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청 도서요약
   국내도서 요약 

에이브러햄 링컨

저   자
해리 마이하퍼(역자 : 염정민)
출판사
이매진
출판일
2005년 05월







  • 링컨과 언론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본격 정치평전! 키 큰 애송이에 불과했던 링컨이 미디어의 위력을 간파하고 현명하게 대처함으로써 언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국민의 지지도 얻어낼 수 있었던 흥미진진한 과정을 담은 책.



    에이브러햄 링컨


    키 큰 애송이
    1858년 6월 15일, 온화한 날씨 속에 열정적인 공화당원들이 일리노이 주 공화당 전당대회를 열기 위해 스프링필드에 모였다. 1천 명이 넘는 대의원들은 광장을 거닐거나 단아한 의사당과 주 정부의 새 청사를 감탄하며 둘러보다가 지정된 시간에 맞춰 하원 의사당에 집결했다. 리처드 예이츠(Richard Yates) 주지사가 개회를 선언하고 대의원들이 자리에 앉자, ‘쿡 카운티는 에이브러햄 링컨을 지지한다’라고 적힌 깃발이 들어왔다. 그 깃발은, 링컨의 경력에 영향을 준 수많은 미디어 이벤트 가운데 하나였다. 적절하게 그런 깃발을 준비한 사람은 저널리스트들이었다. 두 달 전인 4월 21일, 일리노이의 편집자 네 명이 회동을 갖고 링컨을 연방 상원의원 후보로 결정했다. 시카고 시장이자 「시카고 데모크래트」 편집자인 ‘키다리 존’ 웬트워스(Long John Wentworth)가 후보 지명을 위해 뛰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 날 저녁, 링컨은 박수와 환호 속에 연단에 올라 연설을 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어디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더 훌륭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노예제의 동요에 종지부를 찍는 쉰 번째 해에 와 있습니다. 우리의 정책은 정당한 목표와 확고한 약속에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이 정책이 수행되는 동안, 동요는 종식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계속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동요는 커다란 위기가 지나가고 나서야 끝날 것입니다. ‘내분이 있는 집은 버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정부도 절반이 노예요, 절반이 자유로운 상태로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 연방이 해체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집이 무너지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저는 분열이 종식되기를 바랍니다. 모두 하나가 되거나 아니면 모두 남이 되거나 할 것입니다.”


    링컨은 노예제는 최종적 폐지의 과정에 있는, 임시적이고 과도기적인 체제로 봐야 한다는 것을 계속 역설했다. 연설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로 끝났다. 이제 링컨에게는 이 연설을 정확하게 인쇄하는 문제가 남았다. 링컨은 연단에서 걸어 나오면서 자신의 원고를 「시카고 프레스 앤 트리뷴(Chicago Press and Tribune)」의 호레이스 화이트(Horace White)에게 건네고, 이 원고를 「일리노이 스테이트 저널」 사무실에 갖다준 뒤 교정쇄를 확인하라고 요청했다. 「일리노이 스테이트 저널」 인쇄실에서 화이트와 만난 링컨은 인쇄 내용을 자신이 직접 검토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링컨의 노력은 보답을 받았다. 「일리노이 스테이트 저널」뿐만 아니라 「시카고 프레스 앤 트리뷴」은 링컨 연설 전문을 게재했고 서부의 수십 개 신문 역시 그랬다. ‘분열된 집’ 연설로 이름을 알린 동부에서는, 호레이스 그릴리(Horace Greeley)의 「뉴욕 트리뷴」 역시 전문을 게재해 수백만 독자에게 전달했다. 링컨은 선거에서 떨어졌지만, 정치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계속했다.


    우리는 적이 될 수 없습니다
    1861년 3월 4일, 링컨은 연방 의사당의 동쪽 현관에 서서 취임 선서를 했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 된 링컨은 곧이어 취임 연설대에 올랐다. 링컨은 지난 몇 달 동안 취임 연설문 속에 남부를 향한 화해 메시지를 담기 위해 공을 들였지만, 실제 연설에서 강조한 것은 헌법의 수호였다. 남부를 향해 자신의 메시지를 정면으로 전달한 링컨은 다음과 같은 인상적이고 유명한 문장으로 연설을 끝맺었다.


