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청 도서요약
   국내도서 요약 

이어령의 강의

저   자
이어령 (지은이)
출판사
열림원
출판일
2024년 02월







  • 생명 자본주의, 디지로그 등을 제시하며 빠르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와 이 사회가 살아남을 방법을 가르쳤고, 평생 “호기심이 가득 찬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자유로운 지적 유영을 멈추지 않았던 고 이어령 선생이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이어령의 강의


    마스크 한장

    1백 년 만의 첫 졸업식

    영광스러운 졸업식에 축사를 하려고 나왔지만 제 눈앞에서는 검은 카메라 렌즈만이 절 지켜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랑스러운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축하의 꽃다발도, 축하객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1백 년 가까운 서울대 역사 가운데 오늘 같은 졸업식을 치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좋든 궂든 여러분은 비대면 강의를 듣고 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그룹에 속한 졸업생이 된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디지털 세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앞당겨 학습하게 되었고, 동시에 살결 냄새 나는 오프라인의 아날로그 세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강의 듣는 수업만이 아니라 잔디밭 교정을 거닐며 사사로이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는 것 역시 대학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디지털 공간의 ‘접속’과 아날로그 현실의 ‘접촉’이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로 ‘융합’하는 디지로그 시대를 살아갈 주역이 된 것입니다. 또한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한 사람의 기침 하나가 내 일상을 뒤집어놓는 상황도 겪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어떤 물질적 가치보다 생명의 내재적 가치가 우선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그 순간 물질 자본이 생명 자본으로 전환하는 현장도 목격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코로나 팬데믹의 학습 효과로 인해 누구나 쓰고 다니는 똑같은 마스크 한 장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시각과 생각을 얻게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여러분에게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이유를 물으면 “나와 남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간단한 대답 같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답변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위해 쓴다”라는 사적, 이기적 답변이 아니면 “남들을 위해서 쓴다”의 공적, 이타적 답변밖에는 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축하 메시지입니다

    오늘날 같은 경쟁 사회에서는 나에게 득이 되는 것은 남에게 실이 되고 남에게 득이 되는 것은 나에게는 해가 되는 대립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의 이분법적인 배제의 논리가 지배해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우리는 마스크의 본질과 기능이 그 어느 한쪽이 아닌 양면을 모두 통합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나를 위해 쓰는 마스크는 곧 남을 위해 쓰는 마스크”라는 공생 관계는 지금까지 생명의 진화를 ‘먹고 먹히는 포식 관계, 남을 착취하는 기생 관계’로 해석해왔던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똑같이 마스크를 쓴 얼굴이지만 그것을 쓰고 있는 마음에 따라서 포스트 코로나의 앞날이 결정될 것입니다. 상상해보십시오. 70억 명의 세계인을 향해 당신은 왜 마스크를 쓰고 있는지 물어보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요. “나와 남을 위해서”라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정부에서 쓰라고 하니까 쓴다고 대답할지 모릅니다. 오랫동안 획일주의와 전체주의 밑에서 길들은 사람들이 많은 까닭입니다.


    여러분은 자타와 공사의 담을 넘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만들어가는 주역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손 안에 있는 학위 수여증은 우리의 미래를 담보하는 보증서인 것입니다. 이것이 비대면으로 치러진 졸업생 여러분에게 보내는 저의 축하 메시지입니다.



