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도서 요약 

컬티시

저   자
어맨다 몬텔
출판사
arte
출판일
2023년 02월
서   재







  • 무엇이 우리를 자발적이고 열광적인 추종자로 만들까요? 악명 높은 자살 컬트에서, 사이비 종교, 다단계 및 피라미드, 소셜미디어와 그 인플루언서들까지, 논쟁적인 컬트 집단을 면밀히 취재해 그들이 사용하는 광신의 언어, ‘컬티시(Cultish)’를 추적합니다!



    컬티시


    따라 해 봅시다

    컬트 언어를 요모조모 따져 보기 전에, 우선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대체 ‘컬트’라는 단어가 정확히 무슨 뜻일까? 사실 단 하나의 최종적인 정의를 내리는 건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여러 가지를 조사하고 이 책을 쓰면서, 내게 이 단어의 의미는 오히려 더 흐릿하고 불명확해졌다. ‘컬트’를 정의하는 데 혼란을 겪은 건 나만이 아니다. 최근에 로스앤젤레스 집 근처에서 행인 수십 명을 상대로 ‘컬트’의 의미를 묻는 소규모 설문조사를 해 보았다. “너무 많은 권력을 가진 기만적인 인물이 이끄는 소수의 신봉자 그룹”부터 “뭔가에 매우 열성적인 사람들이 모인 집단” “흠, 무엇이라도 될 수 있지 않나요? 커피 컬트나 서핑 컬트 같은 거요”까지 답변은 다양했지만, 어디에도 확신은 없었다.


    이런 의미론적 모호함에는 이유가 있다. 곧 연대적으로 설명하겠지만 ‘컬트’라는 단어의 흥미로운 어원 그 자체가 바로 우리 사회가 영성, 공동체, 의미 그리고 정체성과 맺는 끝없이 변화하는 관계, 즉 점점 더...... 이상해지는 관계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언어의 변화는 항상 사회 변화를 반영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소셜미디어나 세계화 확산, 전통적인 종교의 쇠퇴와 같은 현상으로 인해 우리가 타인과 연결되는 방식뿐 아니라 존재론적 목적도 변화했고, 이로 인해 다수의 위험하거나 위험하지 않은 대안 하위 집단이 생겨났다. ‘컬트’는 이 모든 집단을 묘사하기 위해 발전한 단어다.


    나는 ‘컬트’가 대화 상황이나 발화자의 태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용어가 된다는 걸 깨달았다. ‘컬트’는 죽음과 파괴를 암시하는 저주를 의미할 수도 있고, 커플룩이나 열정을 일컫는 발칙한 비유일 수도 있고, 혹은 그 사이의 무엇이라도 의미할 수 있다.


    소울사이클과 같은 집단에서, ‘컬트’는 문화적으로 배타적인 집단 구성원의 강력한 충성심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 여기에는 분명 시간과 금전적 헌신, 순응주의, 강력한 리더십 등 어느 순간 치명적인 수준이 될 수 있는, 맨슨 수준의 위험한 집단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렇다고 외부와의 완벽한 단절이나 생명을 위협하는 거짓말, 혹은 학대를 암시하지는 않는다. 드러나게 명시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경우 죽을 위험에 빠지거나 물리적으로 집단을 떠나는 것이 불가한 상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인생이 늘 그러하듯이, 좋은 컬트와 나쁜 컬트를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다. 컬트는 스펙트럼이다. 심리상담가이자 ‘트럼프 컬트(The Cult of Trump)’의 저자 스티븐 하산(Steven Hassan)은 미국에서 가장 탁월한 컬트 전문가이기도 한데, 그는 건강하고 건설적인 집단에서부터 불건전하고 파괴적인 집단까지 걸쳐 있는 영향력의 스펙트럼을 기술한 바 있다. 하산은 파괴적 성향을 가진 집단은 세 가지 속임수를 쓴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알고 있어야 하는 사항을 누락하고, 자신들의 이야기가 더 잘 받아들여지도록 왜곡하며, 명백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하산이 예로 언급한 스포츠와 음악 팬들, 소위 윤리적인 컬트와 유해한 컬트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면, 윤리적인 집단은 집단의 신념과 구성원에게 바라는 점, 구성원의 합류로 얻고자 하는 것을 솔직히 밝힌다는 점이다. 또한 집단을 떠난다 해도 심각한 결과가 초래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당신이 ‘더 나은 밴드를 찾았어’라거나 ‘이제 농구 재미없어’라고 말해도, 다른 이들이 당신을 위협하지는 않겠지요.” 하산의 설명이다. “곧 미쳐 버리거나 악마에 사로잡히게 될 거라는 비이성적인 두려움을 느끼지도 않을 테고요.”