    “나는 끝장나는 것이 싫습니다. 우리는 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친구입니다. 우리는 적이 될 수가 없습니다. 분노가 솟을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결속을 깨뜨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모든 전장과 애국자의 무덤에서 뻗어 나와, 모든 살아 있는 가슴과 가정, 그리고 이 위대한 땅 전역에 울려 퍼지는 신비로운 기억의 화음들이 여전히 우리 연방의 합창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의 천사들에 의해 다신 한번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남부와 북부의 신문들은 취임 연설을 인쇄하기 위한 경쟁을 벌였다. 미국 역사상 이 연설문만큼 널리 배포되고 꼼꼼히 분석된 사례는 없었다. 그러나 링컨의 최대 관심사는 몇몇 신문의 사설이 쏟아 붓는 말들이 아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가 12월 20일 연방에서 탈퇴했고 곧이어 1월 9일에 미시시피, 1월 10일에 플로리다, 11일에 앨라배마, 19일에 조지아, 그리고 2월 1일 텍사스가 뒤따라 연방을 탈퇴했다. 1861년 2월 4일 앨라배마의 몽고메리에서 탈퇴 주들의 대표자들이 만나 남부연합 결성을 위한 잠정적 헌법을 초안한 뒤에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를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양측은 현재의 지위에 대한 권리를 요구했고, 결코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직접적인 위기는 찰스턴 항만의 섬터 요새(font Sumter)와 관련이 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당국은 무기, 보급품, 병력보충 시도를 강제적으로 저지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요새에서 군대를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개전을 알리는 바로 그 날에 워싱턴에 섬터 요새의 연방 사령관인 로버트 앤더슨 소령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앤더슨에 따르면, 보급품은 고갈되고 있었고 원조 없이는 더 버틸 수 없었다. 링컨이 알고 있었듯이 원조의 제공은 전쟁을 더욱 촉진시켰다. 링컨은 현명하게도 단지 식량만 적재해 배를 보내는 것으로 이 상황을 대충 얼버무리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4월 12일 아침에 찰스턴 포대를 지휘하는 남부연합의 뷰러가드 장군이 공격개시 명령을 내렸고, 찰스턴 포대는 모든 화력을 동원해 섬터를 공격했다. 4월 14일 일요일 항복문서의 조건에 따라 앤더슨은 성조기를 향해 예포 50발을 발사했다. 연방을 유지하기 위해 충성을 바친 주들에게 섬터 공격은 자극적 효과를 주었다. 6월 29일, 워싱턴 지역 연방군의 지휘관인 어빙 맥도웰(Irvin McDowell)은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진정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노예해방을 위한 포고령
    1862년 벽두가 되자 행정부가 직면한 언론 문제가 급격히 늘어났다. 모든 문제의 근저에는 노예제 문제가 놓여 있었고, 대통령은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중이었다.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지지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한 링컨은 켄터키, 메릴랜드, 미주리 등 접경 주들의 반감을 살 여유가 없었다. 전쟁 노력에 대한 아무런 명확한 진전이 없는데도, 공중은 전쟁을 운영하는 사람들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언론은 링컨을 비효율이나 부패, 때로는 둘 다를 가진 사람으로 규정했다. 링컨은 여론의 지지를 지탱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고, 당시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신임 전쟁부 장관인 에드윈 스탠든에게 도움을 청했다. 스탠튼은 「뉴욕 트리뷴」의 찰스 다나에게 편지를 보냈고, 편집국장인 다나가 많은 일을 한 덕분에 「뉴욕 트리뷴」은 일반적으로 전쟁 노력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뉴욕 헤럴드」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2월에 들어서면서 사기를 북돋우는 소식이 서부에서 도착했다. 무명의 율리시즈 그랜트(Ulysses Grant)장군이 테네시 강과 컴버랜드 강에 있는 남부연합의 전략 요충지인 도넬슨과 헨리 요새를 점령한 것이다. 의기양양해진 언론은 마침내 연방의 승리를 보도할 수 있었다. 과잉반응을 보이지 않던 「뉴욕 타임스」도 그랜트가 연방의 영웅이라고 찬사를 늘어놓았다. 아마도 도넬슨의 승리로 사기가 진작된 링컨은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해오던 생각, 노예 소유주에게 적절한 보상을 하고 노예들을 해방시킨다는 생각을 되살렸다. 1862년 3월 6일, 링컨은 의회에 “미합중국은 노예제도의 변경 덕분에 발생하는 공적, 사적인 불편함을 보상하고, 보상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기 위한 재정을 원조함으로써 점진적인 노예 폐지를 채택하는 어떤 주들과도 협력해야만 한다”는 권고안을 제출했다.


    1862년의 결정적인 여름은 지나갔다. 남군과 북군으로 갈라진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피 흘리며 싸울 때, 또 다른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노예제 문제를 다루는 최선의 방법을 찾고자 했던 링컨의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전투였다. 7월 22일 링컨은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각료들이 다 모이자 링컨은 노예해방령 초안을 보여 주었다. 링컨은 그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으며, 노예해방령이 가진 문제점을 주제로 설정하기를 원했다. 8일 뒤, 「필라델피아 신문」은 존 포니의 사설을 통해 전국적인 노예해방을 위한 포고령을 공개했다. 포니는 링컨의 친구일 뿐만 아니라 백악관 대변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포고령이 링컨의 재가 없이는 발표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제가 누구인지 말해도 당신은 저와 악수할 수 있을까요
    몇 주 동안 링컨의 무능력을 불평하는 편지들이 「뉴욕 트리뷴」에 쏟아져 들어왔다. 찰스 다나를 대신해 「뉴욕 트리뷴」의 신입 편집국장으로 취임한 시드니 게이는 대통령이 여론과 교감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링컨이 ‘중간평가를 받는 날(trial balloon)이던 7월 30일, 게이는 백악관에 편지를 한 통 보냈다. 게이가 동봉한 그 편지에는 “대통령은... 머뭇거리고, 주저하고, 이 나라를 표류하게 내버려두고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링컨은 게이의 솔직함에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즉각 답장을 보냈다. “조만간 저를 만나러 오시기 바랍니다.”


