질을 발견했고, 1917년에는 그때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91번 원소를 밝혀냈다. 1926년 마이트너는 베를린대학 교수로 승진하였다. 프로이센에서는 여자로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이트너와 오토 한은 10년 동안 매우 친밀한 유대 관계 속에서 연구를 해나갔다. 애정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편하게 ‘니쉔’, ‘핸센’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마이트너가 오토 한에게 “핸센, 당신은 물리학에 대해선 꽝이야!”라고 스스럼없이 말할 정도로 가깝고 편안한 사이였다.


    나치의 마수가 뻗치자 마이트너는 스웨덴 과학아카데미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하지만 옛 동료들과 31년이라는 세월 동안 고향처럼 지낸 베를린과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게다가 스웨덴 과학아카데미는 자그마한 연구소였고, 여기서 자신이 맡고 있던 역할도 예전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오토 한과 함께한 공동작업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마이트너는 스웨덴으로 도주한 지 반년 만에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최고의 연구 성과를 올렸다. 1938년 12월 오토 한과 그의 새 파트너인 프리츠 슈트라스만이 핵물리학에서 놀라운 발견을 하나 했는데, 즉각 마이트너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조언을 구했다. 마이트너라면 이 ‘특이하고 끔찍한’ 발견에 대해 무언가 기가 막힌 설명을 해줄 수 있으리라는 바람에서였다.


    마침내 마이트너가 오토 한에게 그의 발견에 대해 최종 결론을 내렸다. 그가 원자핵 분열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마이트너는 1939년 1월 18일 오토 한의 발견과 자신의 해석을 런던의 「네이처」에 실으면서 이것을 ‘핵분열’이라는 말로 규정했고, 핵이 분열할 때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방출된다는 사실도 함께 알렸다. 학계는 마이트너의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이제야 드디어 핵폭탄과 원자력에 대한 물리학적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마이트너는 전쟁 기간 내내 스톡홀름을 떠나지 않았다. 그 사이 미국측으로부터 수차례 연구직을 제안받았지만, 거기서 핵무기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이후 수년이 지난 1945년 8월 7일 마이트너는 하루 전날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아연했다. 핵폭탄 제조에 마이트너가 얼마만큼 관여했는지를 묻는 기자들에게 마이트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핵폭탄 제조와 관련해서 마이트너가 맡은 일은 지극히 미미했다. 그럼에도 세계 여론이 그에게 집중된 것은 당시 핵기술 발전에 마이트너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토 한의 파트너 프리츠 슈트라스만은 이렇게 단언하기까지 했다.


    “마이트너는 우리 연구팀의 리더였다.”


    모든 정황을 보면 오토 한도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스웨덴 과학아카데미가 그 혼자만을 핵분열의 발견자로 간주해서 노벨화학상을 수여했을 때 그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가 마이트너와 둘이서, 아니면 슈트라스만과 셋이서 노벨상을 공동 수상해야 한다고 노벨상위원회에 건의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절차가 불가능했다면 수상 소감에서는 마이트너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이자 도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혀 그런 배려를 하지 않았다.


    마이트너는 오토 한이 수년 간에 걸쳐 자신과 공동 연구를 해왔음에도 자신의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은 것에 대해 몹시 서운해했다. 마이트너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오토가 떨쳐 버리고 싶어하는 과거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슬퍼.”


    마이트너를 특히 분노케 했던 것은 오토 한이 나치 시대에는 이렇다할 저항도 없이 체제에 순응하며 살다가 시대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출세를 했다는 사실이다. 마이트너는 1968년 10월 27일 영국의 케임브리지에서 아흔이 다 된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오토 한이 죽은 지 넉 달 만이었다.


    노벨상위원회는 보통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고 믿을 만한 기관으로 통한다. 하지만 마이트너의 경우를 보면, 차라리 실망과 소외감을 생산하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학 부문에서 노벨상위원회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주 상습적이다. 예를 들어 1902년에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던 생존 작가 톨스토이,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헨리크 입센 대신 터무니없이 독일의 역사가 테오도르 몸젠이 수상자로 결정된 바 있다.


    자연과학 부문 노벨상은 일반적으로 주목을 덜 받는다. 수상자들은 대부분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암투와 음모가 판을 친다. 많은 후보들을 일일이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스웨덴 심사위원들은 대개 기존의 노벨상 수상자들에게 자문을 구한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노벨상 수상자의 절반 가량이 기존 수상자의 제자라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내막을 잘 아는 사람들은 노벨상이 종종 좀더 철면피 같고 좀더 추악한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의 차지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박수갈채를 받아야 할 사람은 이러한 경쟁에서 본의 아니게 밀려난 사람들이 아닐까? 그들은 대개 수상자들과 똑같은 능력과 성취도를 보였다. 다만 좀더 여리고 편안한 성격의 소유자들일 뿐이다.


    승리자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낼 필요가 없다. 그들은 상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은 사람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