    축하합니다, 인간 너머의 차원으로 진화하도록 선택되셨습니다

    컬트적 환경 안과 밖에서 언어는 실제로 생사에 영향을 미친다. 청소년 생명의 전화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나는 신중하게 고려해 내놓은 말이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걸 직접 목격했다. 반대로, 언어는 누군가를 죽게 만들 수도 있다.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의 발화와 누군가의 자살 사이의 인과관계는 2017년 미셸 카터(Michelle Carter) 사건을 통해 법적으로 확인되었다. 한 여자 고등학생이 남자 친구에게 문자로 ‘강제 자살’을 종용해 과실치사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이 사건은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미셸 카터 사건으로 인해, 미국에서는 최초로 말 자체의 치명적인 위험에 대해 전국 단위의 진지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해마다 우리는 묻고 또 묻는다. 사람들은 왜 존스타운이나 헤븐스 게이트 같은 컬트 집단에 들어갈까? 왜 그곳에 남을까? 그들이 거칠고 이해할 수 없는, 때로는 섬뜩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뭘까? 그 대답은 다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언어라는 궁극적인 권력 도구를 바탕으로, 전향(conversion), 조건형성(conditioning), 강제(coercion)라는 체계적인 기술을 활용한 덕에 존스와 애플화이트는 털끝 하나 직접 건드리지 않고도 추종자들에게 어마어마한 폭력을 가할 수 있었다.


    영향력의 스펙트럼 안에서, 컬트적 언어는 세 가지 역할을 한다. 첫째, 사람들이 스스로 특별하고 인정받는다고 느끼게 만든다. 러브바밍이 여기에 속한다. 자신에게만 쏟아지는 것 같은 관심과 이해, 용기를 북돋는 말, 취약함에 대한 요구, “바로 당신, 당신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왕국으로 향하는 엘리트 원정 팀에 합류하도록 지명되었습니다”라는 말. 이런 언어를 들으면 즉각 사기 경계 태세에 돌입하는 사람도, 혹은 그저 빈말이라는 사실을 간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갑자기 ‘딸깍’하고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들은 어느 순간 이 집단이 유일한 해답이며 다시는 뒤로 돌아갈 수 없다고 느낀다. 순식간에 발생하는 이런 경험 때문에 집단에 ‘가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전향이라고 한다.


    그러고 나면, 다양한 언어 전술을 통해 사람들은 지도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게 되고, 집단 바깥의 삶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여겨진다.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서 행동을 학습하는 이 무의식적인 과정은 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며, 이 작업을 조건형성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외부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한 집단에 충성하는 건 바로 이 조건형성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언어는 사람들이 기존의 현실, 윤리의식, 그리고 자의식과 완전히 상충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만든다. 여기에는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는 태도가 깔려 있으며, 최악의 경우 개인이 파괴될 수도 있다. 이런 과정을 강제라고 한다.


