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도서 요약 

시민의 품격 국가의 품격

저   자
이충호
출판사
벗나래
출판일
2017년 07월
서   재







  • 2016년 후반기부터 2017년 상반기까지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지난 시기 한 땀 한 땀 쌓아올렸던 민주화의 성과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을 뼈아프게 목도하고, 이를 바로 세우기 위해 거리에서 치열하게 투쟁을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요구와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오고, 광장이라는 뜨거운 용광로에서 녹아 결합하면서 시민 민주주의가 얼마나 강력하고 위대한지 그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책은 그러한 일련의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저자가《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접하며 느낀 시민과 국가에 대한 근본적 고찰과 나아갈 이정표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다.



    시민의 품격, 국가의 품격


    리더답게

    성숙한 리더에게는 철학이 있다

    철학 있는 리더 혹은 리더의 철학은 국정의 연속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요소다. 새로 들어서는 정부마다 전임 정부의 공적이나 흔적을 지우고 자신의 정책으로 채워야만 위상이 선다고 인식하는 듯하다. 진보에서 보수로 정부의 색채가 바뀐 후 벌어진 일을 돌이켜보면 그림이 훨씬 선명하게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의 "통일 대비 통일세 준비할 때 됐다"는 주장만 해도 그렇다. 천안함 문제를 비롯하여 대북 강경발언을 늘어놓는 등 통일비용을 극대화해놓고 통일세를 언급하는 것이 과연 상식적인가. 설상가상으로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 폐쇄로 진보 정부의 모든 평화적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고, 통일비용만 높여 놓고는 통일대박을 외쳤다.


    결국 다음 날 (옥타비우스, 안토니우스와의)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이 났다. 저녁 식사 때 브루투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저녁 식사 후 철학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는 휴식을 취하러 갔다.

    -브루투스 40절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브루투스 일행에게 암살당해 로마는 사분오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 후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었던 백전노장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가 후계자로 지목한 열여덟 살 애송이 옥타비아누스는 서로 손을 잡고 로마를 차지하기 위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를 암살했던 카시우스, 브루투스 연합군과의 결전이었다. 운명이 걸린 전쟁을 코앞에 둔 전날 밤, 브루투스는 카시우스와 철학을 나누고 마음의 평화를 취하고 있었다. 철학을 논하고 맞이한 아침, 그들은 더 이상 행운의 승리를 확신하는 맹목적 열기에 휩싸이지 않았다. 대신 지금까지 자유와 영광의 인생을 산 것이 행운이라고 말하며, 승리하지 못한다 해도 두려워하지는 말자며 담담하게 서로를 격려했다.


    막말의 정치와 감각적 침묵의 지혜

    지금은 말과 글의 전성시대로, 글로 일어서고 말로 무너지는 세상이다. 막말은 어떻게 탄생하고 성장할까. 막말이야말로 공감과 소통 능력이 부족함을 보여주는 전형인데도 정치인들이 막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트럼프는 막말을 하면 할수록 지지율이 상승해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되었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이 공식을 증명했다.


    유권자들은 정치인의 막말을 통해 상대적 박탈감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한다. 정치는 권력과 자본을 누리는 자와 그로부터 소외된 자가 정치인을 대리인 삼아 싸우고 있는 전쟁터나 다름없다.


    나치가 유대인과 공산주의를 적으로 규정하고 적대적 선동으로 부상했던 것처럼 한국은 여전히 독재라는 향수와 민주주의라는 이상이 대립하는 적대적 환경에서 막말의 온상을 유지하고 있다. 깨어 있는 유권자라고 해서 막말 정치인들보다 결코 도덕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않다.


    말하기가 이처럼 유혹적인 것에 비해 침묵은 수행해야 할 미덕에 가깝다. 그래서 침묵하기가 쉽지 않고 그런 점에서 그 가치가 빛난다.


    디누아르가 분류한 침묵의 종류 중에서 가장 울림이 큰 것은 이른바 감각적 침묵이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어도 얼굴에 밝고 개방적이며 생기 넘치는 기운이 느껴지고, 말에 의존하지 않고도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날 때, 그것은 감각적 침묵이다."


    그렇다면 막말이 넘쳐나는 오늘을 우리는 어떻게 견뎌야 할까. 그들의 막말을 이기기 위해 내가 더 거친 말을 쏟아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의 침묵이 그들의 거친 말을 이겨낼 만큼 깊게 흐르는 것도 아니기에 세상은 더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거울이 있다. 집회서 20장의 침묵의 말이라는 거울이다.


