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도서 요약 

더 나은 세상

저   자
피터 싱어(역:박세연)
출판사
예문아카이브
출판일
2017년 11월
서   재







  • 이 책은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개인의 갈등과 전세계가 마주한 사회적 갈등에서 나타나는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폭넓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싱어 교수는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가 가질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오래된 논쟁에서부터 인류와 미래 세대의 생존을 위협하는 고질적인 문제들을 철학, 윤리, 과학 등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한다.



    더 나은 세상


    인간과 도덕

    인간의 삶은 어디에서 오는가 : 창백한 푸른 점

    과학은 거대한 우주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확장함으로써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볼 때(물론 오염된 공기와 도심의 휘황찬란한 불빛으로부터 충분히 멀리 떨어져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경외와 존경의 감정을 더욱 증폭시킨다. 동시에 우주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왜소한 지위의 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자신의 글 <꿈과 사실(Dreams and Facts)>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은하는 우주의 작은 파편이고, 그 파편 속에서 우리의 태양계는 아주 작은 티끌이며, 그 티끌 속에 있는 우리 행성은 미세한 점에 불과하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은 태양계를 벗어나면서 지구를 찍은 우주탐사선 보이저호의 사례를 언급했다. 1990년 보이저호는 64억 킬로미터나 떨어진 거리에서 본 지구의 모습을 찍었고, 그 흐릿한 이미지 속에서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으로 나타난다. 유튜브(Youtube)에서 ‘Carl Sagan-Pale Blue Dot’으로 검색하면 그 유명한 이미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소중한 것들은 그 창백한 푸른 점 안에 모두 들어 있기에 우리는 지구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세이건의 내레이션을 들을 수도 있다.


    실로 감동적인 장면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러셀은 지구가 광대한 우주 속 티끌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은 인간이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종종 언급했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이 같은 허무주의 관점은 인류의 고향인 지구의 물리적인 크기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러셀은 허무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다만 러셀은 우주 속에서 우리가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인간은 우주에서 자신의 위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존재의 왜소함에 직면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잠재된 위대함에 다가서지 못할 것이다.”


    세이건 역시 이와 비슷한 장을 취했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지구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나누는 국경의 필요성에서 벗어나 서로를 우호적으로 대하고, 우리의 유일한 고향인 창백한 푸른 점을 소중하게 가꿔나가야 할 책임에 집중하게 된다.”



    범죄를 약물로 예방할 수 있다면 : 도덕 알약과 자유의지

    왜 어떤 이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사고에 신고조차 하지 않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무릅쓰며 낯선 사람을 도우려는 것일까?


    최근 시카고대학교에서 실시한 실험은 (도덕적 행동을 하게 되는 특정한 조건이 있는지를 주제로) 새로운 관점에서 그러한 현상을 바라보고 있다.


    시카고대학교의 연구원들은 두 마리 쥐를 하나의 우리에서 함께 살게 하다가 그 중 한 마리를 밖에서만 문을 열 수 있는 통에 가두었다. 그리자 갇히지 않은 쥐는 그 문을 열려고 시도했고, 동료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동료를 풀어주지 않으면 혼자서 초콜릿을 독차지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쥐는 동료를 먼저 구출하는 쪽을 택했다. 연구원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쥐들도 동정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물론 여기서도 쥐들마다 차이는 존재했고, 총 30마리 중 동료를 풀어준 쥐는 23마리였다. 차이의 원인은 개별 쥐들에게 있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인간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인간을 도우려는 본능이 있다. 많은 과학자들이 사이코패스 같은 예외적인 사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지만, 우리는 대다수의 사람에게서 일괄적으로 드러나는 정도의 차이(아마도 유전자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다)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인간의 두뇌에 대한 연구가 이타적 성향이 강한 두뇌와 그렇지 않은 두뇌에서 나타나는 생화학적 차이를 밝혀낸다면, 과학적 진보는 결국 이타심을 높여주는 ‘도덕 알약’의 개발로 이어지게 될 것인가?


