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도서 요약 

100세 철학자의 행복론 2

저   자
김형석 (지은이)
출판사
열림원
출판일
2023년 06월
서   재







  •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까요? ‘나’라는 개인을 넘어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을 꿈꾸며, ‘나’의 행복을 ‘우리 모두’의 행복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전합니다.



    100세 철학자의 행복론 2


    선하고 아름다운 인생의 길

    결혼이라 쓰고, 열매라 읽는다

    사랑의 방식은 다양한 형태가 모두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중에 특히 사랑이 있는 결혼과 행복한 가정은 인류의 가장 값진 전통의 하나로 이어져야 할 가치가 있다.


    “결혼해보라. 후회할 것이다. 하지 말아보라. 그래도 후회할 것이다”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이 있다.


    한때는 우리 주변에서도 ‘결혼은 연애의 무덤’이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연애론자의 말이었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결혼은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며 가정적인 부담은 행복을 빼앗아간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 그렇다고 결혼을 안 하게 되면 남들과 같은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사랑의 보금자리 밖에서 사는 것 같은 아쉬움이 평생 뒤따른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유롭고 행복할 수만 있다면 결혼해도 좋다는 결론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노력이나 사랑의 봉사 없이 자유와 행복을 원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사랑은 더 많은 자유와 행복을 만들어준다는 의지와 노력이 있는 사람만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결혼 때문에 자유로운 연애 생활이 깨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꽃을 즐기기 위해 열매를 맺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진정한 인간적 사랑을 동반한 연애에서 이어지는 결혼은 하나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문제는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개인 중심의 문화가 확산되다 보니, 결혼을 하면 한동안은 부부 단둘만의 즐거움과 행복만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기간에서 벗어나면 부부는 더 성장할 것이다. 양가의 부모 및 가족들과 사랑을 나누며 기쁨을 주고받는 개방적인 가정으로 나아가면 더 좋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이웃과 사회에 대해서도 개방적이며 더불어 사는 자세로 넓혀가야 한다. 그것이 연애에서 결혼을 거쳐 사회로 향하는 가정의 길이다.


    동양에서는 ‘家庭(가정)’이라는 한자를 써왔다. 집은 머무는 곳이고 뜰은 일하는 고장이다. 농경 사회의 결혼은 함께 살면서 함께 일하는 성인의 자격을 갖추는 것이었다. 집의 공간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일터로서의 뜰은 크게 넓어졌다. 직장과 사회가 일을 위한 공간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일터를 찾아 집을 옮기거나 일이 다르기 때문에 한집에 살지 못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일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주말부부라는 말도 있으나 남편과 아내가 다른 나라에서 일하는 가정도 있다. 남편은 미국에서, 아내는 한국에서 일하는 가정도 있고, 남편은 한국에, 아내와 가족은 미국에 있는 가정도 많다.


    결국 결혼은 더 보람 있는 일을 위한 사랑의 결합인 셈이다. 일의 대가는 사회적인 보람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혼의 가장 큰 목적의 하나는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우는 일이다. 그것은 결혼의 열매면서 가정의 발전인 것이다. 간혹 자녀가 없는 부부가 있더라도 자녀를 입양하여 키우는 것이 가정의 행복과 결혼의 목적을 성취시키는 길일 수 있다.


    우리는 혈연사회를 이어왔기 때문에 아직은 입양 문화가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앞으로는 자녀를 키움으로써 부모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결혼의 의무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시대가 찾아올 것이다. 그것은 결혼의 본질적 의미를 성공으로 이어가는 필수적인 길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사는 삶

    훌륭한 친구의 역할

    “그에게 원수는 많았으나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행복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히틀러를 가리켜 한 말이다.


    대개의 경우 유명한 사람에게는 친구가 적다. 많은 사람이 존경은 하지만 우정을 갖기에는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친구가 생기지 않는다. 거기에는 교만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 교만과 존경은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이어도 친구를 갖고 있는 이가 있다. 그는 자신이 유명하거나 훌륭하다고 생각지 않는, 성실하고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명예나 업적보다는 인간성과 평범한 삶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인촌 김성수 같은 분이 그런 인물이다.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으나 언제나 꾸밈이 없는 인간미를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존경을 받으면서도 친구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연인이 서로 사랑하고 가정을 갖는 것은 삶을 함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정을 갖는다는 것은 인생을 같이 간다는 뜻과 통할 수 있다. 그래서 “어진 아내를 가지면 행복해지고 좋은 친구를 가지면 성공한다”라는 격언이 있다.