    "침묵을 지켜 현명함이 드러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끊임없이 지껄임으로써 남에게 미움을 사는 사람도 있다. 대답을 못해서 침묵을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답할 때를 기다려 침묵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가 오기까지 침묵을 지키나, 어리석은 사람은 때를 분간하지 못하고 수다를 떤다. 너무 수다를 떠는 자는 남의 빈축을 사고, 말로 남을 누르려는 자는 남의 미움을 받는다."


    패자에 대한 승자의 진정한 용기

    1942년 1월 27일 윈스턴 처칠 수상은 영국 의회에서 연설하면서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던 적장인 롬멜 장군을 칭찬한다. "우리의 상대에게는 무척이나 용감하고 유능한 장군이 있습니다. 이 전쟁의 참상과 관계없이 개인적인 평가를 해도 된다면 나는 그를 위대한 장군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영국의 수상이, 그것도 의회의 공식 연설에서, 더욱이 연전연패를 당하고 있는 마당에 적국의 장군을 칭찬하고 있다. 아마 처칠은 지피지기의 관점과 자신의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했을 것이고, 그의 연설을 듣는 의회와 국민들은 처칠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음에 틀림없다. 처칠과 롬멜의 경우도 당장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당사자로 마주하면 적이 분명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더욱 큰 환경인 국가의 관점에서 본다면 국가를 대신하는 상대방으로서 예의와 존경을 보일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시나브로 경제에 종속된 우리의 삶도 실제 전쟁 못지않게 치열하다. 대기업 위주의 경제정책이 펼쳐지는 동안 관료사회는 학연과 지연으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었고, 승자끼리만 전리품을 나누어 가지면서 권력은 국민들을 개, 돼지로 여겼으며,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수족처럼 부려왔다. 아무리 우리의 경제가 대외 의존적이라 해도, 지금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개방과 경쟁을 할 수밖에 없다 해도 그런 정책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폐해에 대해 적어도 국가는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예의를 보여야 한다.


    네덜란드의 경제 구조는 국내총생산의 약 50%가 수출입과 관련될 만큼 대외 의존적이고 개방되어 있다. 하지만 노동 현장은 우리와 천지 차이다. 네덜란드에서는 파견 근로자들에게도 단체협약이 적용되며, 시간제 근로자들도 임금과 복지 등 모든 면에서 정규직 근로자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그래서 일과 가정 또는 여가생활 사이에서 시간을 유연하게 쓰려는 근로자가 더 많고 스스로 주 5일제에서 주 4일제로 변경해 부부가 서로 돌아가며 육아를 담당한다.


    사회나 개인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은 보험과도 같다. 눈에는 크게 보이지 않는 작은 배려가 하나하나 쌓였다가 필요한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흘러가서 힘을 주기 때문이다. 역지사지하면 승자가 패자가 되어도 부끄럽지 않고 패자가 승자가 되어도 오만하지 않는 법이다. 승자의 용기가 패자에 대한 관용을 낳지 못한다면 그의 고결함은 허상에 불과하다.



    시민답게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테뤼키온의 제안에 클레오메네스가 대답했다.


    "가엾은 사람. 그대가 말한 방법은 가장 쉬운 방법이고 죽는다는 것은 누구든 택할 수 있는 길이네. 전쟁에서 패하고 도주하는 행위보다 더 수치스러운 행위를 계획하면서 뿌듯하던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행위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행위 그 자체여야 하네. 자기만을 위해 죽는 것은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일만큼 치욕스러운 행위라네."


    이 말에 테뤼키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클레오메네스와 헤어지자마자 홀로 해변으로 내려가 목숨을 끊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자살을 선택한 인생이 많이 나온다. 시대의 분위기가 적에 손에 죽는 것을 수치로 여겼고, 자살이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동시에 사회에서 용기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조르주 미누아가 쓴 『자살의 역사: 자발적 죽음 앞의 서양 사회』를 보면 고대 그리스에서 자살은 자기 선택에 의한 죽음의 한 방식이었다. 종교적 금기가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서양 사회를 지배하면서 자살은 사탄의 유혹으로 여겨졌으며 종교적 금기로 굳어졌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살을 개인의 행위가 아닌 사회적 조건에 의해 발생하는 현상으로 보았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자살은 사회적 타살에 가까울지 모른다. 2014년 2월 서울의 한 단독주택 지하 1층에서 어머니와 큰딸, 작은딸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들은 9년 전부터 이 집에 살면서 월 50만 원인 집세를 꼬박꼬박 냈고, 주변의 도움을 받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한 달 전에 엄마가 팔을 다치면서 식당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이 때문에 생계를 이어가는 게 막막해지자 엄마는 두 딸과 함께 목숨을 끊었다.