    정말로 도덕 알약이 개발된다면 우리 사회는 과연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 범죄 성향을 억제하는 약물을 체내에 주입하는 장비가 있다면 범죄자를 교도소에 보내는 대신 약물을 처방하는 대안을 받아들일 것인가? 그렇게 된다면 정부는 범죄 성향이 높은 사람들을 사전에 색출해내기 위해 시민들을 감시할 것인가? 범죄 성향이 높게 나타난 시민들에게 도덕 알약을 복용하도록 강제할 것인가? 만약 시민이 복용을 거부할 경우에는 위치추적 장치를 채우고 문제가 생기면 추적이 된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할 것인가?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에 앤서니 버지스(Anthony Burgess)는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라는 제목의 미래 소설을 통해 폭력성을 완전히 제거해버린 악랄한 조직 폭력배 두목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의 1971년도 작품은 ‘아무리 범죄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자유의지를 박탈하는 방식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논의에 불을 지폈다. 도덕 알약과 관련된 모든 논의 역시 이와 비슷한 반발에 직면할 것이다.



    동물과 윤리

    만약 물고기가 비명을 지른다면 : 야생 어류의 복지

    어릴 적에 우리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강변이나 바닷가를 종종 거닐었다. 거기서 우리는 낚시꾼들이 줄을 잡아당기면서 미끼를 문 물고기와 씨름하는 모습들을 지켜봤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미끼로 쓰기 위해 양동이에서 작은 물고기를 꺼내서 낚싯바늘에 꿰는 장면을 보게 됐다. 그 작은 물고기는 입에 바늘이 꽂힌 채로 몸을 떨고 있었다.


    2010년 8월 <피쉬카운트(fishcount)>에 올라온 “바다에서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야생 포획 어류의 복지(Worse Things Happen at Sea: The Welfare of Wild-Caught Fish)”를 읽는 동안 어릴 적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됐다. 전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먹기 위해 동물을 죽여야 할 때 최대한 고통 없이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물고기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바다나 양식장에서 물고기를 잡고 죽이는 과정에는 인간적인 도살 방식에 대한 규제를 찾아볼 수 없다. 그물 어선에 포획된 물고기는 갑판 위에 무덤처럼 쌓인 채 질식해 죽어 간다. 연승어업으로 알려진 상업용 포획의 경우 50~100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낚싯줄을 바다에 투척하는데, 거기에는 수백에서 수천 개에 이르는 미끼들이 바늘에 꿰어 있다. 바닷속에서 미끼를 문 물고기들은 몇 시간을 끌려 다니다가 선상으로 올라올 때까지 입이 바늘에 걸린 채로 또렷하게 살아 있다.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더라도 논의를 위해 이런 어업 활동이 유지 가능한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물고기가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의 대규모 포획 방식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위안 삼을 수 있다. 하지만 물고기의 신경계는 분명하게도 조류나 포유류의 신경계와 흡사한 형태를 갖고 있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의 어류생물학 교수인 빅토리아 브레이스웨이트(Victoria Braithwaite)는 아마도 이 주제와 관련하여 가장 오랫동안 연구를 수행한 학자일 것이다. 그녀의 최근 저서 『물고기도 고통을 느끼는가?(Do Fish Feel Pain?)』를 통해 물고기가 고통을 느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유럽연합의 과학위원회는 대단히 많은 과학적 증거가 물고기도 고통을 느낀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물고기의 고통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인가? 피가 차갑고 비늘로 덮여 있기 때문인가? 고통을 느낄 때 비명을 지를 수 없어서인가?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상업적 어획이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어마어마한 고통을 야기하고 있다는 증거가 점차 쌓여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야생 어류를 인간적인 방식으로 포획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덜 잔인하고 보다 지속가능한 대안을 찾아내야 한다.