    ‘뜨다’에서 ‘날다’로

    빙(being)이 아니라 비커밍(becoming)

    오늘 입학식장에 모인 신입생들에게 축하의 말보다는 위로의 말을 보내고 싶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오래 밤잠을 자지 못했는지, 얼마나 많은 친구들과 비정의 경쟁을 벌여야 했는지, 그리고 부모님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부담감을 주었는지 그동안의 여러분 고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당면한 여러분의 대학 생활이 어떤 것인지 그 의미를 탐색하기 위해서 나는 여러분과 비슷한 나이인 스물 한 살에, 결투 끝에 죽은 프랑스의 천재 수학자 갈루아를 기억해주기를 바랍니다. 대수의 일차, 이차방정식은 이미 몇천 년 전 바빌로니아 시대에 풀렸고 삼차와 사차방정식도 18세기에 오면 모두 풀리게 됩니다. 그런데 오차방정식부터는 누구도 풀 수가 없는 난제로 남아 있었지요. 그때 갈루아는 차가운 하숙방에서 묵묵히 연구를 한 끝에 오차방정식을 푸는 공식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것입니다.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대학이 직면하고 있는 중요 과제는 종래의 공식으로는 풀 수 없는 고차 방정식에 도전하는 것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고 봅니다. 기존의 공식으로 풀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 종래의 패러다임을 바꿔 새 고차방정식의 미지수를 푸는 해법을 창조해야만 합니다. 말하자면 수리학과 해석학이라는 서로 다른 수학의 두 계통을 하나로 융합하는 패러다임시프트를 하지 않고서는 그 난제들을 풀 수 없는 것이지요.


    그것을 스물한 살의 청년이 해치웠던 것입니다. 갈루아는 동료와의 결투에서 부상을 입고 죽어갈 때, 그에게 달려온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스물한 살의 나이에 죽는다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하단다.”


    흔한 말인 것 같지만 “대학생이 되었다”는 말속에는 이렇게 무한한 가능성이 잉태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람을 평가할 때에도 “사람이 됐다, 못 됐다”라고 합니다. 인간의 존재를 끝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빙(being)’이 아니라 ‘비커밍(becoming)’이지요. 그런데 ‘되다’라는 한국말은 ‘다외다’와 같은 것으로 ‘-답다’와 뜻이 같다고 합니다. 즉 “대학생이 되었다”라는 것은 “대학생답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지요. 어떻게 해야만 대학생다운 것인가.


    학교라고 하면 여러분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학교종이 땡땡땡’이라는 그 동요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정해진 시간에 움직이고 “어서 모이자”라는 말처럼 우리에게 겁을 주고 재촉하는 타율과 집단의 명령어였습니다. 제복 속에서 매몰되고 길들고, 개인은 항상 이 타율에 길듭니다. 유치원 때의 자유분방하던 시간들이 초등학교에만 들어와도 하나둘씩 깨어집니다.


    스티브 잡스는 회사가 명령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질문으로 움직이는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것이지요. 회사는 명령이 아니라 질문에 의해서 움직인다, 학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타율의 명령,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은 전체의 집단에 끼어 움직이는 것이지요. 종소리와 어서 모이라는 채찍과 집단은 타율의 소리요 타율의 말이었지요. 그 자리에서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멋있게 사세요

    대학을 ‘광산의 카나리아’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카나리아는 공기에 민감해서 갱내가 오염되면 먼저 죽게 되고 광부들은 그 경보를 통해서 위험을 알기 때문이지요. 학교는 칸트가 ‘영구 평화론’에서 밝힌 국가의 도덕적 발전 단계와 흡사한 것입니다. 처음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는 기율이 없는 상태고 그 다음의 초-중-고는 ‘타율’의 단계입니다. 세 번째 단계인 대학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율’의 환경과 만나게 딥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은 무기율과 타율의 단계를 거쳐서 ‘자율’의 3단계에 오르게 된 것이지요.


    칸트가 그의 ‘영구 평화론’에서 말한 국가 도덕률의 단계처럼 여러분이 다니던 학교 역시 유치원의 ‘무기율’ 단계에서 초-중-고의 타율 단계를 거쳐 오늘 비로소 대학생이 되면서 ‘자율의 단계’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 “학교종이 땡땡땡”이라고 부르던 등교 시간, “어서 모이라”는 강박관념, 우리를 기다리며 지켜보는 선생님의 시선, 그 모든 타율의 시간과 공간과는 다릅니다. 한마디로 자율성입니다.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폭이 넓어진 것입니다.