    우리는 자살을 자살자 개인의 문제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자살 충동은 결코 우리를 비껴가지 않으며, 막상 닥치면 자신의 힘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을 짊어지고 힘겹게 걸음걸음 내딛던 나의 경우도 그랬다. 다음은 그 어느 날의 기록이다.


    "애초에 의사가 알려준 병명과 싸우는 일은 어쩌면 결론이 정해진 것인지 모른다.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도 없이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겠다고 미궁 속으로 뛰어 들어간 어리석음에 가깝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두 가지뿐이다: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그 미로를 헤매다가 생을 마감하든가 미노타우로스에게 잡아먹혀 죽든가.


    나는 버려지는 삶과 스스로 버리는 삶이 매한가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동굴 밖 사람들은 극단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미궁에 혼자 놓인 사람에게는 그 극단의 선택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다만 미로 안에서 벌이는 나 혼자만의 소동이 동굴 밖 사람들에게는 허공에서 길을 내는 바람처럼, 느린 산책하는 하늘 한쪽의 구름처럼, 햇볕 쪼이는 산기슭 야생화의 하늘거림처럼 그렇게 무심하게 흘러갔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Vae victis! 지는 자는 비참하다

    브렌누스는 황금 천 리브라를 가져오면 로마를 깨끗이 떠나겠다고 했다. 로마인들은 브렌누스가 제시한 조건에 서약하고 황금을 가지고 나와 무게를 재기 시작했다. 그런데 갈리아 사람들이 처음에는 은밀히, 나중에는 노골적으로 저울의 균형을 흐트러뜨렸다. 로마 사람들이 이에 격분하자 브렌누스는 비웃음과 함께 칼을 뽑더니 칼과 허리띠를 비롯한 온갖 것들을 저울에 올려놓았다.


    술피키우스가 물었다. "대체 뭘 하자는 짓입니까?"


    "뭘 하자는 짓이겠소? 패한 자만 억울한 거지." 이 말은 그 즉시 속담이 되었다.

    -카밀루스 28절


    브렌누스가 내뱉은 말이 바로 "Vae victis!"였다. 패자에겐 비애뿐, 지는 자는 비참하다는 뜻이다. 기원전 390년 갈리아족의 브렌누스가 로마를 점령하고 로마인들에게 일정 양의 금을 바치라고 하면서 부정하게 저울질을 했다. 이에 로마인들이 불평하자 패자에게 불평할 권리는 없다는 의미로 한 말이다.


    혁명은 공포와 탐욕으로 만들어진다. 공포와 탐욕을 이겨낼 때 혁명은 완성되고 그 둘 중 어느 하나가 부족하면 반혁명으로 남는다. 공포는 혁명의 시작이지만 탐욕은 반혁명의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다.


    작은 승리를 반복할 때 소박한 행복이 이루어지는데, 우리는 탐욕으로 인해 큰 실패를 반복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따라서 탄핵이라는 혁명 이후의 선택이 중요하다. 절망을 딛고 올라온 국민이 정상에 상주하려는 정치의 탐욕을 끌어내지 않으면 그로 인한 비극은 오로지 국민의 몫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맷값과 땅콩사건은 Vae victis!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자들의 본질을 교과서처럼 보여주었다. 동시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허술하게 조직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이런 사건을 대할 때마다 우리가 받는 고통이 무익하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이는 나름의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고통이 전혀 아니라는 데서 오는 분노이다. 그들의 반혁명적 태도가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미로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분노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고치는 건 오로지 약자들의 몫이다.


