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청 도서요약
   국내도서 요약 

교황님 교황님 우리들의 교황님

저   자
김원석
출판사
영림카디널
출판일
2004년 10월







  • 남루한 옷차림 탓에 국경 수비대들로부터 신분증을 훔쳤을 지도 모른다는 오해를 받을만큼 검소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2005년 4월 2일 서거했다. 이 책은 그의 아름다운 삶을 이야기한다. “교황님, 교황님, 이제 하늘나라에서 편히 잠드세요.”



    교황님 교황님 우리들의 교황님


    [카롤의 어린 시절]


    정말 추기경 맞아요?
    교황이 크라쿠프 대주교이자 추기경으로 있을 때였다. 교황은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지대 타트라 산에서 스키를 탔는데, 좋았던 날씨가 갑자기 나빠졌다. 게다가 눈보라까지 심하게 몰아쳐 그만 눈 속에 갇히게 되었다. 폴란드 국경 초소, 수비대원 두 명이 망원경으로 한동안 무엇인가를 주시했다.


    "이 눈보라에 스키를 타다니?"
    "글쎄, 그것도 혼자서?"


    한 수비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망원경에 잡힌 스키어는 방향을 잃고 폴란드 국경을 넘으려 했다. 수비대원들은 급히 스키를 타고 재빠르게 스키어에게 갔다. 그런데 그는 정말로 스키를 타는 사람인가 할 정도로 옷과 장비가 남루했다.


    "신분증을 보여주시죠."


    스키어는 수비대원에게 신분증을 꺼내 주었다. 신분증을 본 수비대원들은 깜짝 놀랐다. 신분증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카롤 보이티와, 크라쿠프의 대주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


    수비대원들은 추기경을 초소로 데려가 무전연락을 했으나 눈보라가 심해 교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비대원들은 왜 추기경이 신분증을 훔쳤다고 생각한 것일까?


    작은 꼬마 롤루시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Karol Jozef Wojtyla)는 1920년 5월 18일 화요일 폴란드 남부 바도비체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카롤이 태어나던 바로 그 날 신생 독립국이자 카롤의 조국인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는 도시 전체가 축제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불과 열흘 전에 필수트스키가 이끄는 신생 군대는 소련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에 영광스럽게도 자랑스런 폴란드의 깃발을 휘날리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폴란드가 약 200년만에 거둔 최초의 중요한 군사적 승리였다.


    카롤은 고전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라틴어를 5년, 고대 그리스어를 5년간이나 배웠다. 그런 특별한 의미에서 카롤 집안은, 카롤이 신부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는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 카롤을 미리 준비시킨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카롤 부모는 모두 농민 출신으로 자존심과 독립심이 강한 소박한 농민이었다. 아버지는 카롤에게 사제가 되라고 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카롤에게는 아버지가 보여 준 행동 모두가 일종의 신학교육이었다. 그에게 아버지는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카롤이 아주 어린 아기였을 때도 그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어머니는 에밀리아는 이웃사람들에게 자주 롤루시가 장차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깊이 새겨진 죽음
    1983년 야기엘로니아 대학에서 연설할 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자기형을 잃은 일에 대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형을 잃은 아픔이 그 때까지도 묻어 있었다.


    "이 사건은 제 기억 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비극적인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특별한 상황들 때문에, 그리고 당시의 내가 더 크게 성숙했다는 관점에서 보면 제 형님의 죽음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형이 죽은 뒤 카롤은 타고난 낙천주의와 넘치는 열정으로 학교 공부와 운동, 그리고 더욱 커져 가는 신앙에 더 몰두했다.


    또한 카롤은 서사 시인이기도 했다. 카롤은 남녀 고등학교 합동 연극반에서 활동하면서 바도비체 연극 모임의 배우로, 연출자로, 감독과 기획자로 두각을 나타냈다. 또 학교에서는 학생회장으로 학교 일을 열심히 할 뿐만 아니라, 나라에 일이 있을 때는 고등학교 대변인으로서 일하기도 했다. 이렇듯 카롤은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다. 카롤은 1938년 바도비체와 크라쿠프의 학생 시절부터 1978년 교황이 되기까지 40여 년 동안 시를 썼다. 교황이 되자 시 쓰는 일을 그만둬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크라쿠프에서는 최소한 네 개의 가명으로 몇 년에 걸쳐 수십 편의 시와 희곡과 논문들을 발표했다. 그 때에 쓴 글이 대부분 서사시였다.