    게이를 만난 것은 링컨이 좋아하는 일대일 미디어 접촉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처음부터 링컨은 성격상 매우 우호적이었으며, 의견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좋아했다. 훌륭한 정치인으로서 링컨은 또한 개인적 접촉을 통해 그 이상으로 사람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많은 기자들이 기본적으로 링컨의 견해에 동의했으며, 따라서 링컨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쓰도록 유도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게이는 이 모든 것을 그릴리와 공유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성미 급한 ‘호레이스 아저씨’는 몇 달 동안 링컨에게 노예해방령을 공표하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게이에게 링컨의 메시지가 전달된 며칠 뒤에 그릴리의 간청은 요구로 바뀌었다. 그릴리는 링컨에게 공개 편지 형식으로 ‘2천만 명의 탄원’이라는 격양된 장문의 논설을 썼다. 그릴리는 연속적인 칼럼을 통해서 노예제도 폐지의 국가적 근거들을 열거했다. 이것은 직접적이고 공개된 도적이었고, 링컨은 공개 답변을 하기로 결정했다.


    링컨은 매우 심사숙고한 답변을 했고, 이것은 링컨의 미디어를 다루는 기술이 절정에 다다르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다른 신문사들 가운데 「뉴욕 타임스」는 그 상황을 다루는 링컨의 방식에 찬성했다.


    “...우리 주민들을 위해 노예제 폐지가 정당하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하는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온전한 정신으로 국가를 책임지고 있다는 편지를 통해 그릴리를 위로한다. 링컨은 그릴리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통해 공중 앞에 노예제도에 관한 자신의 태도를 어떤 방식으로 표명하는 게 좋은지 생각하고 있으며, 최상의 방법과 적적한 과정에 대해 친구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릴리의 ‘탄원’은 링컨에게 그런 시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호레이스 그릴리는 아마도 자신의 ‘2천만 명의 탄원’이 대통령이 노예해방령을 공표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링컨에게 유리한 위치에서 언론을 활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었다. 그릴리는 곧 자신이 허를 찔렸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릴리는 자신의 동료에게 말했다. “링컨은 단지 현존하는 법을 정직하게 집행하자고 요청하는 ‘2천만 명의 탄원’을 마치 노예제도의 폐지를 요구하는 것처럼 답변함으로써 내가 받은 상처에다가 모멸감까지 주었소. 따라서 나를 여론을 파악하는 데 철저히 이용했고, 나를 정부의 일에 쓸데없이 끼여드는 주제 넘는 간섭자로 보이게 만들었소. 결코 나는 당신의 ‘정직한 에이브’를 신뢰할 수 없을 것 같소. 내가 보기에 너무나 교활한 사람 같소.”


    사려 깊은 답변 속에서 링컨은 개인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기를 바라지만, 링컨의 목표는 자신의 답변이 무슨 사태를 일으키든지 상관없이 연방을 구하는 것이었다. 링컨의 생각에 따르면, 노예해방령은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서 감행된 필요에 따른 행동이었다. 몇 달이 지난 뒤 링컨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계획의 종반부에 다다르고 있다고 느낄 때까지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우리는 마지막 카드를 끄집어내야만 했으며, 전술을 바꾸거나 아니면 그 게임에서 패배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노예해방정책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맥도웰의 후임인 매크렐런은 링컨의 노예해방령을 ‘불법’이라고 생각했고, 링컨은 그 상황을 직접 판단하고 싶었기 때문에 포토맥 부대를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링컨이 말했던 것처럼 링컨은 “매크랠런이 움직이도록 촉구하기 위해 전장으로 갔다.” 만남은 아주 진지하게 진행됐지만,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워싱턴으로 돌아오기 전에 링컨은 군대를 사열하고, 뒤이어 야전병동을 방문했다. 링컨은 남군 부상병을 수용하고 있는 병동을 지나치면서 그 안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했다. 대통령은 남군 부상병들 사이로 가 몇몇을 쓰다듬으면서 최선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링컨의 관심이 고조된 것은 누추한 침대 밖으로 나와 있던 고상한 외모의 젊은 조지아 사람 때문이었다. 링컨 대통령은 이 젊은 병사를 지켜보다가 가까이 다가가서는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나는 다리를 잃었고 절망감에 빠져 있습니다.” 링컨은 물었다. “만일 제가 누구인지 당신에게 말해도 당신은 저와 악수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나는 미합중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입니다”라고 말했다. 젊은 부상병은 놀라 고개를 들면서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링컨은 그 손을 잡고 한동안 부드럽게 쥐고 있었다. 신문이 전한 이야기는 아마도 링컨의 “이미지”에 매우 좋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공적인 업무가 아니라 오히려 북부와 남부에 모두 영향을 미치는 전 국가적인 고통으로 매일 상처를 받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준비되지 않은 본능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딜레마
    1863년 초, 동부의 기자들은 포토맥 부대와 북부 버지니아에 주둔 중인 로버트 E. 리 부대 사이에 벌어진 전투에 주목했다. 하지만 서부에서는 그랜트 부대의 통신원들이 두 개의 전쟁을 취재하고 있었다. 하나는 남부군(또는 반란군)에 맞서는 전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붉은 머리의 성미가 매우 급한 윌리언 티컴서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에 맞서는 전쟁이었다. 링컨은 이미 전쟁을 둘러싼 언론과의 갈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셔먼이 그런 갈등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셔먼은 일반적으로 신문기자를 성가신 존재로 여겼고, 특히 적에게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기자들을 매우 혐오했다. 「뉴욕 헤럴드」의 보도기자인 톰 크녹스(Tom Knox)가 특히 불쾌한 이야기를 썼을 때, 셔먼은 크녹스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군사재판에서 크녹스는 셔먼의 명령에 불복종한 이유로 유죄선고를 받고 군대에서 추방되었다. 워싱턴에서, 존 포니와 다른 사람들은 크녹스의 복직을 요구하는 탄원서에 서명했다. 링컨은 신문사를 회유하길 원했고, 셔먼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시도를 그만두었다.


