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도서 요약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물리 이야기

저   자
하시모토 고지 (지은이), 서수지 (옮긴이), 김석현 (감수)
출판사
사람과나무사이
출판일
2022년 10월
서   재







  • 물리학자의 눈으로 바라보면 사물과 현상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까요? 저명한 물리학자와 함께 ‘물리학 안경’을 쓰고 지하철역, 마트, 주방, 엘리베이터 안, 에스컬레이터와 보도블록 위를 걸어보세요.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놀라운 물리 법칙을 간파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물리 이야기


    카오스를 즐기는 물리학자의 인생

    ‘무한한 가능성’은 존재할까?

    세상에는 가볍게 ‘무한’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다. 직업병 탓인지, 나는 경솔하게 '무한'이라는 말을 내뱉지 않는다. 물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세간의 안일한 고정 관념에서 스스로 한 걸음 빠져나오기 위한 장치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업병이라는 의미를 조금 더 풀어서 이야기해보자. 이론물리학자의 임무는 이 세상의 현상을 수식으로 기술하고, 그 수식에서 새로운 현상이나 미래의 현상을 예측하는 일이다. 세상의 현상을 수식으로 기술할 때 ‘무한 극한’을 고려할 필요가 있기에 나는 평소에도 ‘무한’을 늘 염두에 둔다. 가령 산책할 때 내가 지금 걷는 지면은 평평해도 사실 지구는 둥그니 지면은 평평하지 않고 아주 약간 휘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하지만 땅바닥의 곡면을 평소에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건 곡면의 영향이 거의 없을 만큼 지구가 충분히 크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지구의 반지름을 무한대로 가정하고 근사치를 구해본다.


    인공위성의 운동을 가정하거나, 달에 가는 로켓을 구상할 때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지구가 무한히 넓은 평면이라는 식으로는 근사치를 구할 수 없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상황에서 ‘무한’이 필요하고, 어떠한 상황에서 ‘무한’이 필요 없는지 판별해야 한다.


    이론물리학자는 언제나 “무한대로 늘리면 이야기가 간단해지지만, 정말로 무한대로 늘려도 괜찮을까요?”와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다. 요컨대 직업병 탓에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말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셈인데, 처음에 거론했던 ‘무한한 가능성’은 어느 정도로 큰 가능성일까?


    ‘초전도 건물’에 숨겨진 ‘경로 적분’의 비밀

    물리학에는 고전 역학과 양자역학이 있다. 아마 독자 여러분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으리라. 고전 역학이란 입자 운동이 한 가지 원리에 지배되는 역학으로, 20세기 초까지 모든 물리 법칙이 고전 역학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하며 고전 역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입자의 거시적인 움직임이 발견되었고, 이를 양자역학이라 부르게 되었다. 양자는 파동과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가설이다. 입자와 달리 파동은 나아갈 때 퍼지는 성질이 있다. 즉, 일직선으로 날아가지 않고 어느 정도의 너비를 유지하고 넓어지며 날아간다.


    노벨상 수상자인 위대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은 넓어지며 날아가는 입자의 양자역학을 ‘경로 적분’이라는 이론으로 재구성했다. 경로 적분이란 다양한 경로를 설정하고 그 경로들을 입자가 날아간다고 가정했을 때, 확률적으로 최단 경로를 선택할 확률이 높아지고,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확률적으로 선택 확률이 낮아진다는 이론이다.


    나는 물리학자라 고전 역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사랑한다. 요컨대 도보 출퇴근 문제에서 이기려면 고전 역학이 아닌 양자역학의 경로 적분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야기가 거창해졌는데, 알고 보면 매우 간단하다. 누구나 실행할 수 있다. 매일 출퇴근할 때마다 다른 경로의 길을 걸으며 다양하게 시험해보자. 그 과정에서 매우 재미난 사실을 알게 된다. 돌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경로가 실제로 걸어보니 신호가 바뀌는 타이밍이 기막히게 잘 맞아 걷기 딱 좋은 경로였다거나, 동네 사람들만 아는 으슥한 골목 지름길을 발견한다거나, 지도에 실리지 않은 경로를 우연히 발견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이러한 도보 출퇴근의 경로 적분 결과, 이론으로는 예상할 수 없었던 경로를 발견할 수 있다.