    컬트적 언어의 첫 번째 핵심 요소는 무엇일까? 바로 ‘우리 vs 저들’ 이분법을 만드는 것이다. 언어를 통해 추종자들과 다른 모든 이들 사이에 심리적 분열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아무리 전체주의 지도자라도 권력을 얻거나 유지할 수 없다. “파더 디바인은 항상 ‘우리/저들’을 확립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있고, 바깥의 적이 있는 거죠.” 전 존스타운 신도 로라 존스턴 콜이 설명했다. 목표는 추종자들에게 자신들이 모든 답을 가지고 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멍청할 뿐 아니라 열등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누군가를 설득해 다른 누구보다 그가 뛰어나다고 믿게 만들면, 그를 외부인들로부터 멀리 떼어 놓고 그를 착취할 수 있게 된다. 신체적 폭력에서부터 무급 노동, 언어폭력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것이라도 그들이 받아 마땅한 ‘특별 조치’로 둔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컬트가 처음부터 자체적인 은어를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어나 내부자 전용 만트라, 심지어는 ‘파이버랩’ 같은 단순한 명칭까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런 단어를 접한 잠재적 회원은 좀 더 알아보고 싶어진다. 일단 집단에 소속되면 회원들은 은어를 통해 동료의식을 다지고, 그들만의 암호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을 멸시하기 시작한다. 언어는 또한 잠재적 불순분자를 찾아낼 수 있는 기준이 된다. 누군가 새로운 용어를 거부한다면 그가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온전히 순응하지 않으므로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는 신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머리에 남는 별명과 내부자 용어는 정서적으로 강력한 무게를 지니게 된다. 특정 단어나 문구를 말하기만 해도 두려움이나 슬픔, 공포, 환희, 존경 등의 감정을 촉발할 수 있다면, 지도자는 이를 악용해 추종자들의 행동을 조종할 수 있다. 이런 어휘를 일부 심리학자들은 로드된 언어(loaded language)라고 부른다.


    모든 컬트 지도자의 레퍼토리에 로드된 언어와 함께 반드시 등장하는 보조 도구가 있다. 바로 ‘사고 차단 클리셰(thought-termination cliché)’다. 1961년 정신과 의사 로버트 J. 리프턴(Robert J. Lifton)이 만든 이 용어는 비판적인 사고를 억제해서 논의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캐치프레이즈를 가리킨다. 이 개념을 알게 된 뒤로, 나는 정치 논쟁부터 인스타그램 피드를 도배하는 #wisdom 해시태그까지 어디에서나 그 존재를 발견한다.


    컬트 지도자들은 의미 정지 신호(semantic stop sign)라고도 불리는 이 사고 차단 클리셰를 활용해 반대 의견을 재빨리 지나치거나 결함 있는 논리를 합리화한다. 리프턴은 저서 ‘전체주의의 사상 개조와 심리학(Thought Reform and the Psychology of Totalism)’에서, 이런 상투적인 표현을 통해 “가장 광범위하고 복잡한 인간의 문제가 단순하고 매우 선택적인, 얼핏 명료하게 들리는 문구로 압축되어 쉽게 암기되고 쉽게 표현된다. 이런 표현은 이데올로기 분석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 된다”라고 말한다. 로드된 언어가 감정을 증폭시키는 신호라면, 의미 정지 신호는 생각을 중단하라는 신호다. 쉽게 말해 이 두 가지를 함께 사용하면, 추종자의 몸이 “지도자가 시키는 대로 해”라고 외치는 동시에 그의 뇌는 “뒷일은 생각하지 마”라고 속삭이게 되는 것이다. 사상을 강제하기 위한 치명적인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vs 저들 이분법, 로드된 언어, 사고 중단 클리셰 같은 기술들은 공동체를 중시하는 개방적인 사람들을 컬트 폭력의 희생양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런 기술들이 사람들을 ‘세뇌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적어도 우리가 세뇌에 관해 들어 온 이야기처럼은 아니다.