    링컨이 잘 알고 있듯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병사들뿐 아니라 시민 개개인의 지지가 필요했다. 그리고 시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매스컴이 필요했다. 링컨은 저널리스트들을 동료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전쟁기간 동안 링컨이 신문과 맺은 모든 관계들 중에서, 가장 매혹적인 것은 호레이스 그릴리와 맺은 관계다. 여유가 있었던 때 링컨은 몇 년 동안이나 「뉴욕 트리뷴」의 성실한 독자였다. 링컨은 편집자의 기자다운 재능에 감탄하면서 그릴리를 진실한 개혁 운동가로 느꼈다. 그릴리는 미국 저널리즘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경쟁자는 오직 「뉴욕 헤럴드」의 편집자인 제임스 고든 베넷 뿐이었다.


    공화당을 지지하는 「뉴욕 트리뷴」과 민주당쪽 「뉴욕 헤럴드」가 조화를 유지하는 것은 링컨이 맞닥뜨린 가장 커다란 도전 중 하나였다. 링컨은 일찍이 미주리에서 존 스코필드 장군에게 했던 이런 충고를 어느 정도 따르고 있었다. “두 당파가 당신을 매도하든지 매도하지 않든지, 당신은 아마 올바른 사람일 겁니다. 한쪽에서 비난을 받고 다른 한쪽에서는 찬사를 받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비록 ‘호레이스 아저씨’가 대통령에 대한 열변, 경고, ‘충고’를 결코 중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링컨에 대한 「뉴욕 트리뷴」의 보도는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링컨의 관심사마다 변덕스럽게 태도를 바꾸기는 했지만, 그릴리는 보통 공평하도록 노력했다.


    우선 호레이스 그릴리는 링컨과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그릴리는 장기적인 정치적 전망에 더 관심이 많았다. ‘호레이스 아저씨’가 공화당 발기인 중 한 명이라는 점, 19세기의 대다수 편집자 같이 정치를 가장 사랑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 동안 민주당원들은 평화강령을 갖고 1864년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민주당원들이 생각한 후보는 다름 아닌 ‘젊은 나폴레온’ 조지 매크렐런이었다. 매크렐런은 사령관에서 해임되었을 때 뉴저지에서 아내 엘렌과 만났다. 트렌턴(Trenton)에서는 금의환향한 영웅으로 환영받았다. 그릴리는 링컨이 1864년 다시 입후보하려 하지 않을 것 같았고, 후보자로 링컨을 인정한 뒤에 링컨보다 더 나은 사람, 즉 되도록 매크렐런과는 다른 경로로 성공한 미합중국 장군을 찾았다.


    자유에 대한 약속
    어떤 면에서 이 시기까지 전쟁은 북부 주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싸움처럼 전개되었다. 남군 지도자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외교적 수단과 군사적 수단을 모두 사용해 북부 주민들이 평화의 정착을 강력히 요구하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링컨이 전쟁의 뜻을 굽히지 않을 것처럼 보였으므로 남군은 전쟁을 염려하는 북부 주민들에게 남부연합이 이곳에 주둔만 할 것임을 확인시키려고 노력했다.


    7월 중순에 게티스버그와 빅스버그의 승리를 인정하며 백악관은 ‘추수감사절 성명. 1863년 7월 15일, 미 연방정부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내놓았다. 이 성명은 국민을 안심시키는 동시에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짜여진 메시지였다. 신앙심이 깊은 미국 국민의 정서를 고려한 것이기도 했다. “전지전능한 아버지의 존재를 깨닫고 고백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것이다. 이 승리는 물론 이 슬픔 안에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이 함께 하심이라.”
     