    남아프리카의 영양, 스프링복(springbok)은 이름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수 미터씩 뛰어오르는 뛰어난 점프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나무 열매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한 마리가 뛰기 시작하면 그 옆의 스프링복도 놀라 덩달아 뛰기 시작한답니다. 그러다보면 한 마리가 다섯 마리가 되고, 이어 열 마리, 백 마리, 수백 마리로 그 수가 계속 늘어간다고 합니다.


    그렇게 계속 뛰다가 벼랑에서 호수가 다다라도, 앞에서 뛰던 친구는 서고 싶지만 뒤에서 밀어붙이니까 설 수가 없어 그냥 벼랑이나 호수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수십 마리에서 수백 마리까지 죽는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오직 놀라거나 옆에서 뛰니까 그냥 뒤따르다가 생기는 재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거죠. 이러한 재난은 스프링복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비전없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남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삶의 비전을 가지고 멋있는 삶을 살아낼 멋진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멋있게 사세요.



    대학생의 창발력, 그리고 새로운 길

    격차없는 사회가 선진사회다

    정리를 해보면 첫 번째, 선진화가 무엇인지를 배워라. 우리 사회는 후진적인 요소가 너무 많아 조화가 잘 안 되는 사회입니다. 어느 분야는 크게 발달하여 세계에서 1~2위를 다툴 정도인데 바로 옆의 분야는 꼴찌 수준이라면 선진화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선진화는 한마디로 말하면 격차가 없는 사회예요. 정신적인 격차, 지식의 격차, 재산의 격차 등 격차가 없는 사회가 선진사회고 격차가 많을수록 후진사회예요.


    우리가 중국을 선진국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푸둥 같은 데 가면 사람들이 다이아몬드 끼고 어마어마한 벤츠 타고 다니는데, 거기서 조그만 내륙으로 가보면 머리에 이가 득실거리는 아이들이 수두룩합니다. 일본이 왜 경제국인가 하면 전국 어디를 가나 격차가 적어요. 일본에 가서 우동 가게 아무 데나 들어가보세요. 일류 우동집이나 싸구려 우동집이나 맛과 서비스가 거의 비슷해요. 역마다 판매하는 도시락의 질도 다 비슷해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 심하게 들쭉날쭉합니다. 이런 격차가 없도록 들쭉날쭉한 부분이 평균적으로 다 발전하여 선진국 수준으로 만들어야 진정한 선진국이 되는 겁니다.


    선진화란 결국 어울림이 있어야 하고 조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선진국이 아니에요. 여러분이 선진화에 대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나름대로 해석해서 찍어보도록 하세요. 어느 교수가 “선진화로 가는 길은 격차를 없애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엘리트를 없애라는 것은 아니다. 엘리트를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준으로 하여 모든 분야를 엘리트 수준으로 다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 이렇게 말했다고 하면, 나 같으면 청계천으로 나가 주변 풍경을 찍겠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느낄지 몰라도 난 청계천에 가면 구역질이 납니다.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화려하고 선진적인데 그 모든 요소가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어요. 시청 앞 광장의 ‘스케이트장’이라고 써놓은 글씨와 루체비스타를 비교해보세요. 루체비스타는 아름다운데, 그 아래 붙어 있는 ‘스케이트장’ 글씨는 자갈치 시장의 횟집 분위기가 느껴질 것처럼 써놨어요. 이런 모습을 촬영하여 “선진국으로 가려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자막을 넣는 겁니다. 인사동은 부조화의 극치예요. 번데기 장사 옆에 보석 장사 있는 것 등등을 찍어서 시리즈로 올리는 거예요. 우리 사회에 이런 게 있더라 하고 한 달 동안 그 주제만 찍고 다녀요.