    컬트 지도자 지망생을 실망시키고 싶진 않지만,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한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이라는 언어학 이론이 있다. 이 가설에 따르면 언어는 사고 능력에 영향을 미치지만 결정하지는 않는다. 즉,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언어와 사고가 일치하지 않더라도 생각할 수 있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시안’과 ‘세룰리안’이라는 색상은 둘 다 강렬한 푸른색 계열을 뜻한다. 하지만 이 명칭을 모른다고 해서 시각 시스템이 물리적으로 두 색 사이의 차이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이 부족한 어휘를 근거로 두 색상이 같다고 설득하려 든다고 해도, 이 이름 모를 두 파랑이 서로 다르다는 걸 직감으로 알고 있다면 ‘세뇌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지금까지도 많은 연구가 계속해서 “머리에 총구가 겨누어져도, 사람들은 원한다면 저항할 수 있다”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위의 인용문은 지난 50년 동안 컬트 집단을 분석해 온 영국의 사회학자 에일린 바커가 한 말이다. 바커는 ‘세뇌’의 과학적 타당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한 최초의 학자 중 한 명이다. 세뇌는 북한이 한국전쟁 당시 사용했다는 고문 기술로서 1950년 처음 언론에 등장했다. 1970년대까지 세뇌는 주류 개념이었으며 디프로그래밍(deprogramming)이라는 수상한 관행을 변호하는 데 이용되었다. 디프로그래밍은 신흥종교로 개종한 이들을 소위 ‘구출’하려는 시도였는데, 납치나 그보다 더 불법적인 수단이 자주 동원되었다.


    “그들이 자유의지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구실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바커의 설명이다. 그러나 바커는 통일교에 가입했던 경험이 있는 1016명을 연구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소위 세뇌가 일어날 법한 워크숍에 한 번이라도 참여할 만큼 상당한 관심을 보였던 사람들의 90퍼센트는 곧 통일교가 전혀 취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무니로서의 삶을 관두었다. 나머지 10퍼센트 중 절반 역시 2년 이내에 자체적으로 교단을 떠났다.


    그렇다면 5퍼센트는 왜 남았을까? 일반적으로 지적 능력이 부족하고 심리적으로 불안한 사람이 컬트에 오래 몸담는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학자들은 그게 사실이 아님을 증명했다. 바커는 연구에서 가장 헌신적인 통일교 개종자를 대조군과 비교했다. 대조군에 속한 사람들은 인생에서 그들이 ‘쉽게 넘어가도록’ 만들 법한 경험을 했다. 바커는 “가령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거나 지능이 상대적으로 낮았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대조군은 전혀 통일교에 몸담지 않거나 1, 2주 안에 무니 커리어를 중단했다. 우리는 흔히 컬트 집단이 ‘심리적 문제’가 있는 개인을 노린다고 믿는다. 그들이 더 잘 속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 컬트 포교자들은 사실 선량하고, 서비스 정신이 있으며 예리한 사람들이야말로 이상적인 후보군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사람들을 착취적인 집단으로 끊임없이 끌어들이는 건 절박함이나 정신 질환이 아니라 과도한 낙관성이다. 물론 정서적인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컬트 환경이 매혹적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삶의 전환기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에게 러브바밍은 특히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어딘가에 이끌린다는 것은 자아나 절망감보다 더 복잡하며, 애초에 건네받은 약속에 걸린 이해관계와 더 관련이 있다.


    우리는 언제나 남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이런 결함 있는 추론 방식은 인간의 고전적인 확증편향인데, 기존의 신념을 확증하고 강화하는 방식으로 정보를 찾고,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기억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동시에 신념에 반하는 것은 모두 무시하거나 내버린다. 전문가들은 아무리 논리적인 사람이라도, 심지어 과학자들조차도 확증편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데 동의한다. 건강염려증이나 선입견, 편집증 등 인간의 흔한 비논리성은 확증편향의 다양한 형태다. 일상의 사소한 일을 질병의 원인, 한 집단을 싸잡아 비난할 이유, 혹은 누군가 자신을 잡으려 쫓아온다는 증거로 해석하는 것이다. 들을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모호한 점성술이나 독심술, 소셜미디어상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추천’ 콘텐츠가 자신과 꼭 들어맞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확증편향 때문이다.