    추수감사절 성명이 국민들에게 발표된 바로 그 날, 북부 특히 뉴욕에서는 골치 아픈 문제가 발생했다. 문제는 단순히 전쟁도 아니고 징병도 아니었다. 역시 경제가 문제였다. 해방된 노예들은 북으로 향했고 낮은 임금의 일자리를 잡기 위해 경쟁했다. 이민 온 지 얼마 안 되는 뉴욕의 노동자들은 흑인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예해방과 징병제도에 욕설을 퍼부었고 흑인과 징병제도를 지지하는 신문을 저주했다. 아일랜드 출신 노동자들은 정부에 저항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조직을 결성했다. 폭도들은 징집등록 사무소를 습격했다. 수천 명이 폭동에 가담해 건물에 불을 질렀고, 곤봉을 휘두르는 경찰을 죽이고 흑인을 살해했다. 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던 「뉴욕 트리뷴」과 「뉴욕 타임스」 사무실은 특히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 해 여름 링컨은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게티스버그와 빅스버그에서 거둔 승리로 힘을 얻었고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능력에 대한 신임도 얻기 시작했다. 물론 거기에는 언론을 상대하는 능력에 대한 인정도 포함되었다. 링컨이 더 잘하리라 믿는 사람들이 늘었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랜트가 총 지휘를 맡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2년 반에 걸쳐 지휘관을 찾은 끝에야 비로소 링컨은 적임자를 발견한 것이었다. 이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유사천연두
    대통령은 “위대한 청중인 평범한 국민들에게 전쟁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하루라도 빨리 붙잡아야” 했고, 7월 전투에서 전사한 장병들을 위해 게티스버그에 마련한 공동묘지 개관식에 초대받았을 때 기회가 왔다. 1863년 11월 18일 저녁에 붉은 색, 흰색, 파란색 천으로 장식된 4칸의 특별열차가 묘지 개관식에 참석하는 워싱턴 대표단을 싣고 게티스버그에 도착했다. 다음 날, 링컨이 소개되자 관중은 환호했다. 쇠로 만든 안경을 쓰고 호주머니에서 원고를 꺼내 펼치고는 단어를 하나 하나 또렷한 발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87년 전 우리 조상들은 자유를 가슴에 품고 만인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명제를 실천하기 위해 이 대륙에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나라, 또는 자유와 평등을 기치로 하는 어떤 나라가 오래도록 지탱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내전을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전쟁터에서 만났습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분들에게 마지막 휴식처로 전쟁터의 일부를 바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이 일을 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명예롭게 죽은 용사들을 교훈 삼아 우리는 더욱더 큰 헌신을 떠맡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고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면서 하나님의 가호 아래 이 나라에 자유가 새로이 탄생했다는 것과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구상에서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의를 하는 바입니다.”


    링컨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때가 되면 국민이 자신의 업적을 인정하리라는 것을, 특별한 기회를 맞아 언론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링컨은 연설 첫머리에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근본으로 삼았던 ‘만인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명제를 제시함으로써 노예해방의 합법적인 근거를 제시했다. 그것은 미국 헌법의 틀을 새로이 짜는 과감한 도약이었다. 탁월한 표현은 모든 이에게 전쟁의 의미를 설명해 줄 뿐 아니라 헌법에 기초한 전쟁의 정당성을 전달해 주었다. 링컨은 충분히 비판을 극복할 수 있었다. 링컨은 “전 생애를 통해 나는 이런 비판들을 많이 접해 왔다. 나는 적의를 품지 않고 많은 비웃음을 참아왔고 동시에 많은 지지를 받아 왔다. 나는 그런 것에 익숙하다”고 언급했다.


    링컨이 게티스버그에서 워싱턴으로 돌아왔을 때 율리시즈 그랜트는 챠타누가의 부대를 포위에서 벗어나게 할 계획을 짜는 중이었다. 10월 23일 조지 토머스 부대의 병력은 미셔너리 산등성이에서 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한 브랙스턴 브래그의 전초기지 반대 방향으로 이동했다. 11월 24일 셔먼은 전방으로 진격해 미셔너리 산등성이 북쪽 끝에 주둔했다. 다음날 그랜트는 과수원 언덕이라고 불리는 전망이 좋은 곳에서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은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구름 위의 전투’로 알려졌다. “우리 군의 산등성이 공격은 가장 위대한 기적 가운데 하나로 전사에 기록될 것이다. 길도 없는 산을 어떻게 해서든지 기어올라간 적들조차 1만 8천 명이나 되는 병력이 상처투성이의 얼굴로 도망쳤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링컨은 그랜트에게 전보를 보냈다. “잘했습니다. 모든 장병 여러분에게 감사 드립니다.” 링컨은 게티스버그에서 돌아온 직후 병에 걸려서 축하 메시지는 병석에서 썼다. 처음엔 감기인 줄 알았는데, 몸에 뾰루지가 나고 성홍열로 판단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가벼운 천연두 증상이 나타나는 유사천연두로 판명되었다. 링컨은 주치의에게 농담을 건넸다. “얼굴이 곰보가 되지 않는다고 하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나중에 링컨이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된 뒤로 군중들은 항상 나에게 무언가를 달라고 요구했고 이제야 모두에게 줄 것이 생겼다.”


    나는 두려움이 없다네
    1863년이 저물기 전에 북부의 신문들은 다음 해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 나설 후보자들을 거론하며 판세를 점치고 있었다. 공화당은 의견이 갈렸지만 민주당 후보는 조지 매크렐런 장군으로 거의 굳혀졌다. 대다수의 민주당 계열 신문들은 연방이 오로지 전쟁 전의 모습으로 유지돼야 한다는 매크렐런의 생각에 동의했다. 노예제도는 별개의 문제로 다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매크렐런이 옳은 행보를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크렐런은 자신을 정치인이 아니라 군인이라고 생각했다. 이따금 정치 브로커를 만나 대통령 후보에 당선될 것인지 질문을 하면 상대방은 스핑크스처럼 미소를 짓기만 했다.


    민주당 계열 신문들은 자신들의 후보를 정한 반면 공화당 계열 신문들은 날카롭게 의견이 대립하고 있었다. 링컨을 확실한 대통령 후보로 인정하면서도 일부는 당선될 가능성이 좀더 높거나 더 나은, 또는 어쩌면 더 유력한 후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공화당에 링컨의 대안으로 나설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은 공화당이 그 시대에 가장 큰 성공을 이룬 장군인 율리시즈 그랜트를 후보로 내세우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랜트는 링컨을 비롯한 몇몇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을 하며 사양했다.