    여러분이 마음만 먹으면 UCC 주제는 무궁무진합니다. 화성론과 수성론을 예로 들어보죠. “이 세상은 불로 되어 있다. 이 세상은 물로 되어 있다.” 이 둘은 달라요. 물과 불은 원소 중에 가장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하나는 위로 가고 하나는 아래로 가고, 하나는 뜨겁고 하나는 차갑고. 그런데 뭐가 다른가? 화성론은 반드시 태울 것이 있어야 합니다. 수성론은 자기가 얼마든지 독립적으로 흘러갈 수 있어요. 수성론은 어떤 것을 키웁니다. 그런데 화성론은 키워진 것을 태웁니다. 하나는 파괴적 창조고, 하나는 소실되면서 창조하는 거예요. 불은 자기를 주장하고 물은 겸손하게 숙여요.


    자유분방함의 힘

    방송학과의 경우 PD나 스크립터, 편집자 등 엄청난 일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술 하는 사람들도 자기 재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는 내가 처음 제안해서 만들어진 학교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를 마음껏 공부하도록 해서 우리 예술인들을 세계에 진출시키자는 취지에서 설립된 겁니다. 한예종 출신의 아티스트들이 지난해 뉴욕에 가서 미국 예술계를 휩쓸었어요. 한국에서 바이올린 공부한 학생들도 해외 콘테스트에서 뒤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교육받은 재능 있는 음악인들이 세계의 콘테스트를 휩쓸고 있어요. 그 학교를 만들지 않았다면 그런 우수한 재능이 살아나지 못했을 겁니다.


    언제 모차르트가 커리큘럼 정해놓고 배웠나요? 그런 자유분방한 학교를 내가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교육부 아래 귀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대학을 만들자 해서 만든 학교인데 교과도 내가 작성한 거예요. 한예종을 만들 때 기존 대학의 반발이 심했어요. 그러나 “일반대학에서의 예술교육은 교사를 양성하는 것이고, 이 학교는 아티스트 양성소다. 아티스트는 틀에 묶어두면 안 되고 자유분방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외국에서 한예종으로 유학을 올 겁니다. 여러분도 어떤 틀이나 제도에 갇혀 있지 말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창조력 트레이닝을 해야 합니다. 아까 말한 공동 인지를 공유해야 합니다. 학교에 가도 다른 학생들과 달라야 해요.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캠퍼스에 같이 있는 친구들끼리의 인지가 아니라 선진화에 앞장서는 장관, 총리, 교수, 연구소장을 겸한 사람들과 공동 인지를 해야 합니다. 선진화포럼의 홍보대사니까 그 사람들과 지식을 나누는 것이죠.


    이런 일에 대해 가슴이 뛰지 않는 사람은 당장 그만두세요. 획일성을 반대하는 다양성, 대의, 자유, 감동, 진화, 생명, 이런 키워드들로 여러분의 가슴이 떨리면 도전하세요.



    가슴 뛰는 창조의 힘, 세종

    부정을 긍정으로 만드는 역전의 발상

    창조는 융합 속에서 나옵니다. 왕권과 신권이 늘 다퉜지만 집현전을 만듦으로써 왕권과 신권을 처음으로 조화시킨 분이 세종대왕이십니다. 그렇게 보면 여러분이 뭐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창조라는 것은 눈물 끝에 나오는 것이니, 불행을 행으로 만들고 어둠을 빛으로 만들고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만드는 힘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운명적으로 상처를 가지고 불행했다면 그것이 거꾸로 창조의 원동력이 되는데, 한국 사람만큼 이런 힘이 강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제도 제가 어느 모임에서 얘기했지만 한국 사람의 창조적인 정신은 부정을 긍정으로 옮겨놓는 역전의 발상입니다.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는 겁니다. 그게 개천에서 용 난다는 겁니다. 깊은 물에서 용 나는 건 하나도 신기할 것 없어요. 개천에서 용나는 게 대단한 거죠. 이런 때는 여러분의 가슴이 뛰어야 하는 거예요.