    컬트 지도자는 자기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고 추종자들이 열렬히 듣고 싶어 하는 정보를 일방적으로 제시함으로써 확증편향의 힘을 최대한 활용한다. 그러고 나면 확증편향이 알아서 작동한다. 동료집단의 압력이 더해지면서, 저항은 더욱 힘들어진다. 컬트 지도자들의 수사법이 그토록 모호한 것도 확증편향 때문이다. 자기 사상의 불건전한 점을 은폐하고 사상이 변화할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 의도적으로 형태가 불분명한 로드된 언어나 완곡어법을 이용하는 것이다. 한편, 추종자들은 원하는 모든 것을 언어에 투영한다. 예를 들어 존스가 ‘백야’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로라 같은 추종자들은 이 말을 원하는 대로 해석하고 폭력적인 의미가 내재할 가능성은 무시했다. 대다수 사람에게 확증편향의 여파는 존스타운 수준으로 심각하지는 않다. 그리고 그런 수준까지 도달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가 유독 순진하거나 절박해서는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유달리 이상주의적이다.



    당신의 삶을 바꾸고...... 몰라보게 근사해질 시간입니다

    스튜디오 피트니스 산업이 2010년대 초 갑작스럽게, 그리고 전례 없이 부상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시기, 전통적인 종교와 의료 기관 모두에 대한 성인층의 신뢰도는 급격히 하락했다. 복합 만성질환 자원 센터(Multiple Chronic Conditions Resource Center)가 2018년 실시한 설문조사의 그리 놀랍지 않은 결과에 따르면, 미국 밀레니얼 세대의 81퍼센트가 비싼 보험료를 비롯해 구조적인 인종 및 젠더 차별 등 수많은 요소로 인해 자신의 의료보건 경험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미국에 공공체육 프로그램이 없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일본 국민은 무상으로 방송되는 ‘라디오 건강체조’를 집에서 혼자, 혹은 아침에 공원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따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청년층은 별수 없이 자기 건강을 직접 챙겨야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컬트 피트니스’가 주로 영합하는 대중은 도시에 살며 금전적 여유가 있는 밀레니얼 세대인데, 이들은 기존의 종교를 포기한 이들과 꽤 정확히 겹친다. 이들에게 영적인 공동체 지도자 역할을 하는 건 이제 웰니스 스타트업과 인플루언서들이다. 자신의 브랜드가 최우선인 사람을 그렇게까지 신뢰하는 건 항상 위험한 일이지만, 돌아갈 곳이 없다고 느끼는 소비자들은 위험을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2010년대부터,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기업들은 일반적으로 탐나는 제품이나 서비스와 더불어 개인적 변화, 소속감, 그리고 인생의 커다란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제공하는 업체들이다. 점점 더 소외되는 이 세상에서 나는 누구인가? 주위 사람들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가장 나다운 나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고, 그렇게 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미국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은 이런 질문의 답을 찾고자 피트니스 스튜디오로 향하고 있다.


    “의미 만들기는 성장산업입니다.” 터 카일이 말했다. 교회와 마찬가지로, 피트니스 브랜드들은 사회적 정체성이자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되었다. 피트니스 ‘운동’은 관습과 의례, 사회적 기대, 그리고 결석이 초래하는 결과를 모두 포괄한다. 사람들은 스튜디오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와 배우자를 만나고, 진정한 골수 회원은 직장을 그만두고 직접 강사가 된다. “자전거 타고 싶지 않아요. 타고 싶은 적이 없어요. 머리 손질이 잘되면 그것만으로도 운동을 거를 충분한 핑계가 돼요. 지금 제가 일주일에 대여섯 번씩 자전거를 타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 정말 힘이 되는 공동체를 구축했기 때문이에요.” 2019년 ‘뉴욕’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한 열성 펠로톤 유저가 한 말이다. “단순한 자전거 그 이상이에요.”