    물리학자는 모두 ‘근사병 환자’다?

    물리학자는 다양한 대상을 ‘근사(approximation)’하며 짜릿한 쾌감을 느끼는 종족이다. 물리학자를 만나 무언가 대화를 시작하면, 물리학자는 여러분의 근삿값을 구하는 중일 수도 있다. 나도 ‘근사병’에 걸린 지 오래돼 이미 고질병이 되었다. 이제는 지병으로 안고 살아가고 있다. 안타깝게도 근사병은 불치병이라 약도 없다.


    물리학자에게 유난히 근사병이 많이 발병하는 이유는 물리학자에게는 기본적으로 사물의 양을 비교하는 사고방식이 장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대상을 비교해 이쪽이 크고, 저쪽이 무겁다는 식으로 비교한다. 크고 작음은 실험 관측의 기본이며, 실험 기구를 주섬주섬 꺼내 본격적으로 판을 벌이기 전에 근삿값을 추측하는 능력은 물리학자에게 필수적인 소양이다.


    안타깝게도 근사병은 일종의 직업병이다. 물리학에서는 크기의 기준을 ‘스케일(scale)’이라 부르며, 스케일에 관한 감각을 중시한다. 스케일은 물리학 내용뿐 아니라 물리학자들이 모이는 학회에서도 사회성을 지배한다. 예를 들어 일본 물리학회는 수많은 소규모 커뮤니티로 나뉘어 있고, 각각의 커뮤니티 안에서 성과 발표와 토론이 이루어지는데, 커뮤니티는 대상이 되는 물질의 스케일로 나눈다. ‘소립자’, ‘원자핵’, ‘우주’ 등이 물리학회에서 커뮤니티를 나누는 기준이다.


    우리 행동을 지배하는 힘, ‘히스테리시스 현상’의 비밀

    내가 대학원 박사 과정에 들어갔던 무렵의 일이다. 혼자 자취를 시작한 나는 평소에 연구실 동료나 선배와 같이 저녁을 때우고 들어왔다. 연구실에서 캠퍼스 밖의 밥집까지 다 같이 걸어갔다. 어느 날 나는 매번 같은 가게에 가는데, 가는 길과 오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길이나 거리는 같았다. 그런데 매번 가는 길에는 석재상 앞을 지나가고, 올 때는 주차장을 가로질러 왔다. 왜 그랬을까? 이 불가사의한 현상을 알아차린 나는 돌아오는 길에 생각에 잠겼다.


    가는 길과 오는 길이 다르다는 현상은 놀랍지만, 그렇다고 이 현상을 친구에게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대학원생이라도 명색이 물리학자인데 자존심이 상한다. 기이한 현상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매우 광범위한 현상에 적용 가능한 경우, 설명하는 이론은 ‘아름다운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나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가는 길과 오는 길을 머릿속에 지도로 그려보았다. 그리고 문득 그 그림이 어느 자성(magnetism) 교과서에 실린 그래프를 쏙 빼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히스테리시스(hysteresis)란 자석을 만들 때 사용되는 물리 현상으로 ‘이력 현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석이 아닌 강철에 다른 강한 자석을 붙이면, 그 강철이 자석이 된다. 붙였던 강력한 자석을 떼도 강철은 자성을 계속 띠고 있다. 다시 말해 자성이 없던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고 자석을 한번 갖다댔다는 지금까지의 이력을 강철이 ‘기억’하고 있다. 이 현상을 ‘히스테리시스’라 부른다.