    한편 1939년 10월 26일, 공공 노동의 의무가 열여덟 살에서 예순 살까지의 폴란드 사람들에게 부과되었다. 그리고 열두 살 이상의 모든 유대인들은 교화 목적으로 2년 동안 징집되었다. 또한 나치는 폴란드 문화, 예술, 교육에까지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 때, 카롤도 크라쿠프에서 공장 노동자로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카롤이 사회 불의를 깨닫게 된 것은 열아홉 살 때였다. 불의의 폴란드에 대한 1939년의 묵상은 젊은 사제에서 바티칸 공의회의 주교와 교황이 될 때까지 카롤의 사회와 정치 철학의 근거가 되었다.



    [사제에서 추기경까지]


    사제가 되기로
    1941년 2월 18일, 카롤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마음 붙이고 살던 아버지의 죽음은 카롤이 일생 동안 겪었던 가장 크고 깊은 충격이었다. 카롤의 친구들 대부분은 카롤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 사제가 되기로 결심을 굳혔다고 믿고 있다.


    1944년 11월 11일, 사피에하 추기경은 카롤의 요청에 따라 개인적으로 그의 성당에서 삭발례를 집전해 주었다. 삭발례는 머리 한가운데를 밀어내는 것인데, 성직으로 입문한다는 상징이었다. 스물 다섯 된 카롤은 이제 십자가의 성 요한 연구에 몰두했으며, 그의 저작을 원어로 읽기 위해 스페인어도 배웠다. 4월에는 대학 신학과의 유급 조교 자리를 얻어, 교리나 세미나를 주관했다.


    사피에하 추기경 덕분으로 카롤은 순조롭게 사제가 되기 위한 모든 과정을 밟을 수 있었다. 1945년부터 1946년까지의 학기 동안 신학교 4학년에 올라갔고, 순수 신학에서부터 교회법과 생존할 권리라는 특별 윤리 신학 과정을 밟아야 하는 힘든 공부를 시작했다. 1946년 11월 15일, 카롤 신부에게 크라쿠프에서 로마로 가는 길은, 폴란드라는 좁은 나라에서 전설적인 영원의 도시의 웅대함으로 떠나는 신비로운 여행이었다. 로마는 가톨릭 교회의 사도좌가 있는 곳이고, 위대한 기적의 근원지이며, 종전 후 정치적 음모와 경쟁이 판을 치던 핵심 지역이다. 1947년 카롤 신부는 석사 학위에 해당하는 신학교 교수 자격 취득을 위한 시험에 합격했다. 그 후 11월 첫 주에, 카롤은 안젤리쿰에서 두 번째이자 마지막 해이기도 한 과정에 등록했다. 그렇지만 카롤 신부는 신학 박사 학위를 받지는 못했다. 안젤리쿰의 학칙으로는 박사 학위를 수여하기 전에 반드시 논문이 인쇄되어 나와야 했는데, 가난한 폴란드 사제인 카롤 신부는 논문을 인쇄할 돈도 없었던 것이다.


    시골 성당 보좌 신부
    1948년 카롤이 로마에서 폴란드로 돌아왔을 때, 폴란드 교회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에게 주어진 새 임무는 타르노프로 가는 길에 있는 가난한 시골 마을 니에고비치 성당 보좌 신부였다. 카롤 신부를 이 같은 성당으로 보낸 것은 사목의 기초 훈련을 시키기 위한 사피에하 추기경의 생각이 분명했다. 카롤은 지치지 않는 정력과 열정으로 사목 활동에 헌신했다.