    운동 스튜디오는 어느 정도까지는 성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결론적으로, 피트니스 스튜디오는 종교적 확신이 없는 젊은이들이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타인과의 연결과 실물 공동체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물리적 공간이 되었다. “우리는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어요.” 로스앤젤레스에서 에브리바디라는 ‘급진적으로 포용적인’ 체육관을 운영하는 샘 라이핀스키가 말했다. “우리 모두 서로 분리되고 격리되었지요...... 기술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어요. 우리는 자신의 몸과 연결되지 않고...... 다른 사람과도 그래요. 그러니 수준에 상관없이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공간이 있다면, 모두 행복해하며 찾아가는 거죠.”


    ‘의미 만들기’라는 지적 관념과 존재론적 고독에, 소셜미디어 피트니스 인플루언서와 그들이 홍보하는 소위 동경할 만한 몸매 기준의 부상과 고성능 스포츠웨어, 스마트 워치 같은 피트니스 트래커, 스트리밍 수업같은 스포츠 테크놀로지의 혁신이 더해졌으니 피트니스 사업이 신들린 수준으로 성장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업계 전반에 걸쳐 ‘컬트 운동 언어’가 의례적이고 소수만의 특별한 경향을 띠는 건 사업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로드된 만트라와 독백은 사람들이 너무나 강렬한 경험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결국 다시 되돌아오고 입소문을 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피트니스 브랜드들이 고객의 재방문을 유도하기 위해 그룹 체중 측정이나 피트니스 트래커 같은 방식으로 회원 사이 압력을 십분 활용해 왔다는 점은 명백하다. 부모님이 애플워치를 샀을 때, 나는 두 분이 여름 내내 하루에 더 많은 걸음을 걷기 위해 무자비하게 경쟁하는 걸 목격했다. 그러나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경쟁만으로는 사람들을 잡아 둘 수 없다. 오직 기록만을 위해 운동하는 이들은 12개월 안에 떠날 가능성이 크다. 소속감과 자부심, 그리고 임파워링이 뒤따라야 회원들이 한 해가 지나고 다음 해가 와도 피트니스 맴버십을 갱신하게 만들 수 있다. 언어는 공동체와 동기부여라는 ‘중독적인’ 콤보를 엮는 접착제다.


    이 점을 기억하더라도, 지나치게 과장해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우우 운동 만트라는 마셜 애플화이트나 리치 디보스 같은 지도자가 현실을 가리는 데 사용한 기만적인 도그마와는 전혀 다르다. 확실히 말하건대, 내가 살펴본 ‘컬트 피트니스’ 수사법 대부분은 흉악한 동기를 감추고 있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내부 언어를 회원들의 바깥 삶과 분리하는 경계선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전반적으로 의례 시간의 규칙이 지켜지는 것이다. ‘컬트 운동’ 수업이 끝나면 회원들은 스튜디오를 빠져나가 원래 자신처럼 말할 권리가 있고, 대부분이 그렇게 한다. ‘컬트 피트니스’ 언어를 쓰는 참가자들이 대체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암웨이나 헤븐스 게이트와는 달리, 컬트 피트니스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일종의 환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말하자면 자신이 실제 ‘사업가’도, ‘챔피언’이나 ‘전사’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강사가 쓰는 언어의 출처가 고대 수도승이든, 자기계발 강사든, 올림픽 코치든, 군대든, 아니면 이 모든 것의 혼합이든, 결국은 환상을 만들어 내는 수단일 따름이다. 그가 쓰는 용어와 말투는 회원들을 초월적인 인식의 공간으로 데려가지만, 수업 시간 동안에만 유효한 일이다. 상황이 지나치다 싶으면 추종자들은 언제든 삶을 파괴하는 탈퇴 비용 없이 떠날 수 있다. BDSM 비유로 돌아가면, 피트니스 스튜디오는 회원들의 동의를 얻은 셈이다. 적어도 그게 원칙이다.