    많은 이들이 링컨보다 더 나은 후보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며 전당대회 연기를 바라던 그릴리에게 동조했지만, 공화당 전당대회는 변함 없이 6월 7일 볼티모어에서 열렸다. 링컨은 국방부 전신국에서 대통령 지명 소식을 전하는 전보를 받았다. 링컨은 무심결에 말했다. “뭐라고? 내가 대통령 후보에 지명되었다고? 이것을 바로 마누라에게 보내 주게. 나보다 더 관심을 보일 걸세”라고 말했다. 자신이 지명되자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아마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볼티모어 전당대회에 참석한 이들이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부통령 후보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링컨은 그 문제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인상을 주려고 했으나 내심 바라는 사람이 있었다. 다시 한번 링컨은 언론인을 이용해 그 일을 하게 했다. 전당대회 전날 밤 링컨은「펜실베이니아 타임스」의 편집인 알렉산더 맥클루어에게 전당대회에 참석해 테네시 주의 민주당 인사 앤드루 존슨을 위해 일해 달라고 부탁했다. 맥클루어 덕분에 존슨은 부통령 후보에 당선되었다.


    한편 버지니아에서는 정면 공격에 실패한 그랜트가 다시 한번 교전을 시도했다. 그랜트는 부대를 남동쪽으로 이동시켜 작전 기지를 바꾸고 제임스 강을 건너갔다. 6월 12일과 16일 사시에 행해진 도강은 전투가 시작된 이래 그랜트가 이루어낸 가장 크게 성공한 작전이었다. 한달 남짓한 기간에 6만 명의 병사를 잃었고 그 피해가 리의 부대보다 세 배 가까이 되었지만 남부 연합군에게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입혔다. 이제 힘이 빠진 리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전쟁의 끝이 가까워지지는 않았지만 승리는 그랜트 쪽으로 기울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인내할 줄 알았고 그랜트가 성공적인 전략으로 적을 물리치리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링컨은 선거에서 승리하려면 민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있었고, 그러므로 언론의 태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링컨은 언론인에게 이런 말을 했다.

    “국민을 상대로 글을 쓰고 말을 할 때 버지니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머지않아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국민이 너무 낙천적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 맹세코 나는 버지니아의 전쟁이 일년 내에 끝나면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두려움이 없다네. 나는 두려움이 없다네’라는 말처럼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실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공화당은 안전하다!
    지금까지 그릴리는 「뉴욕 트리뷴」의 독자들에게 ‘대통령 선거를 위한 열렬한 유세’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링컨을 지지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았다. 미국인들의 관심이 더욱 중대하고 급박한 문제인 전쟁에 기울여져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릴리는 링컨을 밀어내려는 공화당의 ‘비타협적인 전쟁’을 옹호하는 급진 진영에 확실히 동조하고 있었다. 북부 전 지역의 대표들은 링컨이 구약성서의 요나와 같은 상황에 처했고 재선이 불가능하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링컨은 노예제도 폐지를 유일한 목적으로 전쟁에 임하고 있다는 주장을 부인했다. 한편 반정부 신문들은 링컨의 명성을 실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민주당 전당대회가 1주일 앞으로 다가왔을 때 링컨의 재선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 보였다. 8월 23일 내각회의에서 링컨은 장관들에게 접어서 풀을 발라 내용이 보이지 않는 종이 한 장씩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는 종이 뒷면에 각자 이름을 쓰라고 했다. 참석자들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서명을 했다. 그것은 나중에 쓰이게 될지도 모르는 각서였다. 그 각서를 통해 링컨은 국민의 심판을 충심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명백히 표명하면서도 마지막 남은 임기 동안 연방을 재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맹세한 것이었다.


    선거전의 윤곽이 드러났고, 링컨은 언론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뉴욕의 3개 유력 신문이었다. 「뉴욕 타임스」「뉴욕 트리뷴」「뉴욕 헤럴드」, 이 신문들의 영향력은 뉴욕을 넘어 전국에 뻗어 있었다.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는 헨리 레이몬드가 편집장을 맡고 있는 「뉴욕 타임스」는 확실한 링컨 진영의 신문이었다. 링컨이 관련된 일이라면 칭찬과 비판을 번갈아 하던 변덕스러운 그릴리의 「뉴욕 트리뷴」은?


    링컨은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호레이스 아저씨’와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는 자리를 가지려고 애썼다. 비굴하다고 할 정도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링컨이 만약 재선되어 다시 취임하면 그릴리를 우정장관에 임명하려고 마음먹고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어쨌든 다음날 아침 호레이스 그릴리는 링컨에 관한 2단 짜리 사설을 실었고, 선거에 발벗고 나섰다.


    링컨이 다음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뉴욕 헤럴드」와 그 신문의 까탈부리는 편집장 제임스 고든 베넷이었다. 「뉴욕 헤럴드」는 애초부터 그랜트를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밀었고, 링컨과 지지자들에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링컨은 전에 “「뉴욕 헤럴드」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고, 링컨은 항상 「뉴욕 헤럴드」 기자들에게 잘해 주었으며 그런 것이 도움이 되었다. 9월 초에 「뉴욕 헤럴드」가 다가오는 선거에서 미국 정치사에 있어 최고의 접전이 예상된다고 했을 때는 적어도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듯했다. 사실 링컨은 「뉴욕 헤럴드」에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려고 했다. 베넷(또는 적어도 베넷의 아내)이 유럽 강대국의 수도에서 외교관으로 일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에 기초한 것이었다. 어쨌든 선거 직전인 11월 4일 베넷을 프랑스 대사에 임명하겠다는 거래가 성사되었다.