    재미있게도 N극과 S극이 뒤바뀐 강력한 자석을 그 강철에 다시 갖다댔다가 떼어내면 이번에는 강철이 N극과 S극이 거꾸로 된 자석이 된다. 강철이 자석이 되었을 때, 어떠한 방향으로 강력한 자석을 갖다댔다가 떼어내는지 이력에 따라, N극과 S극의 방향이 결정된다. 이와 같은 이력 현상을 이용해 자석이 만들어진다.


    밥집 이야기로 돌아가자. 가는 길은 연구실에서 출발한다. 반면 돌아오는 길은 밥집에서 출발한다. 이력이 달라진다. 같은 지도 위에서 움직여도, 출발점과 도착점이 바뀌기만 해도 경로가 달라진다. 우리의 매일 밤 행동은 히스테리시스 현상에 지배받고 있었다.


    “당신 인생은 카오스 같네요”라는 말을 듣고 기뻐 춤추는 까닭

    내 전문 분야인 물리학이란 과거의 상태를 알고 미래를 예측하는 학문이다. 시간이 흐르면 어떤 식으로 변할지, 그 변화를 예측하는 게 물리학의 임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미래 일을 훤히 내다보는 척척박사처럼 들리는데, 물론 미래 예측에는 넘어야 할 난관이 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카오스’다.


    물리학에서 다루는 대상은 카오스적인 대상과 카오스적이지 않은 대상으로 나눌 수 있다. 카오스적인 대상은 두 가지 성질을 겸하고 있다. 첫째, 초기 조건의 민감성. 둘째, 에르고드성(ergodicity)이다. 말로 하니 어려운데 알고 보면 간단한 이야기다. 인생에 비유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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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오스의 첫 번째 성질인 초기 조건의 민감성이란 최초의 상태를 아주 약간만 바꾸어도 결과가 극적으로 달라진다는 가설이다. 산꼭대기에 공을 살포시 내려놓았다고 상상해보자. 공을 살짝 동쪽으로 밀지 서쪽으로 밀지에 따라 굴러가는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이처럼 만약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상상할 때가 있다. 아주 약간만 다른 판단을 해도 인생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카오스 이론을 알고 나면 카오스가 아닌 인생은 시시하다. 카오스가 아닌 물리 시스템은 같은 구간을 영원히 빙글빙글 도는 시스템이다. 안타깝게도 물리에는 시간의 끝이 없다. 정말로 영원히 맴돈다. 카오스의 초기 조건 민감성이 있기에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카오스의 두 번째 성질인 에르고드성은 ‘온갖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다’는 가설이다. 위상공간 중의 한 점이 에너지가 같은 면 위를 구석구석 운동하는 성질을 설명하는 용어다. 시간이 가면 어떠한 가능성이라도 시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인생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인간의 인생은 유한하다. 한 번뿐인 인생이라는 말도 지겹도록 듣고 있다. 만약 인생이 카오스적이라면 시간만 허락된다면 자신의 온갖 가능성을 시험해보며 살 수 있다. 이 얼마나 멋진 인생인가.


    다코야키 반지름과 장수풍뎅이 크기에 상한이 존재하는 이유

    이 “다코야키 반지름에는 왜 상한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굽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기는 간단하다. 그렇게 대답하기 전에 잠시 물리적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지 생각하는 게 올바른 물리학자의 자세가 아닐까. 나는 생각을 거듭했다. 왜 이 세상에는 반지름 2센티미터 이상의 다코야키가 존재하지 않을까?