    7개월 후 카롤은 다시 부름을 받았다. 사피에하 추기경은 카롤이 기초적인 사목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생각하고 그의 경력을 위해 다음 단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번 자리는 크라쿠프의 올드 타운 가 북쪽으로 다섯 블록쯤 떨어진 곳에 있는 성 플로리안 성당의 보좌 신부였다. 카롤 신부는 전임지에서도 그랬지만, 사제관의 문을 늘 열어 두어 그의 곁에는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끊이지 않고 모여들었다. 그는 학생뿐 아니라, 모든 교우들에게 점점 더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주교에서 대주교로
    1958년 7월 8일, 비오 12세는 카롤 보이티와 신부에게 옴비아의 명예 주교직을 수여하고, 그라쿠프의 보좌 주교로 임명했다. 이런 결정은 크라쿠프의 성직자들을 놀라게 했다. 사람들은 카롤 신부의 학문적 업적과 설교자로서의 재능을 좋아하고 또 존경했다. 그렇지만 그는 교구 운영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고, 사목 경험이 부족했다. 더구나 서른 여덟 살이라는 나이는 폴란드 전통에서 볼 때 주교가 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였다.


    카롤 신부는 1958년 9월 28일 주교로 축성되었다. 바벨 대성당에서 열린 주교 축성식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참석했고, 성당 밖에도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같은 해 10월 9일, 교황 비오 12세가 선종했다. 10월 28일 카롤이 주교로 축성된 지 한 달 후, 베네치아의 안젤로 주세페롱칼리 추기경이 요한 23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등극했다. 그는 곧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했
    고, 서른 여덟 살 난 폴란드 주교인 카롤은 이 공의회를 통해 교황직을 향한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디게 되었다. 1963년 12월 30일, 6개월 전에 선출된 새 교황 바오로 6세는 카롤 주교를 크라쿠프의 수석 대주교로 임명했다. 마흔 세 살의 젊은 나이로서는 아주 무겁고 중요한 책임이었다.


    스키 타는 추기경
    1967년 5월 29일, 교황 바오로 6세는 카롤 대주교를 추기경에 임명했다. 추기경이 된 뒤에도 교황은 자신의 신체를 산사람처럼 건강하고 다부지게 만들어 준 스포츠 생활을 계속했다.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려고 로마에 갔을 때에도 오후에는 스키 경기를 하러 테르미닐로에 갔다.


    카롤 추기경은 24시간 내내 일을 했다. 폴란드의 입장에 서서 대교구를 고유한 교회 조직으로 변모시켜 갔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주도적이고 아주 눈에 띄는 역할을 했다. 또한 정부가 상업용 건물을 교리 교육용 공간으로 임대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을 때, 카롤 추기경은 개인 가정에서 교리를 가르칠 것을 장려했다. 기존의 사목 활동을 계속하면서 카롤 추기경은 시각 장애인, 청각 장애인, 농아 등 장애자를 대상으로 하는 사목 활동을 위한 단체도 조직했다.


    1976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카롤 추기경에게 1주일 동안 바티칸에서 열리는 피정을 주관해 줄 것을 부탁했다. 카롤 추기경은 탁월한 강론으로 피정을 완벽하게 이끌었으며, 같은 해 7월 28일부터 9월 11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세계 성체 대회에 폴란드 대표 단장으로 참석해서 미국에도 카롤 추기경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어린양]


    비이탈리아계 교황의 탄생
    1978년 8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가 선종했다. 8월 25일 48개국 추기경 111명이 바티칸에 모여 비밀 투표로 차기 교황 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선거에는 비신스키 추기경과 카롤 추기경이 폴란드 대표로, 또 대한민국 대표로 김수환 추기경도 참석했다. 네 차례의 투표 끝에 베네치아의 알비노 루치아니 추기경이 교황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라는 칭호를 선택했다. 그러나 교황이 된 지 33일만에 갑작스런 심장 마비로 선종하고 말았다.


    새 교황을 선출하려고 로마에 모인 111명의 추기경들은 두 가지 중요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하나는 이탈리아 교황들의 전통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당선 가능성 있는 이탈리아계 후보가 있느냐, 또 다른 하나는 비이탈리아계 교황을 선출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었다.


    1978년 10월 16일 월요일 오후 6시 18분에 티스랑 추기경은 크라쿠프의 카롤 추기경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황으로 선출되었다고 공표했다. 선임자를 존경한다는 뜻에서 요한 바오로 2세라는 이름을 택한 카롤 추기경은 성 베드로의 263대 후계자이며, 가톨릭 교회의 264번째 교황이 되었다. 58세의 나이로 교황의 자리에 오른 요한 바오로 2세는 132년 만에 가장 젊은 교황이 된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탈리아와 그에게 매혹된 다른 세계에 매우 빠른 속도로 그리고 쉽게 받아들여졌다. 그는 또한 즉각 교회와 교황청을 장악했다.