    9월까지 워싱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언론과 국민들의 분위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링컨에게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8월 15일 데이비드 파라것 제독은 모빌 만을 지키던 3개 요사와 격전을 치른 뒤 함대를 이끌고 모빌 만에 진입했다. 9월 3일에는 윌리엄 셔면 할렉 장군이 “애틀랜타가 우리 수중에 들어왔다. 완전히 이겼다”는 전보를 보내왔다. 9월 중순에는 용맹스러운 필 셰리던 장군이 주발 얼리에 맞서고 있던 셰넌도어 계곡에서 더 기쁜 소식이 전달되었다. “우리는 적들을 윈체스터로 날려버렸고 내일 뒤를 쫓아갈 겁니다.” 이 승리는 링컨의 당선 가능성에 대한 견해를 바꾸어 놓았다.


    크리스마스 선물, 사바나
    이전과 마찬가지로 1864년에도 성인 백인 남성에게만 투표권이 있었다. 연방군에 소속된 군인들이 유권자의 많은 비율을 차지했으므로 다가오는 선거에서 이 집단의 투표가 매우 중요한 원인으로 여겨졌다. 북부 출신으로 남부에 동조하는 민주당의 평화파는 군대가 링컨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군인들의 투표권을 축소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민주당의 평화파가 입법을 좌지우지하던 인디애나, 뉴저지, 델라웨어에서는 군인의 부재자 투표가 금지되었다. 다른 주에서도 군인들의 투표권 행사를 저지하려고 맹렬히 노력했으나 링컨 지지자들과 벌인 표 대결에서 밀렸다. 반면 링컨은 군인들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선거운동 기간을 거치며 대통령에 대한 공격은 점점 더 악랄해지고 인신공격으로 되어갔다. 한 예로 이른바 ‘선거용 일대기’로 출간된「일면 ‘늙은 에이브’, 에이브러햄 링컨의 진짜 인생」은 신랄한 풍자로 가득 찼다. “6척 장신의 링컨은 10일에 한번 갈아 신는 양말을 신고 서 있다. 몸은 대부분 뼈로 이루어져 있고, 걸을 때는 기중기와 풍차의 행복한 결혼생활 가운데 얻어진 자식처럼 보인다. 머리는 순무처럼 생겼고 안색은 커다란 부인용 여행가방 색과 같다. 손과 발은 무척이나 크고, 사교계에서는 아주 많은 손과 발을 가진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 천연두를 앓고 난 뒤에 확실히 나아지기는 했지만 결코 잘 생겼다고는 할 수 없다 … 나이는 107살이다.”


    마침내 11월 8일 워싱턴에 선거일이 다가왔다. 이 날은 차가운 비가 내리고 한겨울 같은 돌풍이 불어 대다수 사람들은 집안에 머물렀다.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며 링컨은 그 날이 자기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날 중의 하루”라고 했다. 불가피하게 자신 앞에 펼쳐졌던 모든 모욕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대중 앞에서 링컨은 인신공격을 무시하는 방법을 택했지만 비서 존 헤이에게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당연히 링컨은 그 날의 결과에 노심초사했다. 밤이 깊어 가면서 뉴욕, 펜실베이니아, 메릴랜드에서 좋은 소식이 도착했다. 분위기는 밝아졌고 링컨은 그 소식을 아내에게 먼저 전하라고 했다. “그 사람이 나보다도 더 애달아하고 있소.” 자정이 되어 최종 결과가 거의 확실해졌다. 국민투표에서 상당히 앞섰고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링컨은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겸손했다.


    그런 뒤에 셔먼한테서 오랫동안 기다리던 소식이 왔다. 링컨은 셔먼이 작성한 의기양양한 전보를 보고 매우 즐거워했다.


    대통령 각하 귀하
    크리스마스 선물로 각하께 사바나를 드리고자 합니다. 150정의 총과 많은 탄약, 그리고 2만 5천 자루의 목화와 함께.
    셔먼 소장 올림


    국민 여러분
    1865년이 시작되면서 「뉴욕 트리뷴」은 남부의 참상을 묘사하면서 갈등이 마지막 국면에 접어들고 있음을 감지했다. 버지니아 주의 절반은 불모지였고 테네시는 쓸모 없는 황무지였다. 남부의 젊은이들은 무덤 속에 있었다. 노인들은 가난에 허덕였다. 노예제를 지지하는 모든 주의 산업은 붕괴되었다. 이제 남부연합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비참하게 포위된 군대 밖에 없었고, 그나마 싸울 수 있는 여력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부연합의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남부가 끝내 이길 것이라고 신앙처럼 믿고 있었다. 남부의 언론은 링컨을 ‘깡패와 광대’라고 부르면서도 연방주의를 능수 능란하게 이끌어 가는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노예제 폐지를 강령으로 하는 정당에 표를 던진 국민들의 지지를 얻은 링컨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명백해졌다. 노예해방선언으로 대략 전체 인구의 삼분의 일 가량 되는 1백만 명 이상의 노예들이 자유를 얻었지만 이것이 법률로 명시되지는 않았다. 링컨은 문제를 매듭지어야 했다. 법안 통과를 위해 링컨은 협박을 하기도 하고 약속을 하기도 했다. 1월 31일, 마지막 투표자가 투표할 때까지 법안은 통과가 불투명했다. 결과는 찬성 119표, 반대 56표, 기권 8표였다. 3표만 부족했어도 그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법안은 통과됐고 다음날 일리노이 주는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는 첫 번째 주가 됨으로써 상황을 잘 이끌어나가기 시작했다.