    다코야키의 본질이 그 존재의 조건을 규정하고 있을 터이다. 다코야키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겉바속촉’, 즉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식감이다. 다코야키의 표면은 노릇노릇하게 구워져야 입안에서 바삭하게 부서진다. 한입 베어 물면 입안에서 바삭한 표면이 으깨지며 안에 든 ‘촉촉한’ 반죽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게 다코야키라는 음식이다. 우리 혀가 느끼는 이 식감이 다코야키라는 음식의 본질이다. 다코야키에서 식감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다코야키를 먹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동의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안이 촉촉하고 녹진한 식감이 다코야키의 크기를 규정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다코야키 속은 왜 촉촉할까? 왜 다코야키 반지름에는 상한이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코야키의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다코야키와 곤충 크기 사이의 공통점을 찾기로 했다. 장수풍뎅이나 딱정벌레처럼 앞날개가 딱딱한 초시류 곤충의 크기에는 상한이 있다. 크기는 장수풍뎅이를 기준으로 뿔을 제외한 몸통 부분은 단면을 생각하면 커봤자 반지름 2센티미터 남짓이다. 다코야키나 장수풍뎅이나 크기만 놓고 보면 별 차이가 없다. 어린 시절 머리에 쥐가 나도록 이름을 외웠던 헤라클레스 장수풍뎅이처럼 덩치가 큰 장수풍뎅이라고 해도 역시 몸통 둘레의 반지름은 2센티미터에서 3센티미터 사이다. 과연 우연일까?


    딱정벌레목 곤충은 외골격이 갑옷처럼 단단한 껍데기로 둘러싸여 있어 한자로 갑충이라고 부른다. 몸 표면을 딱딱한 껍데기로 감싸 전체 체중을 떠받치는 구조다. 곤충의 몸 내부는 다양한 기관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구조를 확보해야 하는데, 모든 내장 기관을 지탱하려면 주위의 단단한 껍데기가 필요하다. 표면이 단단하고 안이 말랑말랑하다니, 다코야키와 같은 구조가 아닌가!


    물리학자는 어떻게 사고하는가?

    일본에 있는 1만 명 이상의 물리학자는 많든 적든 물리학적 사고법이 습관화되어 있다. 이 사고법은 물리학 연구에서 필요한 기술이다. 다시 말해 과학 발전의 배경에는 과학자 특유의 사고법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물리학적 사고법의 비결을 아낌없이 공개하리라. 물리학적 사고는 크게 네 단계로 이루어진다. 문제 추출, 정의 명확화, 논리 연역, 예언. 이 네 단계를 거치며 사고함으로써 물리학 연구를 차근차근 진행한다.


    비결 1: 문제 추출

    문제는 일반적으로 다중적이고 다양하기에 적절한 문제를 추출해야 한다. 여러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정리하는 방법과 자신의 전문성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나타내는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 버스에서 오간 지인과의 대화를 살펴보자. ‘죽겠군’이라는 부분은 의학부에 맡기고, ‘숨이 막힌다’는 표현은 문학부에 맡긴다. 자연과학부용으로 추출된 문제는 ‘버스 한 대에 사람을 태울 때 몇 명까지 탈 수 있을까? 유효 숫자 한 자리로 답하시오’가 된다.


    비결 2: 정의 명확화

    문제에 존재하는 애매한 표현이 과학에 방해가 되므로 적절한 정의가 필요하다.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수준의 정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의 전문 분야로, 자연과학부라면 계산으로 해결하기 쉽게 정의해야 한다.


    비결 3: 논리 연역

    문제가 정의되면 문제 풀이에 들어가야 한다. 물론 풀이에도 비법이 있다. 오로지 그 문제 풀이에 집념을 불태워야 한다. 자신의 전문성이 크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비결 4: 예언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론에 입각한 예언과 실증이다. 자신의 계산과 이론에 따라 실제 실험과 관측으로 실증해 이론의 정당성을 검증하는 과정이 바람직하다.



    나를 물리학자로 만들어준 것들

    수학자는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직업’이다?

    나는 지금도 수학자를 동경한다. 한때나마 수학을 잘하고 사랑한다고 착각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학과 물리학의 차이에 대한 ‘착각’은 내가 물리학자가 된 이유와 근본적으로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므로 여기서 그 착각에 대해 파헤쳐보기로 하자. 결론부터 말하면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가 내 착각을 일깨워주었다. 대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이 우주에는 말이지, 풀어야 할 아주 중대한 문제가 있다. ‘우주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또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는 문제다. 이 문제를 수식을 이용해 푸는 학문이 있다.”