    그러나 우리가 쭉 봐 왔듯, 의미를 미끼로 돈을 청구하는 매혹적인 지도자가 있는 곳에는 항상 일이 잘못될 가능성이 있다. 컬트 피트니스 언어가 온통 다른 세상의 말처럼 들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수업이 회원들의 건강뿐 아니라 인생 전반에도 필수적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다. 추종자들에게 자극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것만큼이나, 그들을 강사에게 심리적으로 밀착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마치 피트니스 수업이라는 구루가 회원들의 행복을 위한 궁극적 해답을 쥐고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말이다. 언어가 피트니스 강사, 셀러브리티, 테라피스트, 영적 지도자, 섹스 심벌, 그리고 친구 사이의 경계선을 흐릿하게 만들면, 의례 시간에 혼란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강사가 휘두르는 힘은 착취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당연히 “있잖아, 우리 브랜드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고 있는 것 같아. 구호를 좀 차분하게 만들어야겠어”라고 생각하는 피트니스 업체는 없다. 결국은 그들도 ‘컬트 추종자’를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각 브랜드는 언어가 이런 목표를 이룩하기 위한 핵심 요소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망설이지 않는다.


    미국에서, 사람들은 자기계발을 숭배하도록 길러진다. 생산성, 개인주의, 규범적 미의 기준을 만족시키려는 의지 등 전통적 미국의 가치를 대표하는 피트니스는 특히 강력한 자기계발의 형태다. “최고의 모습이 되라” “몸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고, 삶을 바꿔라” 등 컬트 피트니스의 언어는 헌신, 복종, 변화 등의 종교적인 요소를 인내심이나 신체적 매력 같은 세속적인 이상과 결합하는 역할을 한다. 현대 시민 대다수에게 비주류 종교 공동체를 진지하게 찾아 헤매는 일은 부담이 되지만, 자본주의 야망을 추구하는 사람과 함께 우우 언어를 좇는 것은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지는 일이다. 인텐사티부터 크로스핏에 이르는 집단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세속적 ‘컬트’를 만들어 냈다.


    전반적으로, 신흥종교 전문가들은 컬트 피트니스의 폐해가 사이언톨로지 수준으로 쌓이리라고 우려하지는 않는다. “어떤 운동은 분명 ‘컬트적’이지만, 이 표현이 딱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스탠퍼드의 인류학자 타냐 루어만이 말했다. 루어만이 피트니스광들에게서 찾아낸 주요한 ‘컬트’ 증상은 규칙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면 인생 전반이 극적으로 나아지리라는 믿음이다. 일주일에 다섯 번 수업에 가고 만트라를 외우면, 눈앞의 세상이 다르게 펼쳐지리라는 믿음 말이다. 이 집단, 이 강사, 이런 의례가 실제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룩할 힘을 가졌다는 확신, 즉 과도한 이상주의다.


    이런 믿음을 착취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러나 컬트 피트니스 산업을 지나치게 과장되게 평가하기가 꺼려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결국 자신의 경험을 직접 통제하기 때문이다. 스피닝 클래스에서 당신은 자전거의 저항값을 직접 조정한다. 교실 앞의 혹은 스크린 속의 ‘컬트적인 여성’을 무시하고 속도를 줄이고 싶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 높은 권세에 기도하려면 주님의 감화를 찬송하면서 그렇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냥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파티나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러다가 6개월이 지났을 때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하거나 그저 다른 걸 시도해 보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면 된다. 당신이 점수판에 지니는 애착이 그렇게나 크다면, 서프보드 필라테스로 종목을 바꾸어도 사라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