    3월 4일 취임식 당일, 링컨이 연단에 도달하자 군중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 다음 링컨이 손에 종이 한 장을 쥐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딛자 점차 조용해졌다. 대통령은 ‘국민 여러분’이라는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저는 믿습니다. 상당히 만족할 만하고 모든 것들을 장려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모두 전쟁을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한쪽은 국가를 부활시키기보다는 전쟁을 부추겼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전쟁을 없애기보다는 도리어 승인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은 ‘진실하고 올바른 신의 판단’이라고 불려야만 합니다. 공허한 원한과 같이, 모두를 위한 자비와 같이, 확고부동한 정의와 같이, 신이 우리에게 정의를 보도록 한 것처럼, 우리 모두 우리가 처해 있는 과업을 끝마치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국가의 상처를 동여매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전쟁 때문에 죽은 사람과 미망인, 고아도 돌봅시다. 그래서 우리들 사이에서, 그리고 모든 국가들 사이에서 얻을 수 있는 정당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성취하고, 소중히 간직하기 위해서 모든 일을 하도록 합시다.”


    4월 15일 오전 7시 22분
    그랜트는 피터스버그와 가까운 장소에 리를 가두고 있었고, 셔먼은 남부로 계속 진군해서 캐롤라이나를 급습해 밤낮 없이 적들을 격퇴하고 있었다. 3월 셋째 주에 그랜트의 참모 중 한 명이 시티 포인트의 본부에 들러 달라고 링컨을 초대했다. 그랜트는 링컨이 군대를 통제했다고 말했다. 링컨과 그랜트는 시티 포인트가 방문객을 위해 적합한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최후의 전투를 치르기 전에 남부의 중심에 도달해야 했다. 가능한 한 항복협정에 대해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새벽에 그랜트가 있는 본부에 도착한 이후, 남군의 미합중국의 방어지점인 스테드만 요새를 공격해 몇 시간 동안 싸운 뒤에 전선을 되찾았다. 그것이 로버트 E. 리 장군의 마지막 공격이었을 것이다.


    종전이 합의됐다. 기본적으로 남군이 항복했고 전쟁을 다시 시작하지 않겠다고 선서했다. 병사들은 석방되어 평온한 집으로 돌아갔다. 한 시간이 채 못 되어 그랜트는 워싱턴에 전보를 보냈다. “리 장군은 오늘 오후 제가 제안한 조건에 합의해 북부 버지니아 군대를 양도했습니다.” 4년 간의 길고도 어려운 시기 동안, 링컨은 그런 전갈을 몹시 고대해왔다. 북부 여러 도시에서 사람들이 기뻐하며 몹시 흥분했다. 새벽에는 국방장관의 명령으로 대포 5백 문이 워싱턴 하늘에 예포를 쏘아댔다.


    4월 14일 금요일, 링컨은 연극 「우리의 미국인 사촌」을 관람하기 위해 포드 극장에 참석키로 결정했는데, 유명한 스타인 로라 킨(Laura Keene)이 주연을 맡았다. 링컨은 헨리 래스본(Henry Rathone)과 약혼녀 클라라 헤리스(Clara Harris)와 함께 극장에 갔다. 대통령 관람석의 문이 조용히 열렸을 때, 링컨은 긴장을 풀고 연극을 즐기고 있었다. 잠쉬 뒤 존 윌크스 부스가 들어와 링컨의 뒷머리를 향해 총 한 방을 쐈다. 아내 메리는 비명을 질렀고, 래스본은 벌떡 일어나 부스와 몸싸움을 벌였다. 부스는 단칼로 래스본의 팔을 베고선, 관람석에서 무대로 깡충 뛰어 도망쳤다. 링컨은 거리를 가로질러 어느 하숙집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나서 저녁에 다른 자객이 국무장관 시워드를 공격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4월 15일 오전 7시 22분, 링컨은 숨을 거두었다. 소식은 급속히 퍼져나가 온 나라를 깜짝 놀라게 했다. 링컨에 대한 찬사가 미국 전역의 신문들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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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 동안, 링컨은 자신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언론의 지지를 얻고자 부지런히 일했다. 링컨은 자신이 착수한 것을 성취해왔다. 역설적이게도, 링컨을 비난한 언론들은 링컨이 죽기 전까지 링컨의 위대함을 인식하지 못했다. 호레이스 그릴리의 지적이 정확했다.


    “링컨의 명성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후세들 사이에서 더욱 확고해질 것이다. 머지 않은 시간이든지 아니면 적절한 공간이든지 간에, 왜소하고 불명료한 터라, 그 거리는 더욱더 공정한 빛 속에 자리잡을 것이다. 미래의 세대들은 링컨을 괴롭힌 사람들에 의해 링컨을 낮게 평가한 것과, 링컨의 기개를 시험한 암살자의 잔인한 모습 때문에 당혹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