    폴란드 크라쿠프의 대주교가 어떻게 교황 자리에 오르게 되었을까? 카롤 대주교는 폴란드에서는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나라 밖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젊은 사제 시절 로마의 안젤리쿰 대학에서 유학을 한 적은 있지만, 많은 유학생 가운데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카롤 대주교는 신학적으로 보수적이면서도 개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실천 사목에서는 아주 진보적이었다. 그리고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한 공동체로 보고 있었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교회가 개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관성 있게 주장했는데, 바로 이것이 주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카롤 추기경은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정기 총회에서 탁월하고 유능한 인물로 인정을 받고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예리한 분석력과 빠르고 유능하게 모든 일을 중재할 수 있는 카롤 추기경의 역량은 회의를 치르면서 단연 돋보였다. 마침내는 카롤 추기경이 가톨릭의 새로운 지도자로 옹립되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국 폴란드 방문
    요한 바오로 2세는 추기경의 자격으로 바티칸 교황 선출 회의에 참석하려고 떠난 지 여덟 달 만인 1979년 6월 2일 바르샤바에 돌아왔다. 교황은 도착 연설을 통해 자신을 폴란드의 성인 성 스타니슬라오의 순교 900돌을 기리기 위한 순례자로서 조국의 땅을 밟았다고 했다. 이어서 폴란드 사람은 자유를 사랑하는 민족임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이 정치에 초연할 수 없음을 간접으로 귀띔해 주었다. 교황이 아무리 순례의 목적으로 왔다고 해도,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폴란드 정부로서는 교황의 방문이 신경 쓰였다. 당시는 폴란드에서 펼치는 반종교적인 정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어, 정부와 교회가 끊임없이 맞서고 있는 형편이었다.


    교황의 발길은 폴란드에 도착한 이튿날부터 성지와 지방 순례로 바빠졌다. 교황은 강론을 통해 자신도 공산 유럽의 노예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그러기에 늘 잊혀진 민족과 백성들의 소망을 대변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번 방문은 동유럽 공산권에 그리스도를 증거할 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성 베드로 광장의 총소리
    1981년 5월 13일 수요일 오후 성 베드로 광장에서 저격 사건이 일어났다. 이 저격은 터키의 한 테러리스트가 6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교황을 암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매주 수요일마다 성 베드로 광장에는 수많은 군중이 교황을 알현하려고 기다리고 있다. 그 날도 지붕 없는 차에 탄 교황이 일어나서 흰 수단 자락을 휘날리며 군중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교황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요란한 총소리가 군중의 환호 소리에 섞여 성 베드로 광장에 울려 퍼졌다. 시끄럽던 광장은 정적에 잠겼고 교황은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기대면서 쓰러졌다. 교황의 흰옷은 눈 깜짝할 사이에 붉은 피로 물들었다.


    "교황이 총에 맞았다!"


    총알은 교황의 복부를 뚫고 소장과 대장을 훑으면서 천골 정맥을 뚫고 나왔다.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교황은 조용히 주님의 기도를 외웠고, 의사가 수술을 하려고 마취를 할 때까지 의식을 잃지 않았다. 교황은 수술 후 한때 후유증으로 혼미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회복이 빨라 나흘 뒤 처음으로 병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이후에도 교황은 자신을 저격한 암살자를 위해 끊임없는 기도를 했는데 이는 교황에게 총을 쏘고 감옥에 갇힌 아그차의 마음을 조금씩 녹였다.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1983년 교황은 아그차가 복역 중인 로마 교외의 레비비아 교도소를 찾아갔다. 교황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을 때 아그차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 입맞춤은 회교도가 상대방에게 가장 깊이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저격범의 사면을 요청하는 서한을 대통령에게 보냈고, 마침내 알리 아그차는 자유의 몸으로 풀려났다.