    생명과 권리

    낙태를 허용할 것인가 : 여성의 선택권

    최근 세계보건기구(WHO)가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낙태 수술로 연간 4만 7,000명의 여성이 목숨을 잃고 있으며, 이런 사고들 대부분이 개발도상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또한 500만 명의 여성이 낙태 수술로 심각한 신체적 피해를 입고 있고, 심한 경우 영구 장애로 이어지기도 한다.


    WHO의 설명에 다르면 성교육과 가족계획, 피임과 관련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고, 안전하고 합법적인 인공 유산을 시행하고, 사후 관리를 통해 의학적으로 복잡한 문제를 미리 예방하거나 대처함으로써 사고의 대부분을 막을 수 있다. 개발도상국에서 살아가는 2억 2,000만 명의 여성이 피임을 원하고 있지만 효과적인 피임에 대한 정보나 접근 가능성이 크게 부족한 상황이다.


    낙태 반대자들은 낙태 수술 자체가 태아에게 위험한 행위라고 주장하며 고유한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범죄라고 말한다. 여기서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구성원’으로 정의한다면 그들의 주장은 부정하기 힘들다. 또한 ‘여성의 선택권’만을 강조함으로써 태아의 권리에 관한 윤리적 문제를 외면할 수는 없다. 태아에게 우리와 동등한 도덕적 지위를 부여한다면 산모의 생명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닌 이상 여성의 선택권에 태아의 생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까지 포함돼 있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낙태 반대론자의 오류는 태아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윤리적인 측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생명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데 있다. 호모 사피엔스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과학적인 사실은 동일한 생명권을 부여하기 위한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또한 자의식이나 이성을 근거로 태아를 동물과 다르게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어렵다. 태아의 지적 능력은 소보다 낮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병원 앞에서 낙태 반대 시위가 종종 벌어지는 것과는 달리 도살장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장면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자의식을 지닌 생명체를 그 의지에 반해 죽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낙태는 생명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행위 또는 생명체의 의지를 무시하는 행위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의식을 갖출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왜 자의식을 갖춘 여성을 보호하지 않고, 또 아직 자의식을 갖추지 못한 존재의 삶을 마감하도록 하는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이성적인 존재로 성장할 가능성을 지닌 모든 존재가 그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허용해야 할 의무는 없다. 잠재적으로 이성적인 생명체에게 추정된 이익, 그리고 실제로 이성적인 여성의 분명한 이익 사이에 충돌이 벌어질 때 우리는 항상 여성에게 우선권을 줘야 할 것이다.



    섹스와 젠더

    생물학적 성별이 그렇게 중요한가 :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

    모든 인간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이 정말로 필요한 일일까?


    성의 경계를 넘어선 사람들은 차별을 겪는다. 성전환자 평등을 위한 국립센터(National Center for Transgender Equality)와 동성애자를 위한 국가 특별위원회(National Gay and Lesbian Task Force)는 2011년에 성전환자의 실업률이 일반인에 비해 두 배에 달한다는 조사 자료를 내놓았다. 게다가 취업을 한 성전환자 중 90퍼센트가 직장에서 성희롱이나 성적인 농담을 겪고 상사와 동료들이 자신에 대해 부적절한 정보를 나누며 화장실 사용에 대한 차별 등 다양한 형태의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보고했다.


    많은 아이가 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행동을 보이고 다른 성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표출한다.