    오늘도 우리의 일상은 반복된다.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승자와 패자가 정해진 싸움을 하기 위해 사각의 링 안으로 떠밀려 들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맨손으로 올라간 그들 앞에는 칼을 든 브렌누스가 앉아 있다. 그는 링 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아 칼을 흔들며 시선만 내리깔 뿐 일어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해진 패자는 싸워야 한다. 싸워서 패하지 않으면 대전료도 못 받기 때문이다. 양팔을 들어 올려 얼굴을 보호할 생각도 못하고 다만 저 칼날에도 자비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헛되이 하며 앞으로 멈칫멈칫 나아갈 뿐이다. 패배에는 이미 익숙해졌다.

    시민과 공동체를 지키는 것은 무엇인가

    일반 대중은 약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더 많은 보호가 필요하다고 솔론은 생각했다. 그는 피해를 입은 사람을 대신해서 누구나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맞거나 상처를 입었다면,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그를 대신하여 제소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시민 전체가 한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고, 또한 남의 불행에 대하여 안타깝게 여기도록 하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어떤 도시가 가장 살기 좋은 도시냐고 물었을 때 그는 대답했다.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이 피해자와 합심하여 가해자를 처벌하려고 노력하는 도시다."

    -솔론 18절


    솔론, 그는 아테네 민주정치의 초석을 세우고 체제를 정비한 입법자다. 시민 전체가 한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고, 또한 남의 불행에 대하여 안타깝게 여기는 양심의 연대를 목표로 하는 사회에 어울리는 인물임에 분명하다.


    솔론의 치적 중에 가장 빛나는 것은 바로 시민들의 빚을 탕감해준 일이다. 그는 가난한 자들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부자들의 뜻을 따라야 하는 건 부당하다고 믿었다. 그는 법정이나 나라의 관료, 공공 의회 등이 부자들의 명령을 받고 그들을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약자인 시민이 정의를 외치기는 쉽다. 그러나 권력자 솔론은 모두에게 공평한 운동장을 만들어주고 거기에서 나오는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지라고 당당히 말했다. 시민들이 피해자를 도와 가해자를 엄벌하라는 주문마저 명령했을 정도다.


    그가 제정한 법 가운데 특이하고 놀라운 것이 하나 더 있다. 파벌이 형성된 때에 그 어느 편도 들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시민권을 박탈할 것을 규정한 법이다. 아마도 공공의 복리에 무감각하거나 무관심한 채 개인의 일만 챙기거나 나라와 관계되는 고민이나 어려움을 나누지 않으려는 의식을 차단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시민이라면 더 좋은 주장, 더 정의로운 주장을 지지하고 그에 따른 위험을 감수하면서 도움을 주어야지 가만히 팔짱 끼고 앉아서 어느 주장이 이기는지 지켜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군주론』을 읽으며 놀란 것 중 하나는 니콜로 마키아벨리 시대에 이미 프랑스의 정치질서가 모든 계급을 보호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는 그의 언급에 대한 내용이었다.


    "질서가 잡힌 국가와 현명한 군주는 귀족들이 분노하지 않도록, 또 인민이 만족하도록 항상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군주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입니다. 프랑스는 근래에 가장 질서가 잘 잡히고 잘 통치되는 왕국들 중의 하나입니다."


    프랑스 왕은 인민들에게 호의를 가졌다는 이유로 귀족들에게 미움을 사거나, 귀족들에게 호의를 가졌다는 이유로 인민들에게 미움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왕은 직접 적개심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없는 중립적인 제3의 심판기관인 고등법원을 내세워 귀족들을 견제하고 인민들을 보호하려 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이를 두고 현명한 리더의 신중하고 적절한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이라고 판단했던 이유도 수긍이 간다.


    나라답게

    개인의 희망이 곧 국가의 정책이다

    그리하여 왕의 재산이 거의 다 없어지고 남에게 넘어갔을 때 페르디카스가 물었다.


    "그러면 전하께 남는 게 무엇입니까?"

    그러자 알렉산드로스가 말했다.


    "희망, 이 또한 그대와 함께, 원정을 가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가질 것이네."


    그러자 페르디카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산을 받지 않았고, 이에 알렉산드로스의 다른 동료들도 동참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호의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남은 재산을 내놓았고 그가 마케도니아에 갖고 있던 거의 모든 소유물은 이런 식으로 분배되었다.