    세종대왕을 보면서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아인슈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퀴리 부인, 이러한 천재들을 죽여왔느냐를 생각해봅니다. 우리에게 창조적인 사람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창조적인 사람을 따돌리고 못난 사람,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면서 결국에 비슷비슷한 사람들만 남았기 때문에 창조적인 발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긍정의 힘, 융합의 힘, 소통의 힘을 이야기한 세종대왕의 정신을 살려 그러한 사람들에게 무대를 만들어주는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열고 닫고 넘어서는 디지로그 세상

    네거티브를 포지티브로

    융합 과학이라는 것은 결국 안 되는 것을 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은 네거티브를 포지티브로 옮기는 일입니다. 유토피아는 희랍어로 아무 데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상향은 아무 데도 없다. 즉 ‘노웨어(Nowhere)‘다. 그러나 시인들은 이것을 간단히 해결합니다. W자를 NO자에다가 붙이면 완전히 다른 뜻이 됩니다. ’노웨어(NOWHERE)’를 ‘나우 히어(NOW HERE, 지금 여기)’로 읽는 정신. 이 말장난, 융통성이야말로 지우개 역할을 해주는 겁니다.


    네거티브를 포지티브로 만드는 것은 무수하게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많은 사람들이 바이러스를 무조건 나쁘게만 봅니다. 그렇지만 바이러스가 나쁜 게 아니에요. 바이러스는 인간하고 정답게 잘 살아왔습니다. 들여다보면 모양도 참 예쁩니다. 바이러스는 다른 생물에 붙어서 증식하는 슬픈 미생물인데, 이 미생물은 지금까지 인간에게 많은 좋은 일을 해왔습니다. 인간의 몸은 무수한 미생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떠한 생물도 단독 생명체는 없어요. 우리가 제거하려고 하는 노이즈, 바이러스, 많은 기생충들이 인간에게 얼마나 필요하고 유익한 존재인지를 알아야 융합 과학의 패러다임이 시작됩니다.


    자연의 형태를 본떠라

    인간들의 기술은 디지털로 되어 있지만, 자연이라는 것은 인간의 논리로 보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모순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적인 자연을 융합하는 것이 바로 바이오미미크리입니다. 바이오미미크리를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은 재닌 베니어스(Janine Benyus)입니다. 재닌 베니어스가 2006년에 주창한 바이오미미크리 개념은 현재도 많은 논의가 되고 있습니다. 바이오미미크리는 자연에서 기술혁신의 아이디어를 얻는 것입니다. 즉 자연 생태에서 기술을 배우자는 바이오미미크리는 초논리적이고 아날로그적인 것이며, 이것이 바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그린 그로스나 그린 테크놀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물을 의미하는 바이오(bio)와 모방을 의미하는 미미크리(mimicry)의 합성어인 바이오미미크리는 자연을 배우고 자연에서 본받자는 것입니다.


    인문학, 예술, 자연과학, 생물학, 이런 모든 것을 탈구축하는 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피가 철철 흐르는, 그러나 겨우 살아봐야 백 년밖에 못 사는 불쌍한 모털(mortal), 태어나면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던 인간들이 서로 의지하면서 그 짧은 세상을 그래도 괜찮게 살 수 있기 위해서 과학은 필요합니다. 특히 생물을 다루는 생물학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결합한 융합을 지향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감각이 하나로 통합된 시대가 오면, 하나의 아름다움과 착함과 진실함이 따로 따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호흡처럼 인체 내에서, 그 가치에 의해서 살아가는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대를 위해서 지금까지 흩어져 있던 자원, 모순 속에서 분열되어 있던 갈등의 구조들을 통합의 양상으로 바꾸고, 38억 년 동안 진화해온 자연의 슬기를 배워야 합니다. 결국 융합기술은 바이오미미크리를 향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나라가 녹색 성장이라든지 새로운 교육, 산업, 문화 모든 면에서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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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