    인생을 같이 간다는 것은 몇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그 하나는 신뢰성이다. 동양에서도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는 관념을 일찍부터 강조했다. 믿을 수 없을 때는 우정을 가질 수 없고 친구가 되지 못한다. 어떤 이해관계가 끼어들고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고 평하든지 내 친구의 인격과 신의를 의심할 수 없을 때 친구가 된다. 그리고 이때의 신뢰성은 상호 간의 것이다. 한쪽이 한편만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친구 사이에는 거짓이 있을 수 없고, 결코 그 신뢰성을 이용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친구와 인생을 같이 간다는 것은 기쁨과 고통을 나눌 수 있어 즐거움을 더해주며 고통을 줄여주는 노력을 함께하는 일이다. 인생을 사는 데는 뜻하지 못했던 어려움이 찾아드는 일도 있고 기쁨을 나누고 싶은 경우도 생긴다. 그런 때에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고통의 짐을 나누어 지는 일이다. 내 친구가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도 모른 체한다든지 불의의 고통을 받는 일이 있을 때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정이 아니다.


    인생은 나그네라는 말을 자주 한다. 나그네는 외로운 심정을 갖고 산다. 서로 위로하고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가. 평생을 외롭게 혼자 살아갈 생각을 해보자. 그보다 서글픈 삶이 어디 있겠는가.


    인생의 길을 같이 간다는 것은 여러 가지 악의 조건을 멀리하면서 진실과 선을 찾아 전진하는 일이다. 친구 때문에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할 수 있어야 하며 우정 때문에 사회를 살아가는 데 옳고 정당한 길을 걸어 존경받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살펴보면 존경받는 정신적 지도자들은 누구보다도 높은 우정을 갖고 일생을 살아간 사람들이다. 공자가 제자들과 나눈 우정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으며, 예수는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친구로 삼는다고 충언한다.


    예수의 제자 중 일곱 명이 종교적 순교를 택한 것은 참다운 우정의 결과였을 것이다. 생사를 함께하는 친구였던 것이다.


    나는 30여 년 전에 세계 여행을 함께 했던 두 친구와 시일을 정해두고 1년에 몇 차례씩 만나곤 했다. 한 친구는 나와 같은 학문을 했고, 다른 친구는 국사를 전공했다. 서로의 우정을 돈독히 할 수도 있고 서로의 학문 및 사상적 내용을 교환할 수도 있었다.


    그 결과는 대단히 귀한 것이다. 따뜻한 정을 나누면서 서로의 지식을 풍부하게 할 수도 있다. 특히 나이 든 후에 우정과 친교를 나눈다는 것은 노년기의 인생을 풍요롭게 이끌어준다. 또 서로의 정신 및 인간적 성장을 발견하기도 하고 배우기도 한다.


    살아가는 지혜와 인생의 교훈을 얻는 데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 늙어 고독에 휩싸이기 전에…….



    세상을 움직이는 힘

    세상에서 가장 살고 싶은 곳이 있다면

    설 명절 때였다. 인천공항에 외국으로 나가는 여행객들이 많아졌다는 얘기가 나왔다. 일본으로 가는 사람은 점점 더 많아지는데 중국으로 가는 사람은 줄어드는 것 같다는 얘기도 있었다. 내 옆에 있던 후배가 중국에 가보면 개인이나 단체로 관광하는 한국 사람은 자주 보게 되는데 일본 사람은 보지 못했다는 말을 꺼냈다. 나에게 왜 그럴까, 하고 물은 것 같았다. 내가 웃으면서 일반적으로 선진국 사람들은 후진국에 가기를 꺼린다고 했다. 20여 년 전 내가 김진경 총장이 있는 연변과학기술대학을 방문하기 위해 연안에 머물렀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우리도 아프리카 지역에는 많이들 가지 않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를 찾는 관광객도 마찬가지다. 어떤 외국인들이 다녀가는지, 또 다녀가서 어떤 소감을 전해주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관광지 선택 시 생활수준을 고려하지만 국민 교양 수준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한·중·일은 앞으로도 계속 내왕이 많아질 것이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런 미래를 위해 정부기관과 국민들 스스로가 많은 반성과 개선이 필요하다. 우리나라가 적어도 동북아시아에서는 교양과 윤리 의식, 외국인을 대하는 자세 등에서 중국이나 일본보다 앞서는 나라가 되었으면 한다. 그런 점에서는 두 나라가 아직 우리보다 앞서 있는 듯하다. 그것은 국민교육의 결과이기 때문에 우리 청소년들에게도 국제사회와 세계시민적 교양과 과제가 어떤 것인지 자부심을 갖게 해주는 것이 우리 기성세대의 소중한 책임이다.