    -알렉산드로스 15절


    동쪽을 향한 원정을 떠나기 전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모든 토지와 재산을 친구에게 나누어주었다.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에 다 걸기를 한 것이다. 무엇이 그에게 모든 인생을 다 걸게 했을까. 그것은 바로 희망이었다. 그는 모든 나라가 자신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세상을 꿈꿨다. 그 희망을 위하여 그는 정복자의 위엄을 지키면서도 정복한 나라의 풍습과 전통을 받아들였다. 알렉산드로스는 희망이 있었기에 전쟁터에서 항상 선두에 서서 승리의 깃발을 흔들 수 있었다. 희망에 찬 그의 태도는 부하들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군대로 거듭나게 했고, 싸울 때마다 승리를 이어갈 수 있었다.


    2016년 11월 희망제작소가 발표한 시민희망지수에 따르면 한국인의 사회희망 인식은 100점 만점에 겨우 44점이었다. 개인희망 인식 역시 100점 만점에 63점에 불과했다. 개인적으로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지만, 사회에 대해서는 절망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의미다. 괴테는 말한다. "인간이 절망하는 곳에는 어떠한 신도 살 수 없다."


    개인이 느끼는 행복감은 질병관리나 생산성, 창의성 등 국가가 관리해야 할 지표에 달려 있다는 연구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사회적 관계에 따른 삶의 질이다. 개인의 행복이 국가의 복지정책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정치에 반영되도록 할 것인지는 여전히 시민의 몫이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돈의 시간, 하지만 우리는 진정한 여행을 떠나야 한다. 가장 훌륭한 시와, 가장 아름다운 노래와, 가장 넓은 바다와, 불멸의 춤과, 가장 빛나는 별을 찾아서 가장 먼 여행을 떠나야 한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청년이 세우고 노인이 지키는 사회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춘추시대, 정나라는 자산이라는 재상이 다스리고 있었다. 각 지방에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인 향교가 있었는데 점차 정부시책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정치활동 거점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이를 우려한 측근들이 향교의 폐쇄를 진언하자 자산은 그 의견에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그들이 매일 밤 향교에 모여 우리의 정치를 비판하고 있는 걸 나도 안다. 나는 그들의 의견을 참고해 평판이 좋은 정책은 실행하고 나쁜 정책은 개선할 것이다. 이만하면 그들은 내게 스승이 아닌가. 물론 무력으로 그들의 입을 막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는 강물을 막는 것과 같다. 강물을 막으면 불어난 강물이 둑을 무너뜨리고 홍수가 나서 많은 사상자를 낼 뿐이다. 그러니 강물을 막기보다 조금씩 물을 흘려 보내 수로를 만드는 편이 더 낫다."


    유연한 정치는 지도자의 본질적 태도에서 나온다. 저들이 경험했던 여유로운 정치를 우리는 왜 맛보지 못하는 것일까. 국가에 대한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원로라 불리는 어르신들은 어떠한가. 키케로는 『노년에 관하여』에서 그들의 가치를 높이 사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위대한 나라는 젊은이들이 전복하고 노인들이 지탱하고 회복하였다."


    김동길 대한노인회 고문이 "노인들이 정당을 조직해서 큰일을 앞장서서 하자"고 제안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패기 있는 노인들 100명만 정치일선에 내세울 수 있어도 친북, 종북은 이 나라의 정치풍토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쉴 것이며, 이들을 단속하지 않고서는 한국의 경제도, 정치도 발전할 수 없다며 그 제안 배경을 설명했다.


    젊은이들이 올바른 시민의식, 정치의식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미래를 꿈꿀 수 없다. OECD 34개국 중 유일하게 18세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정치․사회의 민주화, 교육 수준의 향상,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한 정보 교류로 인하여 18세에 도달한 청소년도 독자적인 신념과 정치적 판단에 기초해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과 소양을 갖추었다며 개정 의견을 낸 지 오래다.


    미래 세대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만큼 모순된 것도 없다. 18세가 살아가야 할 30년과 70세가 살아가야 할 30년이 똑같은 시간은 아닐 것이다. 일본은, 18세 이상으로 선거연령을 낮추고 처음 치른 참의원 선거에서 보수인 자민당이 18~19세 유권자들로부터 40%의 지지를 얻었다. 낮아진 선거연령에 맞춰 자민당이 청년들의 표심을 잡기 위한 노력을 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더 넓어진 유권자의 스펙트럼에 정당은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고 그런 과정에서 청년의 의사가 정책에 반영된다.


    내가 상상하는 아름다운 나라는 청년에 의한, 노인을 위한, 청년의 나라다. 왜냐하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청년의 기쁨과 스릴로 재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