    하지만 자신의 성 정체성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성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나 여성과 남성의 성 기관을 모두 갖고 태어난 사람들은 기존의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에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호주는 2011년에 남성과 여성 사이에 ‘미정’이라는 호칭을 추가해 세 가지 범주로 여권을 발급함으로써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호주의 새로운 분류 시스템은 사람들이 스스로 성 정체성을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으며 태어날 때 주어진 성을 반드시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고 말한다. 일반적이고 엄격한 분류 체계와는 상이한 호주의 시스템은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람들에게 성별을 묻는다. 그런데 이러한 물음이 정말로 필요한 것일까? 인터넷 세상에서는 상대의 성별을 모른 채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한다. 게다가 일부 사람은 개인정보의 공개 범위를 최소화하기 위해 애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사람들에게 남성인지, 여성인지 밝히도록 요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성별을 요구하는 관습은 다양한 역할과 지위에서 여성을 배제하고, 그들에게 특권을 주지 않으려 했던 시대의 유산인가?


    특별한 이유 없이 성별을 묻는 관습을 없애면 스스로를 고정된 범주에 우겨넣어야 하는 이들의 삶을 보다 편안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 불평등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또한 육아휴직과 관련해서 남성들이 겪게 되는 부당한 차별도 막을 수 있다.


    더 나아가 동성애를 법률적으로 보장할 때, 즉 국가가 결혼 당사자의 성을 문제 삼지 않을 때 게이와 레즈비언의 결혼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행복과 돈

    돈이 많으면 행복한가 : 돈, 행복, 기부의 연관성

    사람들은 돈이 많아야 행복해진다고 믿는다. 하지만 오랜 연구 결과는 더 많은 부가 더 높은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소득 수준이 아주 낮은 경우에만 해당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행복에 관한 설문 조사는 일반적으로 삶에 대한 만족도를 묻는다. 하지만 나는 이런 조사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전반적인 ‘삶의 만족도’에 대한 평가는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의 인생을 얼마나 즐기고 있는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데 왜 모든 정부는 1인당 국민소득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걸까?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 애쓰고 있는 걸까?


    부를 축적하는 것은 힘든 시기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오늘날 부의 축적은 그 자체로 중요한 목표이자 개인의 사회적 지위와 성공을 평가하는 기준이 됐다. 그리고 그 기준은 사람들이 일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됐다.


    미국 투자자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은 50년 동안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그의 검소한 생활방식은 그가 흥청망청 돈 쓰는 일에 흥미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버핏이 1960년대에 수백만 달러를 벌고 난 뒤로 더 많은 부를 쌓기 위해 한 노력은 전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버핏은 애덤 스미스가 말하고 카너먼과 그의 동료들이 깊이 있게 다뤘던 ‘허상’의 희생자인가?


    우연하게도 버핏이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기부를 발표했을 때 카너먼의 논문이 나왔다. 버핏은 한 번의 기부로 자신의 삶에 가치를 부여했다. 불가지론자인 버핏이 사후의 축복을 얻기 위해 기부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버핏의 삶은 행복의 본질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까?


    카너먼의 연구로부터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버핏 역시 삶에서 부정적인 감정 상태로 오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1960년대 어느 시점에서 일을 그만두고 벌어놓은 돈으로 먹고 살면서 카드놀이나 하며 여유 있게 살았더라면 더 많은 시간을 긍정적인 감정 상태로 인생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게이츠 재단을 통해서 전세계 수십억 극빈층의 죽음과 장애의 비극을 줄이고 다양한 질병 치료에 기여하고 있다는 정당한 만족감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버핏의 삶은 행복이라는 개념 속에 긍정적인 기분 상태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다.



    국가와 정치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인가 : 종교 풍자와 홀로코스트 부정

    홀로코스트(Holocaust, 유대인 대학살)를 부정한 것으로 기소된 데이비드 어빙(David Irving)에 대해 오스트리아 법원이 실형을 선고했던 시점은 참으로 좋지 않았다. 마호메트를 조롱하는 만화에 항의하는 시위가 시리아,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리비아, 나이지리아를 비롯한 여러 이슬람 국가로 이어지면서 최소 3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후에 나온 어빙의 판결은 표현의 자유가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권이라는 주장을 비웃고 있다.