    자연이 청정한 곳을 가기 위해 노르웨이를 여행했다. 세계 어떤 나라보다도 살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그런데 여름철 백야(白夜)여서 그런지 낮과 밤의 격차가 크게 부담스러웠다. 새벽 두 시에 일어났는데 늦은 아침같이 느껴지고 밤 열두 시가 되어도 낮과 같이 밝았다. 낮에 잠들었다가 밤 없는 낮에 깨어나는 피로감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겨울이 되면 그와 반대가 된다. 한 번쯤 경험해서 좋을지 모르나 평생을 살 곳은 못 된다.


    한때는 하와이가 지상낙원인 듯이 찾아갔다. 그러나 1년 내내 여름밤이다. 겨울도 없지만 봄가을도 없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눈 구경을 하고 싶어 한국을 찾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70~80년을 여름에만 살아볼 생각을 해보라. 나 같으면 지루해서 못 살 것 같다. 내 딸이 미국 텍사스에 살고 있다. 영상 3~4도가 되었다고 해서 초등학생들이 추위를 이기지 못해 임시 휴교를 한다. 그곳은 1년의 열 달이 여름이다.


    그와 반대되는 나라도 있다. 겨울만 있는가 하면 혹한의 추위로 고생한다. 캐나다 토론토에 갔을 때였다. 영하 50도가 되니까 문밖과 거리는 무인지경이 된다. 여름에 더위를 몰라서 좋지만 혹한의 추위는 지옥 같기도 했다.


    이런 지역에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와 같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골고루 찾아드는 고장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낮과 밤의 길이도 그렇다. 하지를 보내고 해가 짧아지기 시작해 동지까지 계속된다. 동지가 지나면 조금씩 길어지는 해를 기다리며 사랑하게 된다. 그런 재미를 모르는 지역의 사람들보다 너무 행복한 세상에 살고 있다.


    여행은 왜 하는가.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고 문화적 유산에 참여하고 싶어서다. 우리가 그런 곳에 살고 있다. 문화는 만드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호주, 뉴질랜드, 남미의 나라들을 가본다. 문화유산을 즐길 곳이 적다. 그곳에 있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아가본다. 거의 볼 것이 없다. 어떤 이들은 파리 루브르미술관에 있는 그림 한 폭 값이 이곳 미술관보다 귀하겠다고 말한다. 호주 시드니에 있는 오페라하우스는 건물 자체가 예술 작품이다. 그러나 어떤 음악과 오페라와 음악이 연주되는지를 살펴보면 서울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는 세계 여행자들이 자연이나 문화재보다 그 고장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찾아볼 때가 올 것이다. 우리도 그에 맞춘 여건을 지금부터 가꾸어나가야 한다.


    나는 제주도보다는 남해의 다도해를 볼 때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살고 싶은 고장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름다움과 휴식은 물론 살고 싶은 해상공원이기 때문이다. 세계 여러 곳을 다녀보았으나 그런 조건들을 갖춘 곳은 없다고 느꼈다. 언젠가는 우리 후손들의 지혜와 노력에 따라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머물며 살고 싶은 마음의 낙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진리와 사랑의 해답

    인간적인 삶을 위한 질문

    19세기 전반기의 프랑스 철학자 콩트는 세계 역사의 발전적 단계를 이야기하면서 종교적 신앙의 시대가 끝나면 철학적 사유의 시대가 오고, 그 후에 실증과학의 시대로 발전하는 것이 사회과학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확실히 현대사회는 과학의 시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 신앙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철학적 사유가 남아 있는 것처럼 종교적 신앙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현재에도 인류의 사상과 역사를 지배하고 있는 종교의 영향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실정이다. 어떤 사상가들은, 마르크스주의는 100년 만에 끝났으나 종교적 갈등은 200년은 계속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만큼 종교인이 많다는 증거기도 하나 아직도 종교적 영향과 혜택을 기대하는 사람이 절대다수라는 뜻이기도 하다.