    두 번째 폴란드 방문
    1983년 교황은 폴란드를 두 번째로 방문했다. 당시 폴란드는 소련의 압박으로 계엄령을 선포해 놓고 자유 노조 운동을 억누르고 있었으며, 서방 쪽과 관계된 경제와 정치 문제의 어려움이 날로 커지고 있었을 때였다.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폴란드 저항이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교황은 이 방문의 숨은 목적인 정부 지도자들과의 회담에 들어갔다. 회담은 두 시간을 넘게 끌었다. 회담 결과 교황은 마침내 연금 당해 있는 자유 노조 지도자들을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조국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5년 재임 기간 동안 1979년 첫 번째 모국 방문을 시작으로 2002년까지 모두 아홉 차례를 방문하여 격동기 급변하는 현대사의 정점에 서 있던 폴란드 민족의 정신적 지침이 되었다.


    순교 성인 103위
    1983년 9월 27일 바티칸의 교황청 비밀 회의장에서 한국 가톨릭의 200년 역사에 가장 감격스러운 일이 결정되었다. 한국 순교 복자 103위가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커다란 기적이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성인이 된 적은 2000년 가톨릭 역사에 한 번도 없었다. 교황청 비밀 회의는 추기경 서른 네 명과 주교 예순 다섯 명이 참석한 가운데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성인이 많은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세상을 또 놀라게 한 것은 한국 순교 복자 103위에 대한 시성식을 한국에서 올린다는 결정이었다. 시성식이 바티칸을 떠나 거행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러한 특전은 교황을 비롯한 바티칸 교황청이 한국 교회의 순교 역사를 얼마나 존경하는지를 잘 보여 준 것이었다.


    결국 1984년 5월 3일부터 7일까지 역사적인 교황의 대한민국 방문이 이루어졌다.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앙 대회와 한국 성인 103위 시성식을 집전하기 위해 최초로 교황의 방문이 성사된 것이다. 교황은 한국 방문 1년 전부터 한국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해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한국어를 익혔고, 유창한 한국어 방한사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이렇게 따뜻한 마음과 열정을 가진 교황이 가는 곳마다 환영 인파는 더해 갔다. 4박 5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한국을 떠나며 교황은 고별사와 감사의 메시지를 발표했다.


    "나는 크나큰 기쁨을 안고 여러분을 떠납니다. 그것은 여러분과 함께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고 시성식을 경축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뿐 아니라 그처럼 성스러운 조상을 모신 한국인들 모두에게 잊지 못할 소중한 체험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하고 북한에서 한 가족으로 상봉하기를 아픔 속에 고대하고 있는 여러분의 부모, 자녀, 형제, 자매 친지를 생각하면서 깊은 유감과 슬픔에 젖습니다."


    교황의 눈에는 어느 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남북으로 갈라진 한국의 현실에서 온갖 억압을 받았던 조국 폴란드를 떠올린 눈물이었을 것이다. 비행기에 오르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국 땅을 뒤돌아보는 교황의 모습에서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  *  *

    로마 가톨릭 교회를 지난 26년 동안 이끌어 오며 인류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큰 족적을 남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2005년 4월 1일 병자성사(病者聖事 : 죽어 가는 자를 위한 마지막 의식)를 받고 전 세계 주교단 인사 단행을 생애 마지막 활동으로 2일 서거했다. 그의 서거는 전 세계 모든 곳, 모든 이에게 아쉬움과 애도의 마음을 짙게 남기고 있다. 바쁜 일상에도, 가톨릭 신자가 아님에도 교황 서거에 이런 마음이 드는 이유는 교황이 인류에게 진정한 화해와 평화가 무엇인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식이 아닌 온 몸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

    지구상의 두 나라(중국과 북한)를 제외하고 그가 입맞춤하지 않은 나라는 없었으며, 아프리카와 유럽, 미주 지역부터 극동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가톨릭 교회의 국제사절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라틴어와 이탈리아어는 물론, 영어 프랑스어독일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에 능통한 그는 지구촌 곳곳의 분쟁 현 장과 아픔의 장소를 찾아다니며 평화와 화해를 전파하고 정치범 석방을 촉구하기 도 했다. 일생 동안의 그의 삶을 단적으로 말하자면 용서와 화해, 그리고 희망이다. 이 책은 아동을 대상으로 한 책이지만, 성인이 읽어도 될 만큼 교황의 활동과 업적, 그리고 그의 따뜻한 인간적 면모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일찍 가족을 여의고 국가적 어려움 등 험난한 시절을 견뎌야만 했지만, 어려운 환경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온 요한 바오로 2세의 일생을 찬찬히 살펴보고 그를 통해 우리의 삶이 좀더 풍성해지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