    그 순간 받은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당시 말씀하신 분은 아오야마 히데아키 교수님으로 전공은 소립자론이다. 교수님은 유창한 말솜씨로 이 우주의 구성요소 문제, 소립자 그리고 소립자 운동을 결정하는 수리 체계가 존재하고 그 체계가 우주의 거의 모든 현상을 표현하고 기술할 수 있다는 데까지 설명을 펼쳐 나가셨다.


    그때부터 막연히 왜 내가 수학을 즐기지 못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 수학은 고등학교 수학과 다르다. 대학 수학은 수학자를 위한 학문으로 수학자란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직업이다. 모순되지 않는 논리에만 의존해 언어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수학이다.


    물리학이란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온갖 현상을 수식으로, 수학자가 만들어낸 미분과 적분 등의 개념을 구사해 현상의 이유를 해명하는 학문이다. 물리학이라는 학문에는 대우주, 즉 자연이 제공하는 다양한 도전이 존재한다. 때로 수학자가 새롭게 개발한 언어를 사용해야 할 때도 있다. 따라서 이것은 수학에 가까워도 수학은 아니다.


    지금은 고등학교 수학이 어떤 것인지 안다. 고등학교 수학은 이미 개발된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지를 훈련하고 그 언어를 사용하면 어떤 개념으로 이어질지를 시험하는 장이다. 그 과정을 우리 물리학자는 ‘산수’라 부른다. 산수는 수학이 아니다. 진짜 수학에 경의를 표하며 물리학자가 사용하는 도구는 산수로 부르기로 하자.


    연구 논문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다리’다

    교과서를 읽으면 하품이 나오고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잠이 솔솔 쏟아지는 건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교과서가 ‘신의 관점’에서 집필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신의 마음을 한낱 인간이 어찌 알 턱이 있겠는가. 신이 쓴 책은 설령 이론적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집필했더라도 재미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다. 각종 교과서 중에서 수학 교과서는 신이 주신 ‘퍼즐’을 푸는 기분이라 그나마 낫다. 하지만 역사 교과서처럼 역사적 사실을 줄줄이 나열하는 과목은 진정한 신의 관점이다. 쉽게 말해 모든 것을 아는 인간은 있을 리가 없는데 마치 모든 것을 안다는 듯이 만들어진 책이 교과서다.


    자, 이쯤에서 이 문장에서 말하는 ‘신’을 정의해보자. 신이란 전 인류의 집합체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존재다. 이 정의에 따르면, 교과서는 신의 관점에서 집필된 책이다. 사실은 지금까지 수많은 연구자가 해명한 ‘사실’을 집대성한 책이면서 마치 혼자 전부 알아낸 듯 이야기한다. 그것이 학교 교과서다. 신의 관점에서 쓰인 책이기에 우리 인간은 공감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물리학자가 쓴 연구 논문은 어떨까? 연구 논문은 신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 딱 중간,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연구 논문은 인간이 신과 만나는 순간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이론물리학은 이 세계의 다양한 현상을 수식으로 풀어내는 학문으로, 이론물리학의 거의 모든 논문은 그러한 의도로 집필되어 있다. 논문은 모두 집필자가 있고, 집필자는 논문에 적힌 과학적 성과를 설명하는 주체다. 따라서 논문 단계에서는 그 사람의 시점이다.


    한편 이론물리학의 여러 논문은 가설이다. 자연 현상과 비교해 그 가설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한다. 실제로 물리 실험을 진행해 이론 가설대로 실험 결과가 도출되었을 때 그 가설은 자연의 진리를 파악한 단계로까지 격상된다. 이를 “가설이 ‘자연’에 선택되었다”고 표현한다. 그때가 말 그대로 신의 관점에 다가가는 순간이다. 자연이야말로 인류의 집단 지성을 초월한 존재이며 자연의 원리를 규명하는 학문이 물리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위치에 연구 논문이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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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