    우리는 만화가에게 종교적인 인물을 조롱할 권리가 있고,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것이 범죄라는 두 가지 주장을 동시에 할 수 없다. 물론 나는 우리 사회가 표현의 자유를 지지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말은 곧 “데이비드 어빙을 석방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러분이 내가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의 고통과 오스트리아의 반유대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난하기 전에 나는 오스트리아 유대인의 후손이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부모님은 오스트리아에서 탈출했지만 안타깝게도 조부모님을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홀로코스트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했던 데이비드 어빙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느끼지 않는다(이후 그는 입장을 바꿔 자신의 판단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했다). 나는 오스트리아를 비롯하여 전세계에서 나치의 망령이 다시 살아 돌아오지 못하도록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지한다. 하지만 홀로코스트에 대한 부인을 금지하는 방식으로 진실에 다가설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전통적인 옹호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다.


    “어떤 주장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자주, 자유롭게 이뤄지지 못할 때 이는 살아 있는 진실이 아니라 죽어 있는 원칙으로 변질될 것이다.”


    홀로코스트는 살아 있는 진실로 남아야 하며 나치의 잔악한 행위를 의심하는 자들이 이와 관련된 증거에 직면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시스템의 필수 요소다. 민주주의는 모두가 믿고 있는 생각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이 불쾌하게 여기는 이야기까지 끄집어낼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시민들은 자유롭게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종교인이 신성하게 여기는 예수와 모세, 모하메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유가 보장되지 않을 때 인류의 진보는 조그마한 돌부리에도 걸려 넘어질 것이다.


    인권과 근본적인 자유에 관한 유럽협약(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 and Fundamental Freedoms) 10조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 권리는 정부 기관의 간섭이나 분야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고, 정보와 생각을 나눌 권리를 포함한다.”


    이 명백한 조항과 조화를 이루려면 오스트리아는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률을 폐지해야 한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폴란드 등 유사한 법률을 유지하고 있는 유럽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동시에 시민들에게 홀로코스트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 원인이 된 인종차별을 마땅히 거부해야 하는 이유를 널리 알리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가야 한다.



    과학과 기술

    로봇이 의식을 가지면 어떻게 되는가 : 로봇의 권리

    자동차 조립에서 폭탄 제거, 심지어 미사일 발사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로봇은 이미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인간은 그들이 창조한 지적인 기계에 맞서 문명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할 것인가? 일부 전문가는 “인공지능이 언젠가 인간을 넘어서게 될 것이며 적어도 2070년 전에 그 순간이 찾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인류는 문명의 미래에 대해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과연 슈퍼 지능 컴퓨터는 인간에게 우호적인 기계일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인류에 적대적인 로봇의 개발을 막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특별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인가?


    하지만 우리가 현실적으로 걱정해야 할 부분은 로봇이 인간에게 가할 위해가 아니라 인간이 로봇에게 가할 위협일 것이다. 지금 로봇은 단지 하나의 제품에 불과하다. 그런데 로봇이 점점 진화하여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결국 인간의 두뇌도 아주 정교한 기계가 아니던가? 기계에게 의식이란 게 생긴다면 우리는 로봇의 감정을 고려해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 인류가 의식을 지닌 유일한 대상인 동물들과 맺어온 관계의 역사를 고려할 때 로봇을 도덕적 차원에서 바라봐야 할 대상으로 인정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인지과학자 스티브 토런스(Steve Torrance)는 자동차와 컴퓨터, 휴대전화 등 획기적인 신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급속하게 진화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미래에 우리가 의식을 갖춘 로봇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전반적인 차원에서 학대와 혹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전에 우리는 여러 질문에 대답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로봇이 정말로 의식을 갖출 수 있는가? 아니면 의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만들어질 뿐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로봇의 개발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다음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로봇 개발자가 의식의 외형을 흉내 내도록 프로그래밍 했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로봇에게 의식이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반면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게 설계가 이뤄졌다면 우리는 로봇에게 의식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고민은 로봇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회적 운동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