    미국 사회에서도 보수적이며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고수하는 신도들이 강한 정치 세력을 이루고 있으며, 이슬람 문화권과 인도 대륙에서는 종교적 전통을 배제할 사상적 대체 세력이 없다고 말한다. 장기간 종교를 탄압해온 중국에서도 종교적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많은 사람의 사회적인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과학의 발달과 혜택이 보급되면 종교는 그 정신적 영향력이 점차 약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될 것이다. 사찰의 수가 줄어들고 성당이나 교회가 문을 닫는 현상은 이미 나타나고 있으며 앞으로는 그런 현상이 더 확대될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신앙심이나 인간의 희망, 더 선하고 영구한 가치를 향한 초인간적 기대와 소원까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인간 지능의 영역 확장과 더불어 포스트휴먼 시대가 올 것이라는 과학의 초인간적 가능성을 예고하기도 한다. 가공할 만한 전쟁 무기의 개발과 발전은 인류의 종말을 초래할 수도 있으며, 인간적 가치를 완전히 소멸시킬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 그런 상상이 가능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때 인간은 여전히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며,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적인 삶의 의미와 가치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가능성과 희망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인간이 편리와 삶을 돕기 위해 개발한 과학적 기능이 인간을 노예와 수단으로 격하시키려고 할 때 인간은 자신의 지능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지금까지는 인간의 이성적 가능성을 믿어왔다. 또 우리 자신의 양심과 윤리적 능력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 한계와 때로는 무능함까지 인정하고 있다. 철학자 러셀이 경고했듯이, 핵폭탄을 옆에 두고 ‘폭탄에 돌이나 담뱃불을 던지면 우리는 모두 멸망할 테니 조심하라’는 경고장을 써 붙이고 안심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사실 종교는 개인과 인류의 절망적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욕구와 희망에서 탄생했다. 원시인들은 죽음을 체험하면서 종교적 신생을 갈망했고, 현대인들은 정신적 회의와 절망의 상황에서 영원한 것과 인간적 삶의 긍정적 실존을 요청해왔다. 인간적 삶의 한계 의식과 허무에서 탈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 사상가들이 문제 삼았던 과제들이다.


    그런 인간적 기대와 희망을 종교적 신앙에서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잘못되었거나 미신일 수도 있다. 이는 가장 인간다운 인간애에서 비롯되는 기대와 갈망인 것이다.


    석가나 예수는 그런 신앙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과 석가의 교훈을 접할 때 그 시대와 사회적 상황을 배제하고 그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면 종교적 신앙에는 사이비 신앙이나 미신적인 요소가 큰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 교훈들이 논리나 학설이 아니기 때문에 상징적인 비유로 전해졌다고 해도 그 뜻과 지향점은 구원으로 향하는 복음이다.


    이 뜻을 받아들이는 인간적 수준이 세속적 수준 이하일 때는 종교적 신앙이 불필요하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위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성과 양심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신앙을 위한 물질적 형상이 필요하며 종교는 세속적 기복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후진사회의 종교적 현상은 그런 모습을 갖고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성적 판단과 도덕적 신념을 추구하거나 인류의 영구한 가치와 희망을 염원하는 현대인이 종교적 교훈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에 동참하는 것은 인간다움의 의무이기도 하다.


    사회와 역사적으로도 그렇다. 현대인들은 무한 경쟁이라는 명제를 내걸고 이기적인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그들은 개인의 불행은 물론이고 사회적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 선의의 경쟁이라고 해도 인간은 무한한 경쟁의 주인공도 아니며 그 수단도 아니다. 더 소중하고 중요한 것은 인간애의 길이며 인격의 가치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런 현실 속에서 석가나 예수가 인간애와 인간의 목적을 가르치면서 사랑이 있는 협조와 희생을 요청했다면 이는 당연한 진리가 아니겠는가.


    나 같은 사람도 예수의 교훈에서 인간적 희망과 은총에 의한 가능성을 믿고 따르고 있다. 민족과 인류의 참자유와 희망을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내 지식과 지나온 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계속 예수의 교훈에